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의 <악의 꽃> &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에 부쳐
"우리는 보았네,
별과 물결을, 우리는 보았네, 모래밭도,
숱한 충격과 뜻하지 않은 재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권태로웠네, 여기서처럼.
"Nous avons vu des astres
Et des flots ; nous avons vu des sables aussi ;
Et, malgré bien des chocs et d'imprévus désastres,
Nous nous sommes souvent ennuyés, comme ici.
-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황현산 옮김, 민음사, 2016), '여행' 중 87쪽
# 다시 읽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 권태라는 괴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다시 읽는다. 어릴 적엔 '알바트로스(L'albatros)'나 '상승(Élévation)' 혹은 '만물조응(Correspondances)' 같은 시들만 여러 번 들여다보았다. 이 시집의 첫 시 '독자에게(Au Lecteur)'에서 이미 고지하고 있는 것, 즉 시인이 '가장 까다로운 괴물(ce monstre délicat)'로 부르는 것, 이 시집의 마지막 시 '여행(Le Voyage)'에서 다시 강조되는 '그것'을 제대로 꿰어 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악의 꽃>의 서시 격인 '독자에게'에서 보들레르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바로 권태!(C'est L'Ennui!)"
첫 시의 선언에 이어 마지막 시 '여행'에서 시인은 다시 말한다. 지구 곳곳을 여행한 자들의 입을 빌어. 어디를 가든, 무엇을 보았든, 그 많은 재난과 충격 속에서도 '권태로웠다'고. '여기'와 다를 바 없이.
"우리는 자주 권태로웠네, 여기서처럼. (Nous nous sommes souvent ennuyés, comme ici.)"
문득 짐 자무쉬 감독의 1984년작 <천국보다 낯선>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독특한 질감의 느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기억. 아마도 흑백 화면, 잦은 암전(영화 용어상 블랙보드라 해야 하나 블랙아웃이라 해야 하나),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로드 무비 형식을 빌어 드러내고 싶었던 주변부의 삶과 권태, 이런 것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스토리라인이나 장면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뿌연 밤안개를 헤치고 어디론가 달리는 세 남녀의 자동차 장면, 극 중 한 남자의 체크무늬 스웨터, 두 남자의 머리 위에 늘 얹혀 있던 페도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 있든 황량하고 스산했던 풍경.
# 다시 보는 <천국보다 낯선 Stranger than Paradise> - 천국은 없다
이 영화를 본 곳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대학 캠퍼스 내 시네마떼끄(혹은 이런 류의 이름으로 불리던 공간)이거나 대학로에 있던 예술극장 동숭 시네마테크이거나. 20년도 더 된 시간.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새롭게 파고 들어온 것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청각적인 것. Screamin' Jay Hawkins가 부르는 I Put a Spell On You가 영화 초반부터 강렬하게 흐른다. 말 그대로 괴성을 지르는 듯한 제이 호킨스의 목소리는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단조롭고 지루한 삶의 장면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뉴욕으로 막 건너온 에바, 자신이 헝가리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촌 윌리, 윌리와 어울려 도박과 경마로 시간을 보내는 미국인 에디. 아메리칸 드림의 초라한 표상처럼 보이는 윌리의 삶은 비루하고 지리멸렬하다. 클리블랜드로 떠나는 에바에게 "그곳은 참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하는 에디는 정작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가보지 않은 먼 곳에 대한 막연한 환상. 이곳은 지루하고 별 볼 일 없다는 생각. 이곳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마음.
도박으로 돈을 딴 윌리와 에디는 차를 빌려 무작정 클리블랜드로 떠난다. 에바는 핫도그 가게에서 일하며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클리블랜드는 한겨울. 멋지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엄청나게 추울 뿐. 황량한 겨울 풍경만이 그들 앞에 펼쳐진다. 또 다른 권태. 윌리와 에디는 묻고 답한다.
"우리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모르겠는데."
