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준최선으로 롱런하기

문보영 산문집 <준최선의 롱런>, 그리고 일기 딜리버리에 부쳐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 L 시인이 여러 번 강조했던 말.


“하루 몇 줄이라도 좋으니 일기를 쓰세요.”


놀라운 말은 아니었다. 흔히 말하고 흔히 듣는 말 중의 하나였으니까. L이 시를 쓸 때 ‘단 한 줄이라도 빛나는 구절 만들기’를 염두에 둔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말하는 일기가 매일매일의 문장 연습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기를 썼다. 일기라기보다는 일지 혹은 짬뽕 노트라고 해야 할까. 그때그때 생각난 것을 적어두는 메모장이자, 그날 있었던 (기록해두고 싶은) 일들과 감정을 살풀이하듯 배설하는 창구이자, 뭔가를 읽다가 하도 인상 깊어 도무지 옮겨 적지 않고서는 못 배길 문장들을 하릴없이 적어두는 필사 공간 등등 다양한 역할이 두루두루 짬뽕된 노트. 간밤의 꿈을 기록하는 데 열심이던 시절이었므로 꿈 노트 기능도 장착했을 것이다. 때로는 사실에 허구를 더해 일기 이상의 것(소위 픽션 일기)을 시도해보기도 했던 기억.

문보영 시인의 산문집 <준최선의 롱런>을 보고 학창 시절 나의 노트가 떠오른 것도, '꿈의 기록'과 '픽션 일기' 형태가 포함된 이 책의 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두툼한 노트들은 다 어디에 있나. 분명 버리지 않고 신줏단지 모시듯 몇십 년을 끌고 다녔을 텐데. 여러 번의 해외 이사에도 살아남은(살아남았을 것이라 기대하는) 그 노트들의 행방이 문득 궁금해졌다. 어딘가 (오랜 사진과 노트들을 쓸어 담은) 누런 박스 중 하나에 보관되어 있겠지. (그러기를 바란다.)


별 걸 다 기록하는 나의 습성이 지속적인 일기의 포맷으로 남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졸업 후 미친 듯이 일하던 때야 그렇다 치더라도, 오랜 직장 생활에서 벗어난 때에도 나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무언가를 보고 읽고 들으며 기록을 남기기는 했어도. 매일의 사건과 생각, 감정을 직접적으로 (여과 없이) 남기지는 못했던 것. 지금 생각해보면, 적어내려갈 내밀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 적힐 느낌의 실체와 대면할 용기가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감정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것을 적는다는 행위에 뜻 모를 불안을 느꼈는지도 모르고.

아쉽기는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쨌든(어떤 방식으로든) 그 시간들을 견디었으니.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시간을) 견디는 방식의 일환으로 혹은 ‘대기상태’를 붙드는 방식으로 뭔가를 쓸 때, 일기는 꽤 유용한 수단으로 보인다. 단순히 '견딘다'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욕구에 가장 부응하는 글쓰기 형태랄까. 한국에 돌아와 일기(에 가까운 메모)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제는 좀더 거리낌없이 나의 감정과 사고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보고 싶다는 생각(어쩌면 여유) 때문일 것이다.

내게 일기란. 도전과 최선의 노력을 요구하는 대상(예컨대, 문학, 철학, 예술)도 아니면서, 나와 세계를 향한 시선에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도록 은근히 돕는 기특하고도 편리한 수행 도구이다. 그것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게다가 나 홀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에, 가장 내밀하고도 솔직한 심정, 가장 나다운 상태를 드러낼 수 있는 안전지대 혹은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는 공간이다.


