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에 부쳐
아버지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가 달라졌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넓어지고 깊어졌다. 그저 ‘있음’으로만 존재했던 아버지가 젊은 날 쇼펜하우어와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에 심취했다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다. 작가의 꿈을 키운 적 있다는 것도, 소설 쓰기를 시도한 적 있다는 놀라운 이야기도, 딸은 마흔이 넘어서야 처음 알았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이제 내키지 않는다는 아버지. 만남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노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며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 나는 아버지의 상태와 나의 상태를 가만히 겹쳐 본다. 타인과 거리를 두고 싶은 심리적 상태는 유사했고, 만남(마주침 혹은 관계)에 대한 태도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생물학적 거리는 30년에 가깝다. 어느 순간 30년이라는 간격이 부쩍 좁아졌다는 느낌이 든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늙어가는 시기. 우리 부녀가 그 구간에 들어섰구나 하는 자각.
주위 어른들로부터 종종 들었던 말. 나이 들어 봐라, 그렇게 신나는 것도 없고, 그렇게 감동할 것도 없다. 감탄할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삶을 상상해본다. 자극도 동기도 없는 무기력한 자세. 수동적으로 ‘살아지는’ 상태. 우울의 다른 이름일까. ‘자폐 스펙트럼’처럼 우울에도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면 아버지와 나는 위치와 양상을 조금 달리할 뿐 그 자장의 가장자리쯤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우울에 대한 피상적인 독해만을 일삼아온 것 같다. 애도와 우울증을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논점을 시작으로, 멜랑콜리의 세계를 기호학적으로 읽었던 벤야민이나 롤랑 바르트,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기웃거렸다. 보들레르를 다시 들추어보고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식이었다. 나의 ‘몸’에서 출발하는 감정을 먼저 읽었어야 했다. 이제야 반성한다. 지적 호기심과 허영심은 기질적 문제일까, 환경적 영향일까.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기에 앞서 감정의 동물이라는 것을 소홀히 여겼다.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찬찬히 벗겨지는 감정의 실체를 목격하면서도 나는 ‘균형 잡기’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성적으로’ 내 감정들을 잠재웠다. 이성적으로 감정을 ‘읽는’ 것과, 이론을 빌려 감정을 ‘덮는’ 것은 다르다. 나는 읽는 쪽보다 덮는 쪽을 택해온 셈이다.
# 잘 표현된 우울과 감정들
최근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을 읽고 있다. 이 책을 한 줄로 정리하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시인 김소연의 <마음사전>과, 사회학자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을 절묘하게 결합한 감정사회학 에세이,라고. “어느 내향적인 사회학도의 섬세한 감정 읽기”라는 부제 아래, 감정을 드러내는 다양한 형용사와 동사들이 섬세하지만 예리하게 다루어진다. 그것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정서를 나는 ‘우울’로 읽어낸다. “우울이야말로 감정의 군주가 아닐까”라는 저자의 생각처럼.
‘우울’에 관한 글들이 주를 이루는 1부를 읽다가 ‘우월하다’라는 글에서 잠시 멈춘다. ‘누군가의 우울감을 배우고 싶을 때가 있다’는 부제가 달려 있다. 누군가의 우울감을 선망하는 저자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글. 저자가 선망하는 지인 E의 우울감은 “현실을 예리하게 자각하는 사고가 스민 감정”이었다. 일상 차원의 우울과 임상 차원의 우울을 분별할 줄 몰랐던 저자에게 E의 우울감은 그저 멋져 보였던 것. 그의 우울감을 학습할 수 있을까 미심쩍어하면서도 그를 따라하고 싶다는 욕심. 저자는 인식하게 된다. E가 자신보다 우월한 관계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마음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혹은 철학적 접근에 주된 관심을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혹은 앞서 사유했던 이들의 우울, 그것도 빼어나게 잘 표현된 우울을 선망했던 것은 아닐까. 뭔가 그 정체를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내 산만하고 혼란한 감정들을 ‘슬픔’ 혹은 ‘우울’로 손쉽게 수렴하여, 앞선 자들이 우월하게 선점한 감정(혹은 그 분석)의 고지에 요령껏 오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 우울은 우월하다,는 편견을 오랜 시간 품어왔는지도 모른다.
어느 개인의 우울이 타인에게 매력으로 다가와 관계상 우위를 점하는 주요인으로 나타나는 상황. “우울증적 주체는 기본적으로 서사적인 주체”라는 문학연구자 허윤진의 설명을 인용한 부분은 그래서 적절해 보인다.
문인과 예술가들은 일찍이 우울, 서사, 지식, 감수성이 배합된 기록으로 매력적인 우울의 가치를 설파해왔다. 역사적으로 매혹적인 우울은 작가 자신의 생애 자체를 신화화하는 자원이었다. 우울은 작가가 독자 및 관객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감정 상품이었다. 작가들은 우울을 통해 독자와 관객이 감정의 월반을 체험하게끔 도모하는 존재였다.
-김신식, <다소 곤란한 감정>(프시케의숲, 2020), ‘빼어나다’, 34쪽
저자가 내건 중간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울은 ‘감정을 되돌아보는 감정 경험’이라는 것. 나는 현재 감정을 되돌아보는 ‘감정 경험’ 중인가.
달관과 체념의 차이를 생각한다. 나는 분명 체념의 상태에 놓여 있으나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노인의 지혜는 달관과 체념을 모두 아우른 걸까. 지혜와 우울의 상관관계는 어떤 걸까. 결국 시간만이 답해줄 수 있는 것인가. 많은 것을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 마음이 편안해진 상태. 우울한 지혜인가 지혜로운 우울인가. 나는 또 생각한다. 힘이 빠지는 것과 힘을 빼는 것의 차이에 대하여. 아버지는 힘이 빠진 걸까 아니면 힘을 뺀 걸까. 내려놓는 것과 놓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현재 나는 어느 쪽인가에 대하여.
#우울의 공동체
나의 정서가 우울이든, 우울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밝혀지지 않은 감정이든, 그 느낌을 살펴 말(혹은 글)로 옮기는 순간 나와 비슷한 결의 감정으로 뒤척이는(혹은 시달리는) 타인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만남은 내게 양가감정을 선사한다. 다행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한편으론 이렇게도 느낀다. 실망이다, 나의 욕망(감정)은 너무 흔한 것이구나. 단 하나인 줄 알았으나 그저 하나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감정은 다시 우울(이라 할 만한 것으)로 환원된다. 그렇게 환원된 감정마저 공유할 수 있는 타인이 있다면? 어쩌면 다시 ‘다행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안도와 실망을 오가는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 나 또한 ‘있는' 것이니까.
다행이라는 말. 자신만 우울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심정. 이때 ‘다행이다’는 어쩌면 당신과 내가 우울감을 통해 감정 공동체의 일원이 됐다는 인사일지도. 만약 우울로 맺어진 사람들이 이룬 감정 공동체가 있다면 그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가 항상 안정되리라곤 확답할 수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서로의 불안을 귀담아들을 기회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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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은 때로 우정의 가교가 된다.
-같은 책, ‘다행이다’, 44쪽
잘 표현된 우울을 읽는 것도 좋겠지만, 잘 표현되지 못한 (나와 타인의) 감정들도 잘 읽어내고 싶다. 감정을 되돌아보는 감정 경험을 섬세하게 글로 옮길 수 있다면, 타인이 지어 올린 말과 사유의 탑에 기대지 않고 느리게나마 나의 몸으로 밀고 나간 지점에서 다르게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202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