그들은 뉴욕에서도 똑같은 대화를 나눈 적 있다. 우리가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모르겠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아스트라공이 나누는 대사의 변용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권태, 지루함, 무의미, 목적 없음 등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대사들. 윌리와 에디는 즉흥적으로 플로리다를 향해 떠나기로 한다. 이번엔 에바까지 동행한다. 마이애미는 멋질 것이다. 해변, 미녀들, 비키니, 따뜻한 날씨. 정체된 분위기가 잠시 활기를 띤다. 출발하는 순간은 들뜨고 즐겁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여정은 다시 길고 지루하게 이어진다. 그들이 상상하는 플로리다는 없다. 에바는 홀로 모텔에 남겨지고, 윌리와 에디는 개 경주에서 가진 돈을 모두 잃는다. 일련의 일들이 어긋나면서 그들은 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 해변을 산책하다 뜻하지 않게 큰돈을 쥐게 된 에바가 혼자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편을 알아보는 장면이다. 그곳이 어디든 유럽으로 출발하는 가장 빠른 비행기편을 찾는 에바. 그녀가 꿈꾸는 목적지는 이번엔 파리나 로마 혹은 스페인의 어느 도시였을지 모른다. 누구나(타인이) 꿈꾸는 도시니까.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당장 출발하는 비행기는 부다페스트행밖에 없다는 (웃지 못할) 사실. 부다페스트를 떠나 (신세계) 미국 뉴욕으로 날아와 빈민가의 풍경을 목격하고, 클리블랜드에서 지루한 일상을 보내다가, 윌리-에디에 의해 어쩌다 플로리다까지 오게 된 그녀. 그런 그녀에게 가장 빠르게 실현시킬 수 있는 옵션이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가는 비행기편이라니. 나는 감독이 깔아놓은 이 미묘한 아이러니에 무릎을 치며 웃는다. 기대했던 미래의 풍경은 없고, 다를 바 없는 현실의 권태는 어디에나 편재한다. 벗어나려 애쓴 꼴이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원점으로 되돌아오고 마는 패턴. 20년 만에 다시 본 영화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삶의 한 측면, 그 아이러니를 새삼 읽는다.
끊임없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지만 어느 곳도 내가 꿈꾸던 곳은 아니라는 것. 어디든 여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 이런 전언들이 머리를 맴돈다. 그러자 나의 생각은 좀 더 먼 과거로 돌아간다.
# 다시 더듬어보는 생애 첫 희곡 -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고등학교 1학년 문예부 시절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써본 희곡의 제목은 '무(無)'였다. 한창 겉멋에 들려 있었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가져온) 무너진 집안 풍경과 금이 간 자존심으로 내상을 많이 입었던 때였다. 사춘기라서 한참 예민한 시기였던가? 잘 모르겠다. 나는 다만 내 넘쳐나는 자의식을 주체하지 못해 자만심과 열등감 사이를 불안히 오가는 상태였던 것 같다. 친구들이 읽지 않는 책을 읽고, 친구들이 듣지 않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희들과 달라'라는 모종의 우월감에 빠져 있었달까. 그 우월감(이라고 착각한 감정)은 나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보상받으려는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였으리라.
그래서였을까. 희곡의 내용은 지금 읽어보면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유치하고 치기로 가득할 것이다. 어쨌든 핵심은 이랬다. 네가 어디로 떠나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디든 인간 삶의 조건은 다르지 않다. 나는 고뇌하는 주인공 역할에 시인을 세웠고, 이와 대비되는 몇몇 캐릭터를 비평가, 상인, 의사, 목사로 내세웠다. 전형적으로 학습된 진부한 비유였다. 상인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물신주의자, 의사는 과학 만능주의자, 목사는 맹목적 우상숭배자, 비평가는 냉철한 염세주의자로 그리려 했(던 것 같)다. 시인은? 늘 이곳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 의미와 진실을 추구하는 자를 대변하는 이름이었다.
