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머묾-어울림: 흑백 사진에 관하여

전몽각의 가족 사진집 <윤미네 집>에 부쳐

흑백 사진을 더 좋아한다. 이유를 제대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사진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사진의 미학을 논할 정도의 깊이 있는 지식도 없다. 사회 초년병 시절, 사보 기자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사진을 배웠고, 함께 일하는 포토그래퍼들과 작업하며 어깨 너머로 익힌 것이 전부다. 어쩌다 출사를 나갈 때는 꼭 흑백 사진을 찍었고, 흑백의 명암이 마법처럼 드러나는 인화 과정이 좋아 암실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쓰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흑백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에 관하여.


# 단순함 - 멈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흑과 백의 간결한 컨트라스트가 사진을 깊어 보이게 한다. 산만해지기 쉬운 시선을 한데 모아주는 집중의 힘이 있다. 멈추게 한다.


# 품위 있음 - 머묾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품위 있다'는 것이다. 품위(品位). 사람의 성품이나 사물의 성질을 이른다. 흑백 사진을 통해 오브제들의 ‘품위’가 투명하게 배어 나오는 것 같다. 앞서 말한 '단순함'에 기초하는지도 모르겠다. 대상을 더 물끄러미 바라보게 만든다. 표면이 아닌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색이 제거된 대상을 바라보는 일. 총천연색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같을 수 없다. 머물게 한다.


프리즘을 통과한 가시광선의 영역이 감각의 세계라면, 흰색 즉 분해되기 이전의 빛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보다 근원적 세계로 연결되는 듯하다. 사물 본연의 존재감이 도드라지게 부각되는 느낌. 내재(內在)의 철학에까지 이르는 것은 다소 비약일까.


# 여백의 미 - 어울림

이어지는 생각은 '여백의 미'이다. 역시 앞의 두 이유와 연결된다. 단순한 평면이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집중과 여백의 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양화와도 닮았다. 배경을 빼곡히 채우지 않고도, 여러 번의 붓질로 덧칠하지 않고도, 놀라운 전달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군더더기가 덜하다. 보는 사람을 프레임 안으로 초대한다. 밖에서 보는 시선과 안에서 보는 시선이 같을 수 없다. 어울리게 한다.


꽉 찬 그림도 좋아한다. 19세기 이전의 서양화가 주는 선과 색의 향연은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다. 보는 이를 압도하고 얼을 빼내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미 꽉 찬 그림 속으로 내가 들어설 공간은 없다. 나는 그저 그림 밖에서 서성이며 어색한 대화를 시도할 뿐이다.


그래서 비어 있는 그림을 더 좋아한다. 비우고 또 비워 기어코 나를 그림 안으로 들이고야 마는 그런 그림. 얼마 안 되는 검고 거친 선으로만 이루어진 판화, 빽빽하게 들어선 배경이 사라지고 빈 공간이 원경도 되고 근경도 되는 동양 수묵화를 좋아한다. 최소한의 색만 사용한 수채화, 흑백 사진이 아니더라도 모노톤 위주에 한두 가지의 별색만으로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좋아한다. 비어 있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떠오른 생각 몇 자라도 슬며시 흘려 넣을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다.


막상 적어놓고 보니 광고 비주얼 공식과 흡사하다. 멈추게 하고(stop), 머물게 하며(stay), 전달하고(deliver), 참여하게 한다(engage)는 상업적 공식. 제품이나 모델 촬영이 끝난 후 수많은 A컷 혹은 B컷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추려진 몇 개의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팀원들이 교정지를 들고 오면 나는 늘 주문처럼 위와 같은 단어들을 주워섬기곤 했다. 상업미술이건 순수미술이건 인간의 마음에 가 닿는 메커니즘은 비슷할 것이다.


쓰다 보니(아니, 쓰면서 생각하다 보니) 알게 된다.


멈춤-머묾-어울림. 그래서 나는 흑백 사진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보고-들여다 보고-들어가기.

