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일정이 어그러진다. 리듬이 깨진다.
# 어제 오후. L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운 없는 그러나 담담한 목소리. 폐와 간에 암세포가 전이되었다는 결과. 그리고 직장암. 유방암 2기를 판정받았던 것이 불과 2년 전, 극심한 고통을 견뎌내며 수술과 항암을 마치고 완쾌 판정을 받았던 것이 불과 1년 전이다.
# 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항암은 두렵다고 했다.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 그 공포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 L은 잠시 울었다. 나는 울지 않았고. 아니, 울지 않으려 애썼다. 드문드문 어떤 말이 오갔고. L의 목소리는 다시 담담해졌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아. 언제나 그랬어. 항암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 나는 잠시 울었다. 그녀는 울지 않았고. 내게 울지 말라고 했다.
# 겪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나.
#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아.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다. 호스피스에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임종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 이후로도 여러 번.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속에서 말을 골랐다.
# 울지 마. 아버지는 이렇게도 말했다. 울지 않으려 애썼지만 간간이 무너질 때마다.
# 항암 치료 여부를 두고 밤낮으로 고민했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2년 전 일이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항암을 거부했지만. 자식은 항암을 거부하는 아버지의 의견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설득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한 자식은 설득의 근거를 찾는다. 설득한다. 설득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한 아버지는 설득당한다. 견딜 수 없으면 그때 항암을 중단하자는 지점에서 합의가 이루어진다. 항암 치료를 결정한다. 주치의는 가족의 결정이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혈액종양내과로 연결된다. 생각날 때마다 적어둔 무수한 질문 목록을 가지고 간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반전이 일어난다. 항암 불가 판정. 항암 치료를 감당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것. 의사는 자식에게만 따로 말을 전한다.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남은 기간 편안하게 지내시도록 돕는 것이 좋겠다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5개월 뒤이다.)
# 오늘. L은 혈액종양내과를 방문해서 향후 치료 계획에 대한 의사의 의견을 듣는다고 했다. 의사로부터 항암 불가 판정을 받고 멍한 상태로 복도를 서성이던 2년 전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오늘 L이 연락할지는 미지수다.
# L의 연락을 기다리며 L과 나눈 지난 몇 년 간의 카톡 대화창을 들추어본다. 시와 책과 음악과 미술과 일상에 대해 나눈 무수한 말들. 몸이 아픈 이후로 책은 보지 못하고 라디오만 듣는다는 L이 어느날 클래식 FM에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곡인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가 나온다며 말을 건네기도 했다. L을 생각하며 듣는다. miserere mei Deus.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눈물이 난다.
https://youtu.be/H3v9unphfi0?si=_3i_yUiP76fKn4xn
# 아버지의 마지막 나날들. 호스피스 복도에서 매주 한번씩 (두 번이었나?) 들려오던 기도 문구가 떠오른다. 점심 이후 정해진 시간에 수녀 간호사가 복도에서 마이크를 잡고 기도 문구를 제창하면 각 병실의 환자, 보호자, 도우미들이 따라 읊곤 했던. 신자가 아닌 아버지와 나는 멀뚱히 앉아(혹은 누워) 있을 뿐. 일체의 제도권 종교(및 의식)에 거부감을 표시했던 아버지는 그 시간을 싫어했지만. 나는 짐짓 그 기도 문구에 귀를 기울여 받아 적은 적도 있다. 하루는 복도에 놓인 탁자 위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비는 5단 기도’라는 명함 크기의 작은 종이를 발견하고 유심히 읽어보기도 했다. 요는 이러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여,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 종교가 없던 L이 힘들 때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이나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기타 (카톨릭) 성가를 들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L은 기독교나 카톨릭과는 거리가 멀었고, 부모님과 절에 가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 ‘긍휼’이나 ‘자비’가 특정한 종교의 맥락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는 아닐 것이다. ‘나’와 ‘너’ 모두를 불쌍히 여기는 것, ‘나’와 ‘너’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우리가 홀로 또는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을까.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주체를 신으로 상정할 때, 우리는 신에게 기도한다. 그 주체의 자리에 신 대신 우리 각자를 놓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기도한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 기도한다.
(202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