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리 다셰의 만화 <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에 부쳐
생각해보면 내 주위엔 늘 별난 사람들이 있었다.
별난 데가 있는 사람은 어딘가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지만 그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유사한 패턴을 공유하고 자신만의 또렷한 무늬는 적당히 흐릿하게 묻어가며 '보편적' 혹은 '정상적'이라는 형용사로 두루뭉술 묶인다. 여기 한데 묶이지 못하고 도드라지게 유별나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별난 사람으로 불린다.
사회적 '허용 범위' 안으로 그럭저럭 뭉쳐 들어간 사람들에게 이들은 괴짜, 아웃사이더, 별종, 외톨이 등으로 비추어진다. 허용 범위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상인이 되고 그렇지 않은 이는 비정상인으로 취급된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자주 언급되던 ‘기타 누락자'라는 말도 얼추 들어맞는 것 같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근거는 무엇일까.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오래도록 생각해온 질문이다. 그러나 '정상-비정상'과 대구를 이루는 가장 일차원적 설명은 '다수-소수'가 아닐까 하는 잠정적 결론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학교 생활에서도, 동아리 활동에서도, 직장 생활이나 사회 모임에서도, 나는 늘 '별난 구석이 있는' 이들에게 끌렸(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 또한 별난 구석이 있어서? 당시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슷비슷하고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한때 긍정적으로 별난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평범하게 둥글어진) 내게 별난 자극과 별난 호기심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라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어쩌면 이기적 발상일지도.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내 안의 별난 구석이 외부의 별난 구석들과 밀고 당기듯 조응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평범하고, 진부하고, 안주하는 것,을 경계해왔으면서도, 나는 평범하고, 진부하고, 안주하는 삶을 살아왔다. 지금 돌아보니 대체로.
그러니 별난 구석을 쫓는 마음은, 별나고 싶었으나 별나지 않다는 자각으로 마무리된 나의 인식에 일종의 '대리 보충' 같은 개념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다. 여하튼, 나는 별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편안했다,고 해야겠다. 내게 편안하다,라는 말은 ‘가면을 쓰지 않아도(혹은 덜 써도) 좋다'라는 의미이다.
내가 알았던 모든 별난 사람들은 자신의 별난 구석을 애써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였기에 '별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 ‘별난 양상’은 다양했다. 거침없는 말투, 엉뚱한 생각, 특별한 애착, 독특한 옷차림, 유별난 습관, 놀라운 몰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태도 등. 그들도 나름 (사회적 역할에 부응하는) 가면을 쓰고 살았을 테지만 적어도 그것(가면)에 구속되거나 그 구속되었다는 생각 자체로 괴로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마저 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유독 나의 시선을 끌었던 책 제목. <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
이 책은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 프랑스 여성 마그리트를 주인공으로 그린 그래픽 노블이다. 회사에서 업무 능력이나, 책임감, 근무태도 등엔 별 문제가 없지만 동료들과 잘 섞이지 못해 혼자 점심을 먹는 그녀는 모임이나 회식 같은 번잡한 자리를 견디지 못한다. 파티를 즐기는 남자친구와도 갈등이 심해지고 직장에서는 왕따가 된다. 소음에 극도로 민감해 평소에도 귀마개를 하고, 유머나 은유를 이해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 정해진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순서나 시간이 달라지면 패닉에 빠진다. 자신의 문제를 성격 탓으로 여기고 괴로워하던 마그리트는 전문가 상담을 통해 자신의 증상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일종의 자폐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마그리트의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인 쥘리 다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들과 다른 별난 구석 때문에 하루하루 힘겨운 투쟁을 벌이며 살아가는 그녀가 진단을 통해 마침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수용하게 된다는 이야기.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에서 사회심리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고 자전적인 그래픽노블을 출간하기까지의 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생소한 용어는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현대인에게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어떻게 이름 붙이든, 소위 ‘정상’의 범주 바깥에 자리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우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이다. 장애 혹은 증후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던가, 장애 혹은 증후군,을 일상의 단어처럼 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혹은 폐를 끼치지 않는) 개인의 특이점은 ‘다른’ 것이지 ‘이상한’ 것이 아닌 것처럼. 숨기거나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드러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방송에서 자신이 공황 장애를 앓고 있음을 스스럼없이 밝히는 연예인들처럼 말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장애(disorder) 혹은 증후군(syndrome)이라는 말은 점점 더 범람하는 듯하다. 무언가 조금 별나 보이고, 달라 보이고, 이상해 보이면 우리는 이제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어도 다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무나 쉽게 장애 혹은 신드롬이라는 꼬리표를 붙여가면서 개개 인간의 특수성을 어떻게든 사회적 보편성에 부합하지 않는 거슬리는 영역으로 세분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수와 달라서 고통 받는 소수가 있다. 그 소수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분류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스템의 함정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시스템 안에서 구분되고 정의된 소수는 그 시스템으로 인해 오히려 다수의 세계에서 더 멀리 밀려날 위험에 처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주홍글씨 A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것처럼.
별난 구석에 납득할 만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 명명으로 인해 한 개인이 그 자신 자체로서 이해 받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이름으로 명명된 다수 그룹 속에서 다시 피상적으로 뭉뚱그려져(혹은 왜곡되어) 이해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교육을 생각하면서, 사회화 과정을 더듬어보면서, 나 자신과 마주하면서, 인간의 개별성과 타자의 수용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납득할 수 없는 타자와 부딪치면서 알게 모르게 배타적으로 살았던 (그러나 관대하고 포용적인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과거에 비하여.
지나온 경로를 되돌아본다. 보편적 이상에서 개별적 현실로 관심이 이동했고, 보편적 삶의 내용에서 개별적 삶의 시각으로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보편적 인간에서 개별적 인간으로 시선이 움직여 왔다. 이젠 작가가 펼쳐내는 거대하고 다양한 작품 속 세계보다는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작가에 더 많은 관심이 간다. 다수,라는 말보다 소수,라는 말에 더 끌린다. 대승(大乘)보다 초기 소승(小乘) 불교의 정신에 더 매력을 느끼고, 종교적 맥락의 크라이스트(Christ)나 붓다(Buddha)보다는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Jesus)나 싯달타(Siddhartha)가 더 궁금하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대다수의 아이들보다 구석 한편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에게 더 많은 시선이 간다.
그간 별난 구석이 있는 사람에게 끌린 것도, 어쩌면, 대다수라는 덩어리 개념에 묻히지 않는 그 특수한 개별성이 좀더 또렷하게 다가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아닌) ‘너’를 ‘너’로서 받아들이는 (그 누구도 아닌) ‘나’를 흐뭇하게 여기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개별적 주체로서의 나와 또 다른 개별적 주체로서의 너의 만남은 다수의 익명성에 매몰되지 않을 독특한 무늬를 그려낼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고. 이로써 나의 별난 ‘나다움’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또 갱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에 산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이 자폐(自閉)라면, 우리는 누구나 자폐증을 앓고 있는 셈이다. 누구나 조금씩 별난 구석이 있다. 별나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달라서 각자 다르게 사는(혹은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그 ‘다름’의 스펙트럼은 넓을수록 좋다(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지구상에 사는 인구 수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