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형이상학 - 철학의 다른 이름

알랭 바디우의 <행복의 형이상학>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계기로 이 책을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알랭 바디우의 저작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내게 행복의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이 제법 말랑말랑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행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개인사에 연결시켜 골몰하던 때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당시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마음의 지옥이로군, 하는 기분으로 바싹 타들어가면서도, 이 순간이 있어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작은 감탄사를 간간이 내뱉기도 하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시간이 교차되었다. 삶의 양면은 늘 아이러니라는 축을 두고 서로 맞닿아 있다.

‘행복’이라는 개념의 일반화(예컨대 사회적 부와 지위, 명성, 건강, 관계 등)를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적어도 내게 ‘행복’의 (혹은 행복,이라고 믿을 만한) 감정을 일으키는 ‘순간’을 지속적으로 복기하고 정리해두려는 개인적인 습성은 계속 유지해왔다.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잣대로밖에 정의될 수 없(다고 믿)는 행복의 주관적 특성에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적 용어가 따라붙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행복 + 형이상학,이라는 독특한 조합. 행복,이라는 추상적 키워드가 형이상학이라는 거대 체계 안에서 어떤 식으로 논의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평온한 삶이란 이를 테면 일상적 만족을 주는 자잘한 보상들, 훌륭한 직업, 적당한 보수, 무쇠 같은 건강, 명랑한 부부 관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휴가, 유쾌한 친구들, 잘 갖춰진 집, 쾌적한 자동차, 마음을 녹이는 충성스러운 애완동물,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성적도 좋은 예쁜 아이들, 요컨대 보통 ‘행복’이라고 여기는 편익들로 이루어진다.


- 알랭 바디우, <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2016, ‘서론' 중에서

‘편익’이라…… 나는 편익(便益)이라는 말을 곱씹어본다. 편하고 이로운 것. 그러고 보니, 행복의 요소들로 간주하는 상당 부분이 이 편익의 기준에 부합한다.

나는 행복을 심리적 상태로 보았기에(즉 마음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에) 유구한 동양철학의 관점에 비추어 ‘평정심(平靜心)’을 행복의 필수적인 요소로 꼽아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정심의 정(靜) 즉 고요한 상태보다는 평(平) 즉 균형을 향한 치열한 운동성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균형’이란, 끊임없이 움직이는 불균형의 힘이 균형을 향해 나아가는 에너지의 총합이자 그 합의 팽팽한 유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뭐랄까, 역동적 균형 상태,라고 해야 하나. 줄다리기 경기에서 양쪽의 팽팽한 힘의 균형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지점처럼. 예컨대, 정(靜)이 주는 편안함과 평온함을 아우르면서도, 평(平)이 주는 역동성을 추구하는 것 혹은 그러한 상태, 그것이 행복(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이율배반적인가?

저자 역시 책 제목의 역설을 알고 있기에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책 제목의 역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론의 여지없이 인정받는 대가들, 예컨대 플라톤이나 스피노자에 의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첫째로 플라톤은 <국가>에서 (…) 지배적인 의견들에 순응하기를 그만두고 오로지 사유가 “분유하는(participle)” 진리들을 신뢰하는 것만이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증명한다. 수학과 논리와 행복의 관계는 전적으로 이 관계의 정합성을 보장하는 형이상학적 관점에 근거한다. (…) 다시 말해 수학에서 변증법으로, 그리고 변증법에서 행복에 이르는 귀결이 옳다면, 우리는 이러한 귀결에 대한 완전한 사유를 ‘형이상학적’이라 명명할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진리들에 이르는 모든 통로를 가리키는 틀림없는 표지이며 따라서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의 실재적 목적이기에, 진리로 향하는 도정과 그 도정에 관한 완전한 성찰이 행복의 형이상학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요컨대 모든 철학은 일종의 행복의 형이상학이다.

나는 이 책을 종이책으로 사고 싶었으나 한국에서 공수해올 때까지 몇 달을 기다릴 수 없어 eBook으로 구매했다. 책갈피 50개, 하이라이트 200여 개. 그러니까 종이책으로 따지자면 50여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고 200군데가량 밑줄을 그었다는 이야기다. 이 짧은 분량의 책에.

분명 고개를 끄덕이며, 혹은 끄덕이는 나 자신을 대견해하며, 밑줄을 긋고 책갈피를 표시해놓았을 테지만, 다 읽고 나서도 저자가 구상하는 철학적 글쓰기-사유의 경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느낀다.

나는 진리와 행복 사이의 관계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주체의 이론>(1982)에서 <존재와 사건>(1988)을 거쳐 <세계의 논리>(2006)에 이르는 내 앞선 작업의 단계들, 그러니까 다수적 존재, 사건, 진리들, 주체라는 근본적인 범주들의 배열을 정리한다. (…) 나는 앞으로 나올 <진리들의 내재성>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책을 구성할 핵심 내용의 극심한 난해함을 숨기지 않으면서 앞으로 이어질 경로를 고지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유한과 무한 사이의 새로운 변증법의 무대이다. 이 책에서 행복은 유한성의 중단을 단언하는 경험으로 정의될 수 있다.

위와 같은 도정 위에 자리잡은 이 책 <행복의 형이상학>이 앞으로 도래할 책에 대한 일종의 마중물이라는 것은 이해하게 된다.

