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 07. 2024

기도한다는 것

# L의 근황. 어렵게 항암 치료를 마치고 완쾌 판정을 받은 것도 잠시. 혈변과 기타 증상으로 고통받는 기간이 너무 길어진다 싶을 때. 카톡으로 L에게 안부를 묻다가 최근 폐에 뭔가가 잡혀서 CT를 찍었다는 말을 들었다. 철렁. 폐에 잡힌 것이 암일지도 몰라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덜컥. 여러 가지 약 부작용으로 거의 먹지 못하고 매일 두세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고도 했다. 덜컹. 통증 때문에 걷는 것조차 버거우니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L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일단 잠 좀 자’라는 문자만 찍어보냈을 뿐.

 

#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면서도 먼저 연락할 수 없었다. 겁이 나기도 했고, L이 투병 생활을 하면서(특히 고통스러운 항암 기간 중에) 자신이 연락하기 전에 먼저 연락하지 말아줄 것을 신신당부하던 것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 또한 머뭇거리며 기다리던 중. 지난 주말 L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프고 나서부터 좀처럼 먼저 연락하지 않던 L이 문자도 아닌 전화를 한 것. 목소리를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 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작고 힘없는 목소리. CT 결과로 미루어 PET 검사도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병원 쪽 연락을 받고 며칠 전 PET 검사까지 받았다고 했다. L은 다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폐에 전이가 된 것이라면 자신은 이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며. 결과를 통보받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학습된 고통이 향후 닥칠 고통의 공포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직장 깊숙이 커다란 혹이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혈변의 원인은 알게 된 셈이지만. 원인을 알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 고통을 감당해야 했던 것. PET 검사는 수요일에, 직장 조직 검사는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나온다고 했다. 내가 궁금해할 테니 다음주 정도에 결과를 전하겠다고도 했다. 두려움과 비탄에 빠진 오랜 친구의 목소리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일단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자’라는 말뿐. 그리고 불쑥 ‘기도하겠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종교도 없고 기도해본 적도 없지만, 오늘부터 기도하겠노라고.

 

# L과 통화를 마치고. 기도에 대해 잠시 생각. 기도를 해본 적 있나? 아주 어렸을 적 엄마 따라 나선 교회에서 소위 기도라는 것을 흉내내본 적은 있다. 뭔가 신성한 의식에 참여한다는 이상한 기분.


#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모네 가족은 늘 기도를 했다. 그들이 기도하는 모습(늘 이모가 주도하고 나머지 멤버는 그 기도에 동참하는 형식처럼 보였다)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가끔씩 그 기도의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배석한 이들에게 기도를 해볼 것을 권유하는 순간은 몹시도 싫었다. ‘이번엔 ㅇㅇ가 기도해보는 게 어때’라는 말을 듣는 것은 끔찍했다. 의사를 물어보는 것도 아닌 강권. 왜 기도를 강요하는가. 나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 그리고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왜 기도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기도의 문구를 즉흥적으로 지어내 발화해야 한다는 엄청난 당혹감, 그리고 중압감.


# 이후로도 '기도'라는 행위를 (제대로) 해본 기억은 없다. 그래도 '기도합니다'라는 표현은 종종 사용했던 것 같다. 기도합니다,라는 말은 기원합니다,라는 말만큼 의례적 용법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웬만해선 '기도합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려 애썼다. 왜일까. '기도한다'라는 말이 내게 '기도하는 행위'를 요청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기도하지 않는데,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웬 염결주의?)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상대가 '~을 기도해주세요'라고 정확히 발화할(부탁할) 경우, 나는 '~을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답한 적이 있다). 예컨대 이런 상황. 해외에 있을 때 누군가의 부고를 들었다. 멀리 있어 가보지 못하는 심정을 전하자 상대방은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마음속으로 화살기도를 보내주세요." 화살기도라니. 처음 들어보는 말이기도 했지만, 기도를 보내달라는 요청에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관용어 역시 '빕니다'라는 기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처음으로(내가 의식적으로 한 행위에 한해서) '~을 기도합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정은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실제로 내가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짧게. 화살처럼.