'나답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나'라는 대상을 알고 있어야 '~답다'라는 접사를 붙일 수 있겠다. A답다,라는 것은 A라는 '성질이 있음', 혹은 A라는 '특성이나 자격이 있음'을 알려주는 접미사니까. '나'를 영원한 연구 대상 혹은 주제로 삼고 있는 자에게 일기라는 형식은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탐문하는 과정이자 기록일 것이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난다. 정돈되지 않아 혼란스럽다. 모욕이나 수치심을 느낀 것 같기도 하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고 슬프다. 노트를 펼쳐 적는다.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의 실체를 추적하기 위해 제반 사실들을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적어보려고 노력한다. 어떤 상황과 어떤 내력이 나를 특정 감정으로 몰고 가는가. 각각의 사실들에 점을 찍고 이리저리 점을 연결하다 보면 좀더 납득할 만한 해석의 공간이 드러난다. 꿈 노트를 들여다보며 현실에서의 이러저러한 정황과 나의 심정을 퍼즐 맞추듯 연결하다보면 무의식이 보낸 난데없는 이미지가 어느 정도 해석되는 것처럼.


그렇군. 일기는 자기 해석의 수단이다. 자기를 해석하는 일이니 대충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목숨걸지는 않는다. 당장 결론을 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두고두고 들여다봐야 할 주제라면 적절한 호흡으로 길게 봐야 한다.


그러니 <준최선의 롱런>이라는 독특한 산문집 제목은 단번에 나의 시선을 끌었다. 문보영 시인의 생기발랄한 행보(시 쓰기에 있어서나 번외 활동에 있어서나)는 늘 주목의 대상이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그리고 유쾌하게 공감한) 부분은 바로 일기에 관한 그녀의 관점이다.

엉뚱, 발랄, 유쾌한 문보영 시인의 글(일기)을 읽는 재미.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번아웃되지 않고 최선 직전에서 어슬렁거리며 간 보기. 준최선으로 비벼 보기. 멀리 봤을 때, 최선보다 준최선이 가성비가 더 좋을지도 모른다. 최선은 관성을 깨는 행위이기 때문에 관성이나 습관이 될 수 없지만 준최선은 관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준최선이 근육에 배면 어떤 일을 해도 디폴트 값으로 준최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최선과 한집에 살면 삶이 고달파지므로, 옆집이나 이웃 정도로 거리 유지를 하고 달걀 꿀 때만 최선이네 집에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략)

대충하는 것은 아닌데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서 묵묵하게 롱런하기. 준최선에서 한 계단만 오르면 최선이기 때문에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순간에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계단 내려와서 쉬고, 최선이 비켜난 자리에 친구나 여유, 딴생각과 재미, 그리고 소중한 것들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삶과 대충 사는 삶 사이에서 박쥐처럼 오락가락하며 어물쩍 살아가는 존버의 삶. 준최선 존버들의 삶은 개인마다 모습이 전혀 다를 것이다. 글쟁이인 나에게 준최선의 삶은 일기를 쓰는 삶이다. 최선을 다해서 일기 쓰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일기야말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연습, 준최선을 관성으로 하는 일상, 놀면서 바운스를 유지하는 가벼운 발걸음일지도.


- 문보영, <준최선의 롱런>, 34쪽




어제 문보영 시인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소위 ‘일기 딜리버리’. 원하는 독자에게 일반 우편과 이메일로 자신의 일기를 배달하는 재미있는 기획물이다. 구독하려면 1만원을 내야 한다. 엉뚱하고도 기발한 발상이 그녀답다,고 생각한다. 등단하자마자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고 첫 시집 <책기둥>으로 신선한 화제를 몰고온 젊은 시인. 신용목 시인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시에 대한 생각 전부를 제외한 것이 시’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문보영의 <책기둥>을 읽어보라고 했다. 과연. 내가 알고 있다 믿었던 시에 대한 생각을 가뿐하게 전복하는 시들이 거기 있었다. 탈지구적 체험이랄까. 분명 일상의 사물에서 출발하는데 따라가다 보면 중력을 잃고 붕 떠 있는 듯한 신기한 경험. 재미있다! 시인이 궁금해졌다. 춤을 추고, 유튜브로 브이로그를 만들고, 손글씨로 쓴 일기를 우편봉투에 담아 독자에게 보내는 시인.