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각자 꿈꾸는 다른 곳으로. 비행기 안에서 이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 자체도 (이제와 보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각자의 캐릭터를 대변하는 대사들을 늘어놓으며 난상 토론을 펼치고, 시인은 이들 각자에 환멸과 절망을 느낀다. 결국 어디에 가든 달라질 것은 없다(이상향 혹은 구원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시인은 비행기에서 떨어져 자살한다(황당의 극치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망의 극단적 표현은 아니었으며, 시인이 ‘기꺼이’ 취한 선택이었음을 나는 강조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라는 생의 의지를 미처 알지 못하던 때였으니.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도 알지 못했고, 니체라는 이름만 주워들었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때였으니까. 내 인식의 지평 안에서 가닿을 수 있는 선택의 최대치를 표현하려다 보니 그리 되었겠지. 용서하자. 손쉽게 시인을 죽음으로 처리했던 나의 미숙하고도 극단적인 선택을.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영향을 받았던 걸까.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어설프게 차용한 결과일 텐데, 어쩌면 나는 '권태'의 감각을 '절망'으로 오독했는지도 모른다.
# 다시 생각해보는 죽음 - 새로운 시작의 방식
다시 보들레르의 시로 돌아와서. 내 참담한 희곡 속의 시인은 보들레르 식의 권태와 우울을 앓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절망하는 사람? 당시 내가 시인이라는 캐릭터에 어떤 감정을 투사했는지 확실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되었든 '이곳'에 만족하지 못하고 '저곳'을 찾아 떠나는 자를 그리고 싶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당시의 내가 그러했을 것이다. 모호하지만 왠지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그곳'에 대한 감각. 청소년기의 치기 어린 감수성일지도, 혹은 이른 나이에 찾아온 권태감일 수도.
보들레르는 자신의 시 '여행'에서 세상 곳곳을 여행하며 온갖 권태를 경험하고 깨달은 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처럼 어디에서도 권태로웠지만, 그렇기에 이제 두려움 없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옥이건 천국이건 상관없이 미지의 심연에 잠겨 새로운 것을 찾고 싶다고. <악의 꽃>의 마지막 시인 '여행'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난다.
VIII
오 죽음아, 늙은 선장아, 때가 되었다! 닻을 올리자!
우리는 이 나라가 지겹다, 오 죽음아! 출항을 서둘러라!
(...)
지옥이건 천국이건 무슨 상관이냐? 저 심연의 밑바닥에,
저 미지의 밑바닥에 우리는 잠기고 싶다, 새로운 것을 찾아서!
Ô Mort, vieux capitaine, il est temps! levons l'ancre!
Ce pays nous ennuie, ô Mort! Appareillons!
(...)
Plonger au fond du gouffre, Enfer ou Ciel, qu'importe?
Au fond de l'Inconnu pour trouver du nouveau!
시집을 옮긴 황현산 선생의 글 중 마지막 시 '여행'에 관한 언급에서 잠시 멈춘다. 내가 열일곱 살 때 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희곡과 묘하게 맞닿아 있는 지점을 발견한다. (사후 해석에 기댄 억지이겠지만.)
이 시가 쓰인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서구의 '문명인들'은 이미 지리상의 발견을 끝냈으며, 지구 위에는 어디에도 '권태'와 '압제'와 '죄악'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경이로운 삶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행자들이 천신만고의 여행에서 얻은 것은 '쓰디쓴 지식'일 뿐이다. (...)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며, 보들레르가 늘 주장하는 '원죄에서 벗어나는 일'에 도움을 줄 수도 없다. 오직 하나 남아 있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의 밑바닥에서 미지의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말은 죽음을 걸고 이 삶에서 다른 삶을 상상하여 삶을 본질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것이 이 시의 결론이며 <악의 꽃>의 마지막 말이다.
- 같은 책, 황현산, '작품에 대하여-현대시의 출발', 117쪽
나는 비록 시인을 물리적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지만, 그 죽음이 그저 현실에서 육신을 지워내는 단순한 무화(無化)가 아니었음을 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얼마나 권태롭든 나는 나의 죽음을 걸고 새로운 삶을 상상하며 나아가는 과정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 오늘은 오늘의 나를 죽이고, 내일은 내일의 나를 죽이며, 조금씩 새로워지는 방식을 체득하는 것.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지향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 아닐까.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천국보다 낯선>.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천국은 없다. 천국보다 낯선 곳이 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것도 같다. 니체가 말했듯.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2020-9-2)
덧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 메리 올리버, '기러기' 중에서
소설가 김연수는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에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라는 구절을 따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렇게 변용하고 싶어졌다.
네가 어디에 있든, 얼마나 권태롭든,
너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