보고-생각하고-쓰기를 대입시켜도 무리가 없지 않은가.



# 전몽각의 가족 사진집 <윤미네 집>에 부쳐

이 책은 한국을 떠나기 전 지인 J로부터 선물 받은 사진집이다. 자본주의 소비 문화의 첨병인 패션 잡지 수장으로서 상업 사진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J였기에 의외이기도 했다. 일로 맺어진 인연이었지만, 대화에서 묻어나오는 J의 삶의 연륜과 배려를 좋아했다. 늘 패션 피플에게 둘러싸인 그녀가, 내게 가족과 함께하는 평온한 일상을 축복해주며 선물한 책이어서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떠나기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만난 그녀는 사무실에 이 책을 챙겨두었으나 꽤 무거워 가지고 나오지는 못했다고 했다. 따로 보내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떤 책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커다랗고 두툼한 책 두 권이 배달되었다. 바로 <윤미네 집>과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였다. 하나는 사진 기록물, 다른 하나는 글자 기록물. 둘 다 가족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윤미네 집>은 평범한 어느 가족의 소박한 역사이다. 토목공학자이자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고(故) 전몽각 선생이 26년 동안 찍어둔 가족 사진을 정리하여 묶은 책이다. 그 흔한 캡션조차 사진 밑에 달리지 않고 오로지 흑백 사진으로만 200쪽에 가까운 지면을 채웠다. 큰딸 이름을 붙여 윤미네 집이라고 불렸던 저자의 집이 이 사진집의 기본 배경이다.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게 보이는 사진들은 흡사 우리 가족의 오래 된 흑백 사진들과도 닮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엄마는 젖을 물리고, 소박한 부엌과 밥상이 기적처럼 아이들을 키워낸다.




큰 아이 윤미의 입학과 졸업, 결혼의 순간까지 담기고 나면, 특별 부록처럼 <마이 와이프My Wife>가 이어진다. 사랑하는 아내의 처녀 시절 사진부터 젊은 엄마의 모습, 주름진 중년 여인의 초상, 그리고 손자와 함께한 할머니의 모습까지 담겨 있다. 잔잔한 미소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늙어가는 아내의 사진들에 이르면 왠지 모를 뭉클함이 치밀어 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평범한 순간으로 포착하는 사진의 무심한 역사성이 진득한 감동을 전해준다.


나는 사진 하나에 멈추고, 머물며, 그 안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특별한 기교나 정교한 구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진 하나 하나만 놓고 보면 평범하고 또 평범하다. 위에서 내가 열거한 흑백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를 굳이 갖다 붙인다면 ‘단순하지만, 품위가 있고, 여백이 있어, 응시하게 된다’는 점이 그나마 특별한 점일 것이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허름한 부엌 풍경에 시선이 멈춘다. 오래 된 풍로, 뚜껑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양철 냄비, 낡고 보잘것없는 부엌 살림들에 나는 하나씩 시선을 맞춘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그 사물 하나 하나가 본연의 위엄을 드러낸다.

그리고 여백의 자리가 나를 초대한다. 빈 벽, 때가 탄 흰 타일, 부엌 문간에 우두커니 선 어린 아이들과 젊은 엄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제 막 저녁을 준비하려는 엄마에게 배 고프다고 아이들이 칭얼대는 장면일까. 나는 한없이 마음이 말랑말랑해져 마시멜로처럼 사진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

특별한 사진인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내게는 매우 특별하게 느껴진다. 아주 먼 옛날, 내가 저 사진 속 꼬마 아이였을 무렵 외할머니 집 부엌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풍로에서 풍기는 나른한 냄새, 어둑한 저녁이면 더욱 어두컴컴해지던 부엌 안의 풍경, 스테인리스 밥 그릇과 국 그릇들. 사진은 이야기를 불러온다.


