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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y 24. 2023

상실에 대한 메모에서 시작함


상실이란:


1) 쓰기로 이어지지 않은 읽기

2) 성실의 오타


(2023-5-21)




# '상실'을 주요 키워드로 삼은 글을 하나 쓰고 나서. 문득 '상실이 뭐길래'라는 생각. 생각은 생각보다 늘 뒤늦게 도착하고.


# 무언가를 애써 쓰고 나면. 텅 빈 기분. 이런 기분이야 새로울 것 없는 거지만. 배설은 안에 있는 것을 배출하는 것. 똥이든 말이든. 언젠가 썼듯. 배설(排泄)이든 배설(排說)이든. 쏟아냈으니 비어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애초에 비어 있는 공간에 무언가를 채워넣는 것 자체가 '비움'의 조건. 이 비움의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생각의 파편들을 배열하고 단어를 조합한다. 어디까지가 나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내게 영향을 준 것들의 생각인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결국 유(有)로서의 무(無)를 상정하는 것. 유로서의 무는 결국 유무가 하나라는 것을 새삼 환기한다. '유=무' 혹은 '유≠무'라기보다 '유+무=전체' 같은 것? 전체라니. 나는 자꾸 '무한'을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 대체 이 감정은 무엇일까. 상실감이구나. 무엇을 상실한 기분?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라는 윤동주의 시 구절은 여전히 유효하다. 늘 그렇듯 상실 대상은 '모르는 영역' 속에 잠겨 있다. 정말로 모른다고? 아는 것 같기도 한데 언어로 명료하게 포착할 수 없는 어떤 것.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라기보다 감정의 동물. 아니 '기분'의 동물.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의 '길' 마지막 연이다. 상실 대상, 아니 상실했다고 믿는 어떤 것을 찾는 과정 자체가 곧 삶이라는 성찰. 이 오랜 성찰은 낯선 것이 아니지만.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개별적 '나'들에게 반복해서 되돌아올 때마다 새롭게 거듭난다.


# 화풀이하듯(이러한 간헐적 화풀이 덕분에 뜻하지 않게 좋은 책을 만나기도 한다)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가. 읽기의 과정에서 발생한 감응의 여파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모종의 찜찜함. 직무유기랄까. 읽는 과정에서 나를 찾아오는 어떤 감정, 이미지, 단어들, 기억의 조각들, 생각의 파편들, (운이 좋다면) 통으로 오는 문장들. 이런 것들이 시간 속으로 곧 휘발될 것이라는 예감. 이런 걸 뭐라 불러야 하나. '예상 상실'?


# 그러고 보니. 지난 석 달간. 한 편의 글은 '상실'이라는 키워드를 한 축으로, 다른 한 편의 글은 '무한'이라는 키워드를 한 축으로 놓고 썼다. 내가 키워드를 고른 것이 아니라 키워드가 나를 고른 것이라면. 어느 쪽이 되었든 무언가를 쓰기 위해 내가 앞에 세워둔 키워드는 알게 모르게 나의 성향 혹은 취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나도 모르는 나의 키워드, 뭐 이런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우왕좌왕 혹은 좌충우돌하는 나의 동선을 가만 추적해보면 적어도 내가 어느 자장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하나는 정신분석, 다른 하나는 존재론. 그 둘을 송과선처럼(?) 이어주는 단어는 '실재'와 '언어'이다.


#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싶었으나. 말끔하게 쏟아내지 못했다는 불만족. 깔끔하게 쏟아낼 수 없는 무능력에 대한 자기인식. 자기검열 메커니즘에 대한 취약성. 탈역사에 가까운 성향이 역사와 사회라는 화두를 만날 때 빚어지는 어설픈 논리의 한계. 당위와 독창성은 함께할 수 없다는 체감. 다시 실패. 내정된 실패. 예감한 실패. 그래서?


# 베케트의 말처럼. “다시 시도하기. 다시 실패하기. 더 잘 실패하기.”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이 구절을 지젝은 현실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구호로 삼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고 더 잘 실패해야 하나.


# 글쓰기에 관한 한, 생전 아버지가 내게 남긴 짧고 명료한 메시지 "계속해"처럼. 그렇게 계속 시도하는 것이 '과정으로서의 글쓰기' 혹은 '주이상스로서의 글쓰기'라는 점을, 다시 말해 남은 삶의 방식으로 삼아도 좋을 만한 어떤 '방향성'이라는 것을 매번 인식하지만. '잉여의 소모'로서의 글쓰기 뒤에는 무언가 '잔여감'이 남는다. 잉여가 제대로 소진되지 않았다는 방증인가? 미련인가? 무능력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 체념하지 못하는 것을 체념하려는 것에 대한 염증?


# 무엇을 새롭게 시도할 것인가. 어떻게 실패할 것인가. 더 나은 실패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리 없이 ‘읽기’로. 쓰기로 이어질 읽기로. ‘쓰기로 이어지지 않는 읽기’를 ‘상실’로 느낀 어느 날의 메모는 결국 이러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다시 던지기 위한 소소한 꼼지락거림이었구나.


# 상실에 대한 이 짧은(11음절) 메모를 위해 메모앱을 켜고 ‘상실’이라는 단어를 서둘러 쳤을 때. ‘성실’이라는 글자가 타이핑된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오해가 이해를 낳듯 오타는 현타를 낳는가? ‘상실’에 대한 감각과 사유를 지속하려는 제스처는 어쩌면 ‘성실’의 태도일 수도 있겠구나.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단지. 새삼. 확인하기 위해. 나는 또 이렇게 길고 무용한 잡문을 썼구나. 다시 실패.


(2023-5-24)


*화풀이하듯 읽다 만난 흥미로운 책들의 목록

(이것들에 대해 당장 쓰지는 못해도 목록은 적어두자.)

 

- 에르베르 르 텔리에 <아노말리>

- 에두아르 르베 <자살>

- 엘렌 식수 <아야이! 문학의 비명>

- 남종신, 손예원, 정인교 <잠재문학실험실>

- 피에르 바야르 <예상 표절>

- 조르주 페렉, 자크 루보 <겨울 여행/어제 여행>

- 리어노라 캐링턴 <귀나팔>

- 캐롤라인 레빈 <형식들>

- 이여로 <긴끈>

- 루이즈 글릭 <야생 붓꽃>

- 이장욱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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