 

# 아무리 의례적 용법이라 해도 '기도합니다'라는 말은 '기원합니다'라는 말보다 좀더 밀도 높은 표현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보기로 하자.) 얼핏 드는 느낌은 단어가 주는 이미지의 차이이다. '기원'이 내면적이라면 '기도'는 외면적이랄까. 물론 '기도' 역시 내면적 표현의 한 형태이긴 하다. 그러나 '발화'라는 기준을 두고 생각한다면, '기원'에 비해 '기도'가 주는 모종의 행위성이 좀더 외면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소리 내어 기도하는 이모네 가족을 보아와서일 수도 있다.) 발화한다,는 것이 진정성의 강도를 배가시키는가? (기도하는) 주체를 걸고 발화하는 수행적 행위라는 점에서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마치. '기원'은 수사학적이고, '기도'는 존재론적인 것처럼 느껴지는군.


# 기도의 수행성.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오스틴의 언어철학과 연결된다. 오스틴은 "문장을 발화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위 수행적 문장(performative sentence) 또는 수행적 발화(performative utterance). 오스틴은 이를 간단히 '수행문'(performative)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오스틴이 드는 대표적인 예가 결혼 의식에서 발화되는 문장의 경우다. '나는 이 여자를 합법적인 아내로 맞이한다'라고 할 때의 'I do'는 호적 담당자나 제대(altar) 등의 앞에서 결혼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 "발화를 표출하는 것이 곧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J.L. 오스틴, <말과 행위>, 김영진 옮김, 서광사, 27쪽) 문득. 그렇다면 '기도' 또한 수행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


# 물론.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해냈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생각은 이미 다른 이의 생각일 확률이 높다. 매우 매우 높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영향을 받았거나, 학습했거나, 알게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소위 '인식의 장'에 도리 없이 처해 있기 때문.) 오스틴의 책을 뒤적여 보니 '기도하다'라는 동사는 이미 수행적 발화에 포함되어 있군. 우리의 엄밀한 오스틴은 수행적 발화를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각각에 해당되는 동사들을 꼼꼼히 정리해두었다. 판정발화(Verdictives), 행사발화(Exercitives), 언약발화(Commissives), 행태발화(Behabitives), 평서발화(Expositives). 이 다섯 부류 중 '기도하다(pray)'는 행사발화에 포함되는 것.


# 오래전부터 언어가 갖는 자기 예언적, 자기 실현적, 자기 주술적 요소에 대하여 생각해왔다. 발화함으로써, 좀더 또렷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함으로써 그 '말함'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믿는 것. 혹은 믿고 싶은 것. 알게 모르게 '언어의 수행성'에 늘 공감해왔던 셈이다. 기도야말로 언어의 수행성과 연관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비종교인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라는 이상한 명제를 스스로 세워두었던 것은 아닌지. 즉 기도할 대상('나'가 믿는 신/절대자)이 없기에 기도할 수 없다는 이상한 결론.


# 과연 그런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기도한 적이 없나? 추석 보름달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염원(진부하기 짝이 없지만)한 것은 기도가 아닌가? 오래전 캐나다 퀘벡의 한 성당에서 홀로 초를 켜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 것은 기도가 아니었나? 가까운 예로, 얼마 전 양산의 통도사를 찾았다가 이끌리듯 신을 벗고 대웅전 마루에서 절을 올린 것은 무엇이었나?


# ‘기도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도. 인간의 의지로 어쩌지 못하는(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어떤 사태 앞에서, 기도를 모르던(혹은 잊은 혹은 외면한) 인간은 기도를 하기도 한다. 기도야말로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무엇을 상상하며 발화하는 믿음의 체화(體化) 아닌가.


# 믿음은 믿음일 뿐이라고 믿지만.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이성적 믿음,이라는 것은 가능한가.


# <믿습니까? 믿습니다!>를 쓴 지은이(오후)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이 늘 합리적인 것만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인류는 원래 무분별하게 무언가를 믿는다"고. (사랑도 무분별한 믿음이라는 측면에서는 미신적이다.)


#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미신이 있다면, 그건 미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 미신이 생길 수밖에 없던 시대 상황이 이상한 것"이라는 말을 비틀어본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기도하지 않던 자가 기도를 한다면 그건 기도하는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러한 기도 행위를 추동하는 어떤 특정한 상황이 있는 것이라고.


# 기도한다.

 

(2024-3-6)


https://youtu.be/HV4BO1I-mdM?si=qOwZ0Hog3o7P5edF

Yasushi Yoshida - Prayer For A Dawn



매거진의 이전글 남아 있는 것들로 계속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