# <윤미네 집>과 <보이후드> - 전기(傳記)의 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진들이지만 계속 넘기다 보면 ‘시간’의 은근한 힘이 밀려온다. 아이의 성장 기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배우가 성장하는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담은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놀라운 영화 <보이후드(Boyhood)>의 힘이 그러한 것처럼. 6세 꼬마 남자아이 메이슨이 18세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12년의 시간을 진득하게 밀고 나가며 담아낸 영화 <보이후드>는 ‘시간의 힘’으로 보상받은 듯하다. 그 이면에는 엄마라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다. 장성하여 집을 떠나는 메이슨 앞에서 엄마가 쏟아내는 울음은 무심한 ‘시간’의 속성을 터뜨리듯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적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중첩시키는 <보이후드>. 시간의 흐름에 주목하는 감독의 성향은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무심하게 조금씩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거대한 연속성 앞에서 속절없이 슬픔을 드러내는 한 여자의 삶까지, 어쩐지 <윤미네 집>은 영화 <보이후드>와 닮았다. 특별한 사건이나 메시지 없이도 이 사진집이 은근한 무게로 다가오는 것은 번역가(이자 작가인) 이윤기가 말했던 바로 그 ‘전기(傳記)의 힘’ 때문이리라.


내가 관심하는 것은 한 인간이나 사건이 외부와 공유하는 의미 체계가 아니라 한 인간이나 사건 자체의 주관적인 의미 체계이다. 따라서 전설이 아니라 진실이다. 내가 허구보다는 전기, 전기 중에서도 타전(他傳)보다는 자전(自傳)을 더 좋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이윤기,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182p


윤미네 아빠 고 전몽각 선생은 <윤미네 집> 서두에서 이렇게 밝힌다.


우리는 딸 하나 아들 둘을 키워오면서 어느 누구네 집이나 다를 것 없이 ‘윤미네 집’을 이루었다. 그저 낳은 이후로 안고 업고, 뒹굴었고 비비대었고 그것도 부족해서 간질이고 꼬집고 깨물어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시간이 가고 날이 가는 줄도 모르게 세월이 흘러갔다. 사진 찍기를 무척 좋아하던 나는 아마추어로서의 서툰 솜씨와 사진이란 표현매체로서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그런대로 그들의 분위기라도 ‘기록’하여 훗날 한 권의 사진집을 만들어 ‘윤미네 집’의 작은 전기(傳記)로 남기고 싶었다.

- <윤미네 집> 책 머리에서


이 책을 선물한 J가 떠오른다. 오랫동안 연락을 못하고 지냈다. 베트남으로 거주지를 옮긴 이후에는 TV 패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녀를 얼핏 보며 반가워했을 뿐이다. 그녀는 내게 ‘가족과의 시간’과 ‘일상의 기록’을 격려해준 고마운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가을이면 아방가르드적 바바리 코트로 패션 리더의 위용을 자랑하던 그녀. 그러나 일 이야기를 조금만 떠나면 한없이 수수하고 털털한 아이들의 엄마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하는 아줌마이기도 했던 그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에게(심지어 SNS를 일절 하지 않는 그녀에게) 어찌 안부를 물어야 할지 난감하지만, 어쨌든 문득 그녀가 보고 싶은 날이다.


박정희 할머니나 윤미네 아빠처럼 놀라운 근면 성실로 일상을 기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특별한 감정이나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을 글로 포착하려는 노력은 되는 대로 기울이고 있으니, 그녀가 내게 빌어주었던 ‘기록’의 나날들이 어찌 되었든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알게 모르게 나의 기록하는 습성을 응원해준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각 난다. 나와의 관계가 깊든 얕든, 길든 짧든, 고마운 사람은 고마운 사람이다. 많이 고마워하고 많이 겸허해지며 많이 노력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을 보면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멈추고-머무르고-어울리는 삶의 지속 가능한 흐름을 위해 나는 오늘도 보고-생각하고-쓰는 시간을 꿈꾼다. 흑백 사진처럼.


(20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