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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Feb 08. 2024

사슴벌레식 문답에 관하여

# 몇 달 전 B를 만났을 때 B는 내게 권여선을 읽어본 적 있냐고 물었다. 읽어보았느냐고? 장편 <레몬>까지는 읽었지만, 이전 단편들을 읽을 때가 좋았다고 답했다. <레몬> 이후에는 더 이상 그녀의 소설을 찾아 읽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이전의 단편들을 읽을 때가 좋았다’는 말은 모호하다. 이전의 단편들이 (작품 자체로서) 상대적으로 더 좋았다는 것인지, 이전 단편들을 읽을 때 내가 처한 상황과 조건에 의해 작품들을 더 흡입력 있게 읽었다는 것인지. 이런 구분은 무의미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더 좋게 읽었다는 말 역시 그것을 읽는 시점의 ‘나’의 상황, 조건, 그리고 심리적 상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작가도 변하고, 작품도 변하고, 읽는 독자로서의 ’나‘도 변하니까.


# B가 묻는 의도가 궁금해서 나도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권여선은 왜? B는 지인의 추천으로 최근 권여선의 ‘사슴벌레식 문답’과 요즘 ‘핫’하다는 몇몇 여성 작가의 단편을 읽었다고 했다. 후일담 소설이 여전히 읽힌다는 것(그리고 높게 평가받는다는 것)이 놀랍다고도 했고, 최근 한국 소설을 견인하는 여성 작가들의 ‘재현 중심’ 서사가 자신에겐 몹시 지루하다고, 그래서 읽기 힘들다고도 했다. ‘사슴벌레식 문답’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어떤 점이 권여선 텍스트를 후일담 소설로 보이게 했을까 조금 궁금했고, B가 말하는 ‘사소설적 재현 서사’라는 맥락에 관해서는 나 또한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글쎄’라는 유보의 표현을, 후자에 대해서는 최근의 ‘어떤’(이 부분을 짚어보는 것은 또 다른 긴 호흡의 작업을 필요로 할 듯하다) 소설적 흐름에 나 역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동의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나는 한때 단편의 미학을 예찬하는 사람이었고(그 시작 어디쯤에 ‘앨리스 먼로’가 있을 것이다), 단편 소설이 포착하는 미세한 일상의 균열과 그 틈새로 흘러나오는 인간의 오묘한(단순한 감정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심리를 무심한 듯 섬세하게 다루는 작가의 스타일에 감탄하기도 했었는데.


# 마지막으로 읽은 권여선의 단편은 ’모르는 영역‘인 것 같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이고, 개인적으로 ‘모르는 영역’ 자체에 대한 끌림(동시에 고통)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낸 이후였기에 단순히 제목에 이끌려서였을 수도 있다. 별다른 감응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점점 더 은밀하게 감추어지는 모종의 소설적 ’장치‘가 어떤 양상으로 작동하는지 예민하게 감지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 같다. 내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보다 더 강렬하게 ‘모르는 영역’을 ‘모르는 형식‘으로 몰고 가는 어떤 에너지 같은 것? 정교한 계산 대신(물론 정교한 계산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텍스트도, 심지어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도 나름의 혹은 더 극단적인 방식의 정교한 계산을 토대로 한다. 레몽 루셀의 <아프리카의 인상> 같은 작품을 보면 그렇다), 계산되었으나 계산된 것을 기대하지 않는(심지어 바라지 않는), 예측된 결과를 전제하지 않는 그런 계산이라고나 할까. 구성하지 않는 구성. 구성하지 않는 구성의 법칙 같은 것을 나는 생각하는 것 같고. 미리 규정된 청사진이 아닌 비구성적 구성이 빚어내는 되어가는 과정으로서의 텍스트에 매력을 느끼는 개인적 취향일 수도 있고.


# 누군가 어떤 대상(사람이든 텍스트든)에 대해 자신의 인상이나 평가를 말할 때 거기에 무성의하게 맞장구침으로써 어떤 대상에 대한 나의 온당한(혹은 고유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일 수 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의 위험성,을 새삼 환기시키는 사례들은 도처에 있다. ‘타인의 판단’을 우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우위에 두기 위해서는 나름의 의지와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이 (비록 사소하다 할지라도) 일상에서 행하는 실천이라면 실천일 수도 있을 테고.


