프랑스 교환학생 일기
*프랑스에 상륙한 지 겨우 3주밖에 안 됐던 9월에 썼던 일기를 이제야 발행합니다.
2023.9.11 (월) / 프랑스 릴
1. 아침 조깅
아침 7시에 조깅하기. 못 할 줄 알았는데 내가 해냄. 프랑스는 조깅러가 정말 많다. 기숙사 바로 앞에 있는 시타델 공원이 정말 예쁘다. 오각형의 요새를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는 공원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아름다운 경치를 뽐낸다. 새미랑 뛰면서 판타지 영화의 시작 같다고 이야기했다. 새로운 곳에서 온 두 사람이 뭣도 모르고 조깅을 하다가 미지의 공간에 발을 들이는 그런 장면이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정말 그런 신비로운 곳이다.
2. 아침 식사
아침 조깅 후 기숙사로 돌아와 크루아상, 빵 오 쇼콜라, 마들렌을 먹었다. 프랑스의 장점 중 하나는 빵이 맛있고 싸다는 것이다. 크루아상과 빵 오 쇼콜라는 보통 1유로이며, 마들렌은 두 개에 3유로였다. 어느 빵집에 가도 빵이 정말 맛있다. 아이패드로 보는 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빅뱅이론. 벽에 붙여둔 건 마그리트와 샤갈의 작품들.
3. 청소와 빨래
수업 가기 전 집안일을 처리했다. 내 방은 회색이라 서늘하고 척척한 느낌이지만 방 크기가 꽤 크고 창이 커서 좋다. 방을 아늑하고 따뜻한 색깔로 꾸미는 걸 좋아하는데 이곳에 겨우 4달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돈을 쓰기가 아깝게 느껴진다. 깔끔하게 유지하다가 갈 생각이다. 이때부터 점점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4. 수업 듣기
수업 장소를 찾다가 30분이나 지각했다. 전공 건물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곳에 떨어져 있었는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늦게 도착한 교실은 창문이 없어 완전히 더위로 잡아먹힌 곳이었다. 비 오기 직전의 눅눅한 공기가 가득 차서 다들 종이로 부채를 만들고 교수님도 땀으로 옷이 젖었다. 에어컨이 없는 나라라고 사람들도 더위를 안 탄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아무튼 이 수업은 제일 기대했던 영화 수업이었는데, 기대한 만큼 내게 그대로 실망을 안겨주었다. 교수님 말씀이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윽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난 완전히 집중력을 잃었다.
5. 카드 게임
수업이 끝나고 비가 그치길 기다리면서 학생 라운지에서 새미와 카드 게임을 했다. 프랑스에서는 사람들이 카드 게임을 하는 걸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다. 치열한 접전 끝에 내가 이겨서 다음에 새미가 요리를 직접 해주기로 했다. 새미야 나는 떡볶이 ㅎㅎ
6. 저녁 식사와 후식
우리 기숙사에서는 공용 주방을 사용해야 한다. 오늘은 닭볶음탕을 해 먹기로 했다. 준비물은 닭, 간장, 고추장, 마늘과 양파, 햇반. 가난한 교환학생에게 이 정도면 만찬이다.
공용 주방 뷰. 프랑스의 창은 커다랗고 시원해서 좋다. 하지만 방충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완성된 닭볶음탕
후식으로는 선데이 마켓에서 사 온 귤. 1킬로에 2유로 정도로 굉장히 저렴한 데다 맛도 환상적이다. 내가 먹어 본 귤 중에 제일 맛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일요일마다 마켓에서 과일과 야채를 사 와 일주일 동안 열심히 먹는다.
7. 여행 계획 짜기 & 사진 보정
오늘은 비가 오는 데다 두통도 있어서 집에만 있기로 했다. 밀린 사진 보정을 하고 여행 계획을 상세히 세웠다. 현재까지 세운 여행 계획에는 파리, 런던, 오스트리아, 프라하, 독일, 로테르담, 스페인, 포르투갈이 있다. 수업을 듣는 날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여행으로 채우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가는 것이 아까운 날들이다. 내 인생에 이런 시기는 다신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기란 프랑스의 대학교에서 철학과 영화를 공부하고 안전한 기숙사에 지내며 돈 펑펑 쓰며 유럽을 여행하고 또래 친구들과 프랑스 삶을 즐기는 날들이다. 교환학생만의 특혜라고 할 수 있다.
집 앞 공원 사진
사진 동아리 합격했다! 열심히 활동하고 싶은데 여행 다니느라 참석을 잘 못할까 봐 걱정이다. 국제학생도 나뿐이라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지.
8. 그리고 밤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하늘이 주황색과 분홍색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노을은 그걸 지켜보는 얼굴도 주황빛이 될 정도로 짙게 물들었다. 한가로운 한 학생의 평화로운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법으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꽤 오랜 시간 프랑스에 오는 것을 꿈꾸어 왔다. 프랑스에서 철학과 영화를 공부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한 것이 2019년이다. 나는 지금 꿈을 이루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며 내 안에 궂은 것들을 흘려보냈다. 이 인생을 한번 잘 꾸리고 살펴보겠다는 용기를 내본다. 비 오는 릴, 한가로운 교환학생의 하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