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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Feb 06. 2024

하찮은, 꾸밈없는, 사소한

페터 알텐베르크,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을 통해서다. 어떤 맥락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스쳐지나간 이름이지만(메모를 보니 ‘자연미'에 관한 부분이었던 듯), <하찮은 인생의 그림>이라는 책 제목을 적어놓은 것으로 보아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검색해보니 국내에는 민음사에서 나온 책이 유일한데 <꾸밈없는 인생의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독어를 모르니 둘 중 어느 제목이 더 적절한지는 판단할 수 없다. ‘하찮다’라는 말은 '꾸밈없다'라는 말에 비해 보다 강한 가치판단이 들어간 단어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태 혹은 풍경을 기술하는 글이라면 '꾸밈없다'라는 표현이 적절할 수 있겠지만. 만약 기술하는 이의 톤앤매너가 냉소와 조소를 오가는 종류의 것이라면 '꾸밈없다'라는 표현은 너무 순진한 인상을 준다.


내용이 아닌 형식에 주목한다면, 어떤 텍스트도 (나의 호불호, 취향에 상관없이) 생각의 시작점으로 삼을 만하다,고 말할 수 있나?


http://aladin.kr/p/z167o


내용에 관해서라면. 할 말 없음. 훑어보다가 곧 덮고 싶었으니까. 세기 말 빈의 일상적 순간을 냉담한 관찰자적 시점으로 포착했다,는 출판사 소개글은 무시해도 좋다. 185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20대에 ‘신경 체계 과민’ 및 ‘직업 활동 불가’ 판정을 받고, 빈의 카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보헤미안처럼 살다가(그는 빈의 카페하우스 문학을 대표한다고 한다), 말년에 신경 치료소를 드나들었던 한 남성 작가.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한국의 한 중년 여성 독자가 그의 텍스트에서 받은 주된 인상이 ‘유쾌하지 않은 냉소'와 ‘여성 혐오(폄하)적 표현’으로 수렴되는 점은 다소 유감스럽다. 이를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괴리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형식에 관해서라면. 하나의 제목 아래 1~2쪽에 불과한 짧은 글들. 단상과 파편. 편지와 짧은 연극 대본의 형식도 차용. 단상과 파편에 대한 호감이 적지 않은 나로서도 유의미한(적어도 나에게) 문장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롤랑 바르트의 <Incidents>('소소한 사건들'로 번역 출간된)이나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를 상상했었나?


하지만 유의미한 문장을 따지는 것은 단순히 내용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의 일이다. 형식과 내용의 불가분성 혹은 뒤얽힘을 생각한다면. 아도르노의 '진리 내용' 개념이 가리키듯, 개별 작품이 드러내는 사회와 역사와의 관계 혹은 당대 현실의 반영을 고려한다면, 하나의 텍스트가 갖는 진리의 문제(당시 역사와 사회 경험과 일치하느냐 여부에 따라 참 혹은 거짓으로 구분될 수도 있는)로 작품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짧고 경쾌한 스케치 형식에 담긴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당대의 사회/문화 풍경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유의미할 수 있겠단 생각은 들지만. 어쨌든 개인 취향은 아니라는 점에서 나를 저격하는 진리 내용은 아닌 것으로. 아도르노가 벤야민의 사유이미지들을 "타성에 젖은 사고에  충격을 주는 기능"으로 강조하는 관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 텍스트가 (아도르노가 말하는) '수수께끼가 주는 사유의 촉발'과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것.


다만 '사소한 것들'이라는 글에 잠시 머무른다.


요지는 이렇다. '나'(저자)는 오래전부터 아주 사소한 세부 사항으로만 인간을 평가한다는 것, 유감스럽게도 인간 삶에서 한 인간의 "비밀을 완전히 폭로하는 큰 사건"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 '나'는 이런 "비밀 폭로"를 가장 하찮은 사건에서 이미 읽어낼 수 있다는 것 등등. (물론 저자가 드는 사소한 예가 우리의 공감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지팡이 손잡이나 우산 손잡이, 넥타이, 옷감, 모자, 그/그녀의 개, 커프스 단추 등이기 때문.)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죽인다. 삶에서 중요한 것들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존재에 대해 우리가 이미 아는 그 이상의 것을 말하거나 알려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큰 위기 속에서 모든 것은 사실 똑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테일 속에는 오직 중요한 구별들만 존재한다. (...) 우리는 "사소한 것들"로부터 일상 존재의 심포니를 울릴  수 있다. 커다란 사건을 기다리면서가 아니다. 가장 사소한 것들이 가장 큰 사건이다. (...) 삶의 사소한 것들은 우리의 "큰 사건"을 대신한다. 그것이 사소한 것의 가치다. 만일 우리가 그 가치를 이해한다면!”

-  페터 알텐베르크, <꾸밈없는 인생의 그림>, 민음사(2018), 270-271쪽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만은 아니고, 평범한 것이 평범하기만 한 것은 아니며, 단순한 것이 단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사소한 언쟁이 큰 싸움이 되고, 사소한 사건이 전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사소한 계기가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저자는 그 '사소한 것들'의 가시적 효과를 위해 이토록 짧고 사소한 글들을 쓴 것일까. 아쉽게도 나는 그의 텍스트에서 '디테일 속의 진실'을 쉽게 포착해내지 못한다.


대신. 나의 삶(일상) 자체를 텍스트 삼아 좀더 면밀히 읽어내 보는 것이 보다 유용한 방법일지도. 사소한 말과 표정이 갈등을 촉발했던 순간들. 점화된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분란. 생각해보면 파국을 방지하거나 화합을 도모하는 계기 역시 사소한 제스처와 미소/유머에서 비롯되었다. 사소하고 평범한 것의 위대함을 '안다'고 생각하며 살지만, 일상에서 이를 매번 상기하고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오늘은 성공했나? 거창한 것을 생각하고 중요한 것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대신 하찮고 사소한 것들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하루였나?


어쩌면 사소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능력의 대부분인지도 모른다.


(202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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