# B가 이야기한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을 읽었을 때. B가 말한 대로 ‘후일담 문학’이라는 범주 안에만 가두어 보기에는 그 이상의 함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남는 아쉬움…


# 이야기의 모티프는 네 명의 친구들(부영, 정원, 경애, 나)이 함께한 어느 여행의 숙소에서 비롯된다. 방충망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 들어왔는지 모를 ‘사슴벌레’를 두고, 숙소 주인은 득도한 듯 “어디로든 들어와”라고 답한다. ‘사슴벌레식 문답’이라는 모티프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의젓한 말투”가 등장 인물들의 삶에 적용되는 문답이 되는 것.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정원과 나는 이런 대화법을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중, <각각의 계절>, 문학동네, 2023


‘사슴벌레’라는 마법의 버튼이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던 화자 ‘나’는 십 년 뒤 친구 정원의 자살로 인해 그 문답 속에 숨어 있는 ‘무서운 뉘앙스’를 감지한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 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같은 소설)


십 년 전 터진 ‘그 사건’에서 경애는 조직 사건 연루자로 조사를 받던 중 거짓 진술로 부영 부부를 배신하고 변절자가 된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팩트만 진술했어. 더도 덜도 아닌 팩트만 얘기했어. 그게 내가 너희 부부한테 미안하지 않은 이유야.” 사슴벌레 문답을 경애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아, 나 어떻게든 이래, 내가 어떻게든 이래.”


예컨대 아쉬운 점은 이런 문장들이다.


“따지고 보면 경애의 잘못만도 아니고 이 썩어빠진 시스템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개입하며 판단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다음과 같은 단정한 정리는 어떨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독자가 혹시 ‘소설적 진실’을 놓칠까 봐 친절한 설명을 잊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예 자신의 모티프를 해설하는 다음과 같은 결론.


“나는 주문을 외우듯 다시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돌아간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그리고 다시 덧붙인다.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다는 말은 미안할 방법이 없다는, 돌이킬 도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나온 행로 속에 존재했던 불가해한 구멍, 그 뼈아픈 결락에 대한 무지와 무력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런 문장들이 주는 명료한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긴 서사를 읽은 때도 있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밤새 우는 소쩍새가 필요하듯. 빛나는 한 문장을 피우기 위해 서사는 필요한 만큼 길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태도가 바뀌었나. 이제 나는 결정적인 문장을 만나는 것보다(물론 만나면 좋다), 소설을 통해 발화를 결심한(첫 문장을 시작한)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지워나가는지 관찰하는 쪽에 더 큰 흥미를 느낀다. 쓰는 주체의 자리를 문장에 내주는, 즉 언어 자체에 내주는 그런 방식.


# B는 B대로 사슴벌레식 문답을 아쉽게 읽었고, 나는 나대로 아쉽게 읽었다.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이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되는 이 작품에서 어떤 인사이트도 얻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기 합리화’라는 모티프는 앞으로도 소진되지 않을 것이고, 이를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엮어낸 작가의 솜씨가 훌륭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단지 읽는 ‘나’의 관점이 변했을 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럴 수 있다. 나의 관점은 또 바뀔 것이다. 단지 나는 ‘현재’의 관점을 ‘어떻게든’ 적어두고픈 욕망에 충실할 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슴벌레식 문답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픈 충동은 어쩔 수 없다. 해외에 있을 때 나는 김중혁의 ‘뭐라도 되겠지’라는 산문집 제목을 나의 모토로 차용했다. “뭐라도 읽겠지” 혹은 “뭐라도 쓰겠지”(그래서 뭐라도 읽거나 뭐라도 쓸 수 있었다). 다시 십 년이 흘러. 권여선 식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어떻게든 쓰겠지.


화자 ‘나’가 말한 것처럼 ‘어떻게든’이라는 표현이 자기방어나 두려움 혹은 무력함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체념의 어조 속에 숨어 있는 (미묘하게 드러나는) 의지의 뉘앙스. 의지는 때로 체념 안에 거주하기도 한다.


(20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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