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큼 살기, 나만큼 쓰기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에 부쳐


오늘로써 석 달. 지난 8년간 써온 잡다한 글들을 납득할 만한 맥락에서 일관된 관점으로 꿰어보려는 시도로 브런치를 시작했다. 지난 글을 들추어본다는 것은 낯뜨거운 일이기도 하고, 내가 아닌 내가 쓴 글을 읽는 것처럼 묘한 기분을 느끼게도 한다. 나 좋자고 시작한 일이 또 다른 관성으로 이어진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3개월 만에 다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나를 세운다. 오랜 피로가 밀려온다. 이제는 과거의 구슬을 꿰는 데 집착할 게 아니라, 현재의 텍스트에 집중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


그러던 차에 ‘마음산책’에서 펴낸 <스무 해의 폴짝>이라는 신간을 접한다. 출판사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정은숙 대표가 직접 스무 명의 문인들을 인터뷰한 책. 좋아하고 반갑고 관심 있는 이름들이 눈에 띈다. 신형철, 김숨, 백수린, 김금희, 하성란, 김연수, 이승우, 이기호, 김중혁, 권혁웅, 김소연 등등. 지금 (여전히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내게 필요한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쓰는 것에 리듬을 잃어버린 (무명의) 쓰는 자가, 여전히 써오고 있는 (문명을 떨친) 쓰는 자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종의 힌트 같은 것을 기대한 걸까.




# 에세이와 비평 사이


“텍스트가 선택되는 방식은 글 쓰는 사람의 정체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에세이스트, 비평가, 학자는 조금씩 다르거든요. (…) 에세이스트에게 텍스트는 결국 자기 자신이죠. 다른 텍스트를 선택할 때에도 ‘나’라는 텍스트의 변주로서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 비평가는 텍스트를 기다리는 사람이죠. 걸작이 오기를요. 가만히 있으면 오지 않죠. 찾아 나서야 합니다.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비평가에게는 작품이 먼저예요. 걸작이 나로 하여금 뭔가를 쓰게 하니까요. 내가 뭘 쓰게 될지는 작품이 결정하죠. 반면 학자는 주제가 먼저죠. 그에 맞는 텍스트를 수집하는 것이고요. 미학적 가치 이전에 자료적 가치가 우선이라고 할까요.”


- 정은숙, <스무 해의 폴짝>, 마음산책, 2020, 문학평론가 ‘신형철’ 인터뷰, 27쪽


새로운 작품들에 대한 ‘비평가적 호기심’과 ‘에세이스트적인 표현 욕구’를 동시에 갖고 싶다는 욕심. 비평적 에세이랄까. 에세이 스타일의 비평이랄까.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전반적인 글의 톤은 확연히 달라진다. 비평적 글쓰기와 에세이적 글쓰기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내게 신형철의 말은 여느 때보다 또렷한 기준이 되어준다. 나는 ‘나’라는 텍스트를 먼저 세우고 싶어하는가, 텍스트를 텍스트로서만 먼저 세워두고 싶어하는가.


# 가망 없는 것에 가망을 거는 사람들


무엇을 쓸 것인가. 어쩌면 나는 지난 8년간 이 물음에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을 찾아주고자 계속 뭔가를 써왔는지도 모른다. 써왔다기보다 애써왔다고 해야 할까. 종잡을 수 없는 파편들이 메모장과 블로그에 쌓여갔다. 벤야민의 파편적이고 사변적인 글쓰기 스타일에서 나의 계통 없고 산만한 글의 정당성을 찾으려고도 했고, 벤야민을 지지하는 수전 손택에게서는 그녀의 산만한 호기심과 느리고 고통스럽게 이어가는 글쓰기 습성을 읽어내곤 내심 반가워하기도 했다. (예컨대, 메이슨 커리의 <예술하는 습관>을 읽어보면 수전 손택은 내가 좋아하는 책 <사진에 관하여>에 수록된 에세이 여섯 편을 완성하는 데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일을 접고 해외로 이주하기 직전 인사차 지인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들은 나의 '쓰는 삶'을 기원해주었다. 누군가는 소설을 써보라고 했고, 누군가는 에세이집을 묶어보라고 했다. 그 무렵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 소수의 지인들은 계속 시를 써보라고도 했다. 일로 만난 몇몇은 그간의 내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홍보와 마케팅에 관한 글들을 쓰는 게 좋겠다고도 했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었나. 일을 멈추면 당장이라도 뭔가를 술술 써낼 수 있을 것처럼 굴었던 나는, 쓰고 싶다는 욕망과 무엇을 쓰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난감한 감정이 뒤섞인 상태로 몇 년을 보냈다. 무엇이든 쓰려했지만 무엇도 쓸 수 없는 아이러니. 무엇도 쓸 수 있었지만 무엇에도 회의가 일었다. 감정에 떠밀려 시를 쓰고, 책을 핑계 삼아 내 이야기를 꺼내놓고, 서평을 빌미 삼아 제멋대로 사유를 이어가는가 하면, 파고들고 싶은 텍스트를 발견할 땐 마치 평론가라도 되는 양 그럴듯한 관점으로 꿰어 분석하고 싶어했다. 마음을 다친 아이에게 읽히겠다고 아이의 경험을 재구성하여 동화를 쓰기도 했고, 가족사를 모티프로 단편소설도 시도해보았다. 배설하듯 단상을 뱉어내기도 했고, 낙서처럼 끄적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여전히 모르는 채로, 그냥 썼다. 박완서 선생의 딸이자 수필가인 호원숙 선생이 말한 것처럼 “쓰면서 쓰게 되었다.”


