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잡을 수 없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종잡다'라는 말은 '대중으로 헤아려 잡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종잡을 수 없다,는 말은 대중으로 헤아려 잡을 수조차 없다는 말이 된다.

사람을 가리켜 종잡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일관성이 없고 변화무쌍하여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 될 것이다.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사고와 행동의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이라는 뜻도 되지 않을까.



# 야누스적 얼굴, 벤야민


인간이 포착할 수 있는 가시광선이 제한되어 있듯, 보통의 평범한 시각으로는 일정(소위 정상적인) 스펙트럼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 제한된 시력으로 심지어 가독성이 그다지 높지 않은 인물을 포착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발터 벤야민을 떠올릴 때 '종잡을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나의 지식이 얄팍한 이유도 있겠지만.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가 <역사철학테제>에서 사적 유물론과 유대 신학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이론을 펼쳤다는 것,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는 기술복제로 인한 아우라의 상실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오히려 대중예술의 민주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 등이다.


기술복제의 속성(당시 사진이나 영화로 대변되는)이 오히려 대중의 정치적 각성을 촉진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점에서는 진보적 혁명가로서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가도, 그의 아포리즘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가 꼭 사적 유물론에 경도된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특히 <일방통행로> 같은 그의 파편적 사유의 글들을 읽다 보면, 그의 화법은 마치 시인이 쓴 산문에 가까워서 낯선 문장들 사이로 함의가 넘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저 너머 세계 혹은 꿈에 대한 뭉근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벤야민에게는 유대 신학자와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자라는 ‘야누스적 얼굴’이 존재한다”라는 그의 벗 숄렘의 말처럼 말이다. (신혜경,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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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방통행로의 매력 - 벤야민을 이루는 퍼즐 조각들


<일방통행로>는 60개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각각의 글에 다소 엉뚱하고도 은유적인 제목을 붙임으로써 독자를 한층 더 의아하게 만든다. 그만의 ‘거리 두기’ 스타일일까? 그의 글을 읽고 나서 그가 붙인 제목 옆에 괄호를 달아 내 나름의 제목 혹은 키워드를 다시 붙여본다. 그의 의도가 ‘거리 두기’라는 장치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유를 읽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이에 기꺼이 부응하는 차원에서. 모호함 속에서 발견하는 그의 날카로운 냉소나 유머 감각은 결코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일견 후루룩 읽어 치울 수 있을 것 같은 부담 없는 볼륨에도 불구하고) 좀더 찬찬히 행간을 살피게 된다(물론 번역문이라는 한계도 있겠지만).


그가 ‘중국 도자기 공예품’이라는 탈(脫)주제적인 제목의 글에서 밝혔듯 ‘읽는 이’의 태도는 ‘중국의 서적 필사 전통’의 정신을 본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걸어가느냐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위를 날아가느냐에 따라 시골 길이 발휘하는 힘은 전혀 달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텍스트도 그것을 읽느냐 아니면 베껴 쓰느냐에 따라 발휘하는 힘이 전혀 다르다. (…)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길의 지배력을 알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는 그저 쭉 펼쳐져 있는 평야에 불과한) 지형들로부터 마치 병사들을 전선에 배치하는 지휘관의 호령처럼 원경들, 전망대, 숲 속의 공터, 굽이굽이 길목마다 펼쳐진 멋진 조망을 불러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껴 쓴 텍스트만이 그것에 몰두한 사람의 영혼에게 호령할 수 있는 반면 단순한 독자는 (텍스트에 의해 열린) 자기 내면의 새로운 광경들, 계속 다시 빽빽해지는 내면의 원시림들 사이로 나 있는 길을 결코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저 읽기만 하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하늘을 떠돌며 자아의 움직임에 따르지만 베껴 적는 사람은 그러한 움직임에 호령을 하기 때문이다.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새물결(2007), ‘중국 도자기 공예품’, 27p


‘기록하지 않으면 읽었다고 볼 수 없다’는 말에 수긍하며 단순한 밑줄 긋기에서 더 나아가 페이지 여백에 ‘나만의 호령’을 적어두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전이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점점 더 ‘필사’의 매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쉬어 가며 필요한 만큼 머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에 대한 긍정적 측면(일반 대중의 각성에 진보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매개로서)을 강조하던 벤야민도, ‘필사’라는 행위를 통해 작품의 아우라를 흡수하려는 전통적 방식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즉석에서 해야만 강한 힘을 발휘한다. 모든 결정적인 펀치는 왼손으로 가격된다”는 그의 말이 앞서 배치되어 있기에,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는 ‘필사’라 할지라도 그 ‘하고자 하는 욕구(아우라를 나만의 것으로 흡수하려는 욕구)’만은 ‘즉흥성’과 ‘독자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고자 한다.


벤야민이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조각들 중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단면은 ‘꿈’에 대한 관심이다. “형상들을 담고 있는 시간들은 꿈의 집 안에서 흘러가 버렸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가 꿈에 대하여 갖는 생각들 혹은 자신의 꿈을 묘사한 장면들은 꽤 흥미롭다. 그가 괴테 하우스를 방문하는 꿈(‘113번지’라는 제목의 글)은 그의 내부를 슬쩍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프로이트가 좋아했을 만한) 퍼즐 조각이며, 멕시코 원시림의 동굴 예배 꿈(‘멕시코 대사관’) 속에 등장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목제 흉상과 멕시코 신상의 대비되는 모습이나, 교회 모양을 한 프리 애니미즘 preanimism 시대의 성전에 대한 꿈(‘지하 공사’)은 그의 종교성을 드러내 주는 퍼즐 조각이다.


