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의 <내면 보고서>에 부쳐
여섯 살. 어느 토요일 아침 이제 막 옷을 다 입고 신발 끈을 매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다 마치고, 이른 아침 봄날 햇빛 속에서 서 있는데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평안과 기쁨을 억누를 수 없는, 황홀한 느낌이었다. (...) 당신은 그 순간을 3초 전만큼이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아침으로부터 5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당신 안에서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또렷하게, 당신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 중 그 어느 것보다도 밝게 타오르고 있다.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일으킨 것이 무엇일까? 알 수는 없지만 추측건대 자의식의 탄생과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내면의 목소리가 깨어날 때 여섯 살 무렵의 어린아이에게 일어나는 일, 생각을 하고, 스스로에게 생각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능력.
우리의 삶은 그 시점으로부터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될 내러티브를 시작하는 능력을 얻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까지는 당신은 그저 존재했을 뿐이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일단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게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말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 폴 오스터, <내면 보고서>, 열린책들, 2016, ‘작가와 작품’ 중에서
"1953년. 아직 여섯 살, 그 초월적인 깨달음"에 대한 폴 오스터의 내면 서사를 읽고 있자니, 자석에 끌리듯 일곱 살 기억이 되살아난다.
최초의 만족감, 그러니까 내가 만족한다,는 사실을 음미한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서울 마포구의 어느 오랜 한옥, 기역자 구조, 부엌 옆의 안방, 안방에 딸려 있는 작은 방, 대청 마루, 건넛방, 건넛방에 딸려 있던 작은 툇마루.
일곱 살 무렵, 그러니까 유치원 들어가기 직전 아파트로 이사했으니 분명 그보다 어린 나이였을 테고, 아파트로 이사하기 직전까지 외할머니 댁에서 자랐으니, 그보다도 이전일 것이다. 대여섯 살 무렵이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대청마루 한가운데 누워 있다. 넘어졌는지 부딪쳤는지 맨다리가 드러나 있고 옆에서 엄마가 약을 발라주고 있다. 후덥지근하면서도 시원했으니 지금 같은 여름이었을 테고, 비 내리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랫도리를 드러내놓고 쭉 뻗어 누워 있는 나. 상처는 욱신거렸을지 모르지만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행복하다,는 단어를 몰랐을 테니 그저 ‘아 좋다’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마룻바닥의 서늘한 감촉, 작고 아늑하게 둘러진 정방형의 대청마루, 아득한 빗소리,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눅눅한 공기, 보송한 피부, 엄마의 손길.
기억하지 못하는 무수한 일차원적 만족감(포만, 배설, 수면 등)을 제치고 유독 이때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구체적 정황이 주는 특별한 기분을 최초로 인식했던 게 틀림없다. 당시엔 그저 (언어라는 옷을 입지 않은) ‘발가벗은 감지’ 정도였겠지만 말이다.
상처를 입었다면 나는 아파했을 것이다. 와앙 혹은 찔끔 눈물을 쏟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좋다’라며 흡족해한 것이고, ‘만족해하는 나’를 인식한 것이다. 자의식의 파릇한 싹 정도였을까.
넘어져 상처를 입었지만, 기분 좋게 나를 감싸 안아주는 공간이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보호해주는 혹은 걱정해주는) 사람이 옆에서 나를 보살피고 있고, 내 몸의 감각 즉 시각과 청각과 촉감이 어우러져 '내가 감각하고 있다'는 순간을 일깨워주는 때.
굳이 지금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이와 같지 않을까. 빗소리 들리고 공기와 맨살의 감촉이 살아나니 제법 살 만한 세상 아닌가, 하는 자의식 말이다.
이러한 '감각적 만족감'을 최초로 인지한 것이 대여섯 살 적 일이라면, '지적 만족감' 즉 '나는 안다'는 것에 대한 자족(自足)을 최초로 인식한 것은 일곱 살 때의 일(일 것)이다.
작은 아파트의 계단식 복도. 그러니까 일곱 살 이후의 장면이다. 우리 집이 몇 층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지) 혼자 아파트 현관을 지나 1층의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참이다.
불현듯 나는 '깨닫는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인가를 번뜩 깨달았고, 그 깨달았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에 기묘한 흥분을 느낀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앎'의 찰나를 (어린 마음에도) 놓치면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나는 본능적으로 중얼거린다.
'잊어버리면 안 돼, 절대로'.
첫 번째 계단에 멈칫하니 놓아둔 발을 떼어 계단을 하나 하나 밟아 올라가면서 나는 말할 수 없는 '벅참'을 맛본다. 마치 세상의 비밀을 알아챈 것처럼, 우주의 신비, 신의 섭리를 깨달은 것처럼.
잊지 않기 위해서 그 후로도 여러 번 나는 반복했을 것이다. 독송(讀誦)처럼. 그리고 (아쉽게도) 삶의 여러 주문에 휘말려 곧 잊었을 것이고.
꽤 커서까지 나는 그때의 '무엇'이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는 날이 적지 않았다. 알맹이는 사라졌는데, 그 알맹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의 광휘, 그 신비한 분위기는 여전히 또렷하다.
폴 오스터의 표현대로 나의 삶이 새로운 차원에 들어선 것인지도, 내가 나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될 내러티브를 시작하는 능력을 얻게 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폴 오스터의 나이 여섯 살, 내 나이 일곱 살(한국 나이로 일곱 살이니 만으로 여섯 살인 셈) 때에 일어난 일이다.
어제 오후, 나는 마음을 닦달질하다 잠시 탈진하여 몸을 누였다. 맥을 못 추고 눈을 감았다가 얕은 잠에 빠진 모양이다. 30분가량 지났을까. 어디선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로 시끄러운 소리가 파고든다. 또르륵, 투두둑, 꾸르륵, 타다닥. 소리의 촉감으로 보아 분명 물소리인데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도통 감을 잠을 수 없다.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현실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직감적으로 차안(此岸)의 소리임을 간파한 나는 얕은 반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소리의 근원지를 더듬어본다. 건넛방에 이르러서야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치고, 구르고, 흐르며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흔하게 듣던 빗소리가 아니다. 일정한 리듬이 느껴지면서도 변칙적인 엇박자가 치고 들어온다. 자연이 들려주는 재즈. 빗방울 소리를 퍼커션 연주 삼아 가만히 귀 기울인다. 서늘하고도 보송한 시트 감촉에서 스치듯 아가의 배내옷 냄새가 난다. 조금 뒤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진다.
닦달질에 해진 마음을 조금 여며본다. 해진 것은 해진 대로 놔둘 수밖에 없다. 빳빳하게 풀을 먹여 그럴듯하게 각을 잡고 싶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 베갯잇이 해져 아기 손톱만 한 조그만 구멍이 보일락 말락 드러나 있다. 4년 전 한국을 떠날 때 구입한 것인데, 딱 그만큼의 시간을 함께 견뎌냈다는 의미겠지.
해진 마음을 해진 베갯잇에 누이면서도 그닥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는, 아, 좋다, 하고 느낀다.
변박의 빗소리에 이어 조금씩 개어 가는 하늘이 있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만큼은 흡족하다 느낀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는 소위 '셀프 내러티브'에 대한 의지가 다시금 미세하게 작동하는 것을 감지한다.
결국 행복이란 각자가 느끼는 ‘만족하는 마음’ 즉 자족(自足) 아니던가. 자족하는 한, 아니 자족하는 순간을 섬세하게 키워나가는 한, 삶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폴 오스터의 말대로 “자기 자신에게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말해 줄 수 있는” 삶이라면 말이다.
(20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