“항상 머릿속으로는 글을 굴리고 있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글을 직접 쓴다는 뜻보다 글을 늘 생각한다는 것이죠. (...) 글을 그냥 썼어요. 그냥 썼는데, 쓰면서 쓰게 됐죠.”


-같은 책, 수필가 ‘호원숙’ 편, 416쪽 & 420쪽


하릴없는 반복과 (간간이 감지할 수 있는) 차이의 과정에서 그나마 변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을'에서 '어떻게'로 바뀌었다는 것. 무엇이든 쓴다는 것. 특정 결과물을 의도하지 않고, 알량한 이득을 목적하지 않고. 그렇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되어가는 대로, 내게 흘러오는 대로, 성실하고 정확하게 받아 적는다는 마음으로 돌아서기로 했다. 에세이도, 서평도, 리뷰도, 비평도, 시도, 소설도 아닌 글들이 잡문으로 쌓여갔다. 가망 없는 일이었다.


몇 년 전, 평론가 김형중의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를 살뜰히 아껴 읽었다. 특히 ‘오래되고 가망 없는 것들’이라는 제목 아래 쓰인 글은 (오래되고 가망 없는 것들에 막연한 연민을 품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제대로 스며들기 마련.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


“가망 없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소문은 ‘그들 사이로만’ 삽시간에 번져가서, 그들은 만나보지 않고서도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고, 서로를 실제보다 훨씬 친근하게 여기면서 신뢰하게 된다.”

- 김형중,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난다, 2016, ‘오래되고 가망 없는 것들’ 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들어 몇 번을 다시 읽었다. “가망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남다르다”는 그의 표현은 정확하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상한 취향의 연대 같은 걸로 묶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망 없이 잡문을 써오면서도 그만두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 '가망 없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소수의, 유사한 결을 가진 사람들과 이상한 연대 같은 것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인지도.


내가 바라는 것은 인상적인 구독자 수도, 무수한 좋아요 버튼 숫자도 아닌, 그 소수의 (가망 없는 일에 가망을 거는) 사람들과 희미한 신호를 주고받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망 없는 일임을 알지만 그 가망 없음 속에서도 여전히 즐거움(이랄까 대책 없는 희망이랄까)을 찾는 마이너리티 집단. 작가 임경선이 말했듯 "비슷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일종의 느슨한 가치 공동체 같은 것"(<스무 해의 폴짝> 443쪽)이라고 해야 하나. 일면식 한번 없지만 어쩐지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 쓰기, 읽기, 선택, 드러냄, 감춤, 공부


“어느 순간에는 내가 쓰는 일을 멈추고 읽기만 하는 시간이 오기를 바라게 돼요. 아마 모든 작가들이 하는 생각이겠죠.”


-같은 책, 소설가 ‘김금희’ 편, 147쪽


나는 작가가 아니므로, 읽는 일을 멈추고 쓰기만 하는 시간을 동경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읽기에 기대어 쓰는 것을 지양하고, 쓰기에 기대어 읽는 것을 지향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나는 쓰는 것을 멈추고 읽기만을 선택할 수도 있다.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주인공 바틀비의 반복되는 말처럼 “나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라는 태도를 빌어.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 속 주인공 바틀비를 자신의 철학적 사유로 끌어들인 조르주 아감벤에 의하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으니까.


“바틀비의 말은 단순히 할 수 있는 일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거나(현실태) 하지 않거나(잠재태)를 넘어서 '하지 않음을 한다(비-잠재태)는 것이다."

- 김재희,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에 관한 강의록 중에서


“제가 쓰고자 하는 것은 (…) 살아가면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현재 삶은 언젠가 우리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죠. 미래의 삶은 지금 뭘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요.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생에서는 그 선택하지 않음이 하나의 선택이에요.”