19세기 추리소설 작가들을 ‘부르주아 계급의 복마전’을 드러내게 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장면(23p)이나 “부르주아지는 투쟁에서 이기든 지든 그들의 발전 과정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될 내적인 모순에 의해 몰락할 운명”이라고 말하는 데에서는(‘화재경보기’) 마르크스주의자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 벤야민의 글쓰기 - 모호성이 확실성을 대체한다


이 책이 매력적인 것은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곳곳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주유소’라는 첫 번째 제목 역시 ‘글쓰기’에 대한 아날로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된 문학 활동이 문학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길 바라서는 안 된다. 문학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행동과 글쓰기가 엄격하게 교대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려면 괜히 젠 체하기만 하며 일반적인 제스처만 취하고 마는 저서보다 현재 활동 중인 공동체들에 영향을 미치기에 훨씬 더 적합한, 언뜻 싸구려처럼 보이는 형식들, 즉 전단지, 팸플릿, 신문 기사와 플래카드 등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처럼 기민한 언어만이 순간순간을 능동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주유소’ 중)


벤야민은 기술의 진보를 통해 (예술)작가가 정치적인 진보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의 기술(특히 디지털 매체)을 목격하고 어떤 식으로 사유하고 비평할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가 생각하는 글쓰기 단계 역시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구성을 생각하는 음악적 단계, 조립하는 건축적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짜맞추는 직물적 단계. (‘계단 주의!’)


이 책을 통해 가장 많이 알려졌을 ‘벽보 부착 금지!’와 ‘13번지’는 그의 서늘한 문체를 느끼게 해주는 대표적인 두 개의 글이다.


작가의 기술에 관한 13개의 테제, 속물들에 맞서기 위한 13개의 테제, 비평가의 테크닉에 관한 13개의 테제 등 세 파트로 이루어진 ‘벽보 부착 금지!’는 자체로 날카롭게 빛난다. 몇 개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 자기 글을 보여주고 싶은 점증하는 욕망은 결국 완성을 위한 모터가 될 것이다.

5. 떠오르는 어떤 생각도 모르게 지나가도록 하지 말 것. 메모장에 노트를 할 때는 관청들이 외국인 등록부를 기록할 때처럼 엄격하게 할 것.

6. 너의 펜이 떠오르는 착상에 대해 까다롭게 굴도록 할 것. 그때그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는 데 있어 신중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그것은 한껏 펼쳐진 채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말(이야기)은 생각을 정복하지만 문자(글쓰기)는 생각을 지배한다.

9. 단 한 줄이라도 글을 쓰지 않고 보내는 날이 없도록 할 것 – 하물며 몇 주일씩이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12. 집필의 단계들 – 생각, 문체, 집필. (…) 생각은 영감을 죽이고 문체는 생각을 속박하며 집필은 문체에 보수를 지불한다.

13. 작품은 구상의 데드마스크이다.

(‘작가의 기술에 관한 13개의 테제’ 중)


책과 매춘부의 13가지 공통점을 위트 있게 기술한 ‘13번지’ 역시 자주 인용되는 글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 책과 매춘부는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

2. 책과 매춘부는 시간을 헷갈리게 만든다. 밤을 낮처럼, 낮을 밤처럼 지배하는 것이다.

5. 책과 매춘부 – 양자에게는 저마다 이들을 갈취하고 괴롭히는 남자들이 달라붙어 있다. 책에는 비평가들이.

11. 책과 매춘부 – “신앙심 깊은 늙은 여자도 젊었을 때는 매춘부”(독일 속담). 지금 젊은이들의 필독서가 되어 있는 책 중 얼마나 많은 것이 과거에는 악평을 받았던가!


어느 카페에서 상념을 글로 옮기는 과정을 외과의가 수술을 집도하는 것처럼 재치 있게 표현한 것(‘외래 환자 진료소’)이나, “집필한다는 것은 작가의 내면에 갖춰져 있는 비상 경보기를 켠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글(‘응급 기술 원조’) 역시 ‘글쓰기’에 대해 그가 찬찬히 빚어낸 사유의 결과물들이다.


번역문이 갖는 한계 때문인지, 친근하지 않은 대상 때문인지 혹은 그가 겹겹이 쌓아올린 층위의 난해함 때문인지, 끝내 소화(?)되지 않고 미끄러져간 글들도 다수이지만, 그 모호함은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속성을 지녔다. 마치 내 안의 아직 탐색되지 않은 모호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모든 사물에서 모호성이 확실성을 대체한다”라는 그의 말이 맴도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종잡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보다 알고자 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철학이든 예술이든 혹은 정신이든. 어차피 삶이란 나를 둘러싼 종잡을 수 없는 세계와 타인들 사이를 더듬어 나아가며 알고자 하는 의지 아니던가.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아크등’)


(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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