손글씨로 보내온 일기 우편 딜리버리. 그림 설명은 덤. 봉투엔 귀염둥이 동물 스티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어느 자리에서 그녀는 시 쓰는 것을 혼자 논다,라고 표현했다. 공감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홀로 노는 것. 시인을 가장 시인답게 해주는 일이다. 한동안 나는 시를 쓰는 순간이 가장 나답다,라고 생각했다. 있는 힘껏 집중하여 나와 독대하는 정직한 시간. 그 시간을 온전히 즐겼지만 즐겁지만은 않았다. '즐김'과 '즐거움'은 다른 것이니까.


최선이 아닌 차선의 글쓰기. 그게 일기인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내면 보고서 같은 것. 일상의 단순한 기록일 수도 있고,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읽은 후 남긴 짧은 감상이나 제법 호흡이 긴 리뷰일 수도 있다. 순간의 생각이 몸피를 늘려 사유로 확장되고 그 부스러기가 단상으로 남기도 한다. 형식은 부차적인 것일 뿐.


문보영 시인은 <준최선의 롱런>을 이렇게 소개한다. "무너진 일상을 복구하면서 쓴 일기들"이자 "일상을 살아내지 못하는 어느 시인의 일상 고투기"라고. 일상에 관한 일기를 독자에게 보내는 것은 시인에게 일상을 살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녀에게 일기는 자신만 보는 내밀한 기록에서 더 나아가 일상을 잘 살아내면서 동시에 자신다움을 잃지 않고 타인과 소통하는 편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독백을 가장한 방백이랄까.


열린 일기.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이 오픈 다이어리를 지향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에 의해 드러나기를 바라는 심정. 나는 한때 들키고 싶지 않은 내면을 누군가에게 꼭 들키고 싶은 심정으로 시를 썼다. 감추면서도 드러내고 싶은 양가 감정. 어쩌면 그게 가장 나다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혼자 쓰고 혼자 보는 일기는 가장 나다울 순 있어도 자폐와 정체의 늪에 빠지기 쉽다. 혼자 쓰고 함께 보는 일기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순 없어도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신을 증명하는 가장 정직한 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처럼 일기와 함께 준최선으로 롱런할 일이다. 저자가 밝혔듯 "일기야말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연습, 준최선을 관성으로 하는 일상, 놀면서 바운스를 유지하는 가벼운 발걸음"일 테니까.


또 아는가. 그녀의 말마따나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순간에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최선을 다할 수 있을지.



*덧글.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 문보영 시인으로부터 또 다른 일기가 이메일로 배달되었다. 이번엔 제목마저 '그저 일기'이다. (번외 편)이라는 괄호가 심상치 않다. 여느 때보다 더 솔직한 목소리가 담겨 있을 것 같다는 예감. 예전엔 아무것도 아닌 일기를 쓰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이젠 누군가에게 읽힐 의도로 써야 한다는 시인의 부담감이 전해진다. 일기의 마지막 한 줄이 의미심장하다.


"나는 일기를 쓰고 싶어. 일기가 아니라면 일기스러운 시. 일기를 쓰지 않아서 아픈 것 같아. 나는 생각했다."


시인은 오픈 다이어리의 함정에 빠진 걸까. 남에게 보여주는 일기의 끝부분을 '일기를 쓰고 싶다'로 마무리하는 마음이라니. 차선에 지친 시인이 이제 최선을 다할 때가 온 모양이다. 알 것도 같다. 글을 쓰면서도 글을 쓰고 싶다고 토로하는 심정. 나다우려 애쓰면서도 더 정확히, 최선을 다해, 나답고 싶은 마음을.


L 시인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하루 몇 줄의 일기. 단 한 줄이라도 빛나는 시.


나도 쓰고 싶다. 그렇게 롱런하고 싶다.

가장 나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