- <스무 해의 폴짝>, 소설가 ‘김연수’ 편, 256쪽


선택하지 않음이 하나의 선택,이라는 말에서 나는 아감벤의 '하지 않음을 한다(비-잠재태)’라는 말을 겹쳐 읽고 싶은 걸까. 쓰지 않음을 선택한다,라는 교묘한 근거를 획득하기 위해? 그러나 쓰지 않고서는 나를 드러내거나 감추는 적절한 수단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불안은 여전히 남는다. 기나긴 시간 속에서 그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나를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면서 동시에 드러내지 않도록 숨는 일이기도 했어요. 언어로 성을 쌓고 그 안에 숨지만, 동시에 그 성으로 내가 여기 있다고 표현하는 거니까. 감추면서 드러내고, 드러내면서 감춘다는 식의 표현을 <생의 이면>이라는 소설에서 썼던 게 생각나네요.”


-같은 책, 소설가 ‘이승우’ 편, 305쪽


이승우는 드러냄과 감춤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소설의 외양을 한 에세이’에 대한 욕심을 말한다. 비평과 에세이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오던 내게, 에세이와 소설 사이의 공간으로까지 생각을 확장시킨다. 산문시를 써보며 시와 산문의 거리에 대해 생각했던 시간들을 상기한다. 무엇과 무엇 사이는 또 다른 무엇과 무엇 사이를 불러오는구나. 그 많은 사이의 공간들을 알고 싶어서 지난 몇 년간 나는 여러 ‘무엇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공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돌아온 곳은 ‘쓰는 나’로서의 자의식과 그 의식의 토대가 되어주는 ‘나의 몸’이었다. 상부구조(정신 활동)의 토대는 하부구조(육체라는 물질)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하는 시간으로 점철된 지난 몇 년. 쓰기(상부구조)의 토대는 나의 몸(하부구조)이라는 새삼스런 자각.


“공부란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늘 돌아오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지요. 공부란 인간이라는 고향으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같은 책, 시인 ‘김용택’ 편, 494쪽


무엇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러다 무엇도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의 저자 권용선은 벤야민을 “그 무엇도 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또한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으나 다만 자신을 하나의 이미지 속에 가두고 싶지 않은 의지를 지니고 있었던” 사람으로 표현했다.


“학자도 종교인도 번역가도 철학자도 시인도 그 무엇도 아니었지만, 그 모두이기도 했고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던 벤야민은 독특한 방식으로 공부했고, 그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주장으로 변형하는 데 탁월함을 보인 이론가였다. 때때로 그는 기존에 지니고 있던 자기 자신의 사유와 문장들까지 새로운 글에 인용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 권용선,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어느 지식인의 공부’ 17쪽


“누구나 다 무엇이 되려고 하는 거지요. 공부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니고, 무엇을 ‘하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스무 해의 폴짝>, ‘김용택’ 편, 517쪽)


나는 작가가(시인이/소설가가/비평가가/에세이스트가) 되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쓰기’를 위해 읽고 공부한다는 것을 다시금 환기한다.


“나만큼, 내 삶의 길이만큼 살려고 노력해요.” (같은 책, 520쪽)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시인 김용택의 말이다. 마지막으로 밑줄 그은 문장. 나는 여백에 이렇게 적는다. ‘나만큼 살기.’ 나(의 그릇 혹은 길이 혹은 넓이)만큼 사는 것이다. 나만큼 사는 것. 마찬가지로 나(의 인식 혹은 경험 혹은 상상의 지평)만큼 쓰는 것 아닐까. 철학적 글쓰기이든, 비평적 글쓰기이든, 에세이적 글쓰기이든, 혹은 그 어떤 글쓰기이든, 나는 꼭 나만큼만 쓰는 것일 테니. 나만큼 쓰는 것.


어쩌다 보니 지난 여덟 해의 잡문 쓰기와 지난 석 달간의 브런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글쓰기 플랫폼을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여덟 해의 폴짝’도 좋지만, 허공(이상)보다는 내가 딛고 선 작은 땅(현실) 한 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미에서 ‘석 달의 착지’ 과정도 중요해 보인다. 나만큼 살고, 나만큼 읽고, 나만큼 쓰기.


새로운 책, 새로운 영화, 새로운 텍스트. 일상을 새롭게 읽고 발명해나가는 것. ‘새로운’이라는 주어진 형용사보다, ‘새롭게’라는 약동하는 부사에 방점을 찍는 것. 일상의 반복과 차이 속에서, 시차가 만들어내는 낙차를 바라보고 포착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롤랑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즐거움(plaisir)'이 아닌 '즐김(jouissance)’의 삶을 위해.


(202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