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들은 날아올지니!
한국에서 호치민으로 이주하면서 가구 딸린 집을 얻었다. 주방 근처에 놓인 커다란 식탁엔 의자가 6개나 달려 있었다. 식구 수에 맞추어 쓰고도 남는 의자는 잡동사니를 올려놓는 선반이나 가방 걸이 신세가 되었다. 그러고도 남는 의자 하나는 (손님이 오지 않는 이상) 별 쓰임새 없이 구색만 맞추고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의자를 빼내어 주방과 식탁 사이의 공간 어디쯤에 놓아두게 되었다. 주방 일을 하다 보면 잠시 앉고 싶은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딱 안성맞춤일 듯했다. 커피를 내리다가, 요리를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것들을 메모하다가, 식탁까지 가 앉기엔 좀 뭐하고 계속 서 있자니 불편하고 아쉬울 때 그루터기처럼 걸쳐 앉기에 그만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생각 의자'로 바뀌게 되었는데, 작정하지 않아도 앉아 있다 보면 뭐라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치 변기나 욕조처럼. 딱히 어떤 생각이랄 것도 없이, 어느 때엔 밑도 끝도 없는 문장 하나가, 또 어느 때엔 띄엄띄엄 몇 개의 단어가 슬며시 떠오르기도 했다. 잉여 의자가 잉여 생각을 채집하는 양상이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과정은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되었는데, 채집된 말과 생각의 조각들은 약간의 공정을 거쳐 나름의 분류 과정까지 거치게 되었다. 이건 시상(詩想), 저건 단상, 이건 말놀이, 저건 지난 번 읽은 책과 묶어서, 이건 철학적 사유로 확장하여...등등.
해리 포터가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하여 하우스(기숙사)를 배정받을 때 등장한 그 마법 모자(Sorting Hat)처럼. 음, 너는 그리핀도르(Gryffindors) 하우스, 흠, 너는 허플퍼프(Hufflepuff) 하우스, 너는 레이븐클로(Ravenclaw), 너는 슬리데린(Slytherin)......하는 식으로 아이 각자의 머리 위에 앉아 요상한 이름들을 불러내며 하우스를 배정하는 장면처럼.
이제 막 시작한 하루를 앞두고 잠시 백지처럼(그러나 약간의 긴장을 잃지 않고) 앉아 있으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 모자의 목소리처럼, 어디선가 낯설고도 낯익은 문장들이(하다못해 몇 개 안 되는 단어의 조합이라도) 슬금슬금 머릿속 백지에 내려앉는다. 이 글 역시 그 잉여 의자 위에 앉아 있다가 떠오른 생각으로 시작되었으니까.
‘반드시 꼭 필요한 것은 아닌 물건’을 우리는 되도록 버리라고 조언받는다. 그러나 ‘반드시 꼭 쓸모 있는 것은 아닌 그 무엇’이(특히 버릴 수도 없는 경우일 때) 어느 순간 살짝 다른 곳에 놓이기만 해도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쓸모 있는 쓰임새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계기였다.
제자리는 꼭 ‘제자리’여서가 아니라, ‘제 자리’를 찾으려는 시도와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나의 잉여 의자처럼. 엉킨 실타래 같은 생각 뭉치를 (실처럼) 가느다란 문장으로 뽑아 불러오는 마법의 분류 의자(Sorting Chair)처럼 말이다.
그러니(이 밋밋한 잉여 의자에 이제 마법 의자인 양 주문을 걸어 놓았으니), 앞으로도 앉을 때마다 문장들은 날아올지어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