그가 말하는 ‘철학적 욕망’과 ‘행복’의 관계를 직감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실재적 행복’의 보편성과 실현 가능성에 대하여 ‘손에 잡히는 또렷한 무엇’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행복의 형이상학,에 따르는 난해함 때문이기도 하겠고, 철학도가 아닌 나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철학적 용어와 논법(게다가 번역된)을 쉽게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철학적 욕망은 사유의 영역에 속하는 혁명의 욕망이며, 만족이라는 행복의 유사물과 구별되는 실재적 행복을 목적으로 삼는다. (…) 철학의 근본적인 욕망은 보편적인 것을 사유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 혁명의 욕망은 결국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창안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실재적 행복은 이러한 형식들의 향유(jouissance)와 다름없다.


- 같은 책, 1. ‘철학과 철학의 욕망’ 중에서

“철학은 반드시 그 자체의 고유한 느림을 펼치며 사유의 연속성을 회복해야 한다. (…) 이 세계와 관련해 철학에 요구되는 것은 세계의 구조나 그 법칙들의 원리 또는 그 확고함의 논리가 아니라 사건 자체를 수용하고 사유할 능력이다. (…) 주체에게 혹은 일개 개별자로서 주체 됨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그 지점은 오직 행복과 관련될 뿐이다. (같은 장)

바디우는 철학을 “바로 전달 불가능하다는 선언에 그칠 수 있을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책을 읽는 경험이 그랬다. 전달 불가능한 무언가를 전달받고 있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그것이 일종의 ‘마주침’일 텐데, 그의 말마따나 행복이 “진리와 주체의 정동”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난감한 마주침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표명될 무엇’을 경험하기로 선택한 셈이다. (이 책을 끝까지 읽기로 결심했다는 말.)

실재적 행복에 관해서 주체는 선택을 명령하는 우연한 마주침에 복종한다. (…) 모든 삶의 에피소드는 아무리 하찮거나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절대성을 경험할 계기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실재적 행복을 경험할 계기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이상 순수한 선택 앞에 전제되는 개념이나 합리적인 법칙 없이 선택을 소환한다. (…)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체념과 우월적인 수동성을 실천할 줄 아는 평범한 개인을 찬양하는데, “주체는 직접적인 삶에서 참된 삶을 얻을 수 없지만, 그가 삶에서 진정으로 ‘마주칠’ 수 있을 어떤 것은 표명”되는 까닭이다.

‘마주침’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 완전한 실재적 행복은 마주침에서 나타나며, 행복해져야 할 필연성이란 결코 실존하지 않는다. (…) 일정 정도의 절망은 실재적 행복의 조건이다. (…) 만일 네가 되도록 정해진 무엇 외에 다른 것이 되기 원한다면, 오로지 마주침을 믿으며, 네 충실성을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에 바치며, 불가능한 것의 길을 고수하라. 길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행복을 알 수 있으리니.

- 같은 책, 2. ‘행복의 시험대에 선 철학과 반철학’ 중에서

‘결론’에서 그는 책 전체에서 다룬 행복에 관한 여러 정의들을 21가지 형태로 (친절하게?) 요약하고 있는데, 정의와 정의 사이의 공간이 퍽 넓어서 21가지 요점을 읽는데도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 복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이사이 공간마다, 주장되고 반박되고 시험되고 기각되고 수용된 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향유를 위해 내게 일어나는 정동을 ‘충실히’ 따라가 보기로 한다. 바디우가 말한 ‘충실성’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사건에 충실하다는 것은 사건의 단절의 힘을 재개하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명하거나 제시하는 것이다. 보존의 원칙이 아니라 운동의 원칙이다.”

이 즈음에서 나는 앞서 적어놓은 평정심(平靜心)에 대한 나의 단상을 되짚어보게 된다. 평정심의 정(靜) 즉 고요한 상태보다는 평(平) 즉 균형을 향한 치열한 운동성에 방점을 찍고 싶다는 나의 생각이 이 ‘충실성’의 태도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 때문에.

행복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의 향유이다. (…) 완전한 실재적 행복은 하나의 충실성이다. (…) 주체가 될 능력이 있다고 밝혀진 한 개별자에게 행복은 주체의 도래이다. (…) 행복은 내재적 예외로서 나타나는 주체의 정동이다. (…) 행복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만족을 얻는 좋은 사회를 가리키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행복은 어려운 과제를 수행할 주체성이다. (…) 행복, 그것은 세계의 관점에서 불가능했던 무언가의 강력하고 창조적인 실존을 향유하는 것이다.


- 3. ‘행복해지려면 세계를 변화시켜야 하는가?’ 중에서

또렷하게 도드라지는 단어들을 추슬러본다. 새로운 삶의 형식, 주체의 도래와 정동, 마주침과 충실성, 사유와 실천, 창조와 향유 등등.


어쩌면 이 책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난제를 앞에 둔 주체에게 ‘참된 삶의 정동(즉 행복)’은 결과로써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에서 획득되는 그 무엇임을 믿기에. 행복은 (내 안에서) 언제나 새롭게 발명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라는 말에 수긍하기에.

(2017)

‘행복’은 서로 구별되는 진리 절차들에 연결된 여러 정동들을 종합하는 단어이다. (…) 정치적 행위에 관해 ‘열정(enthousiasme)’을, 과학적 발견에 관해 ‘지복(béatitude)’을, 예술적 창조에 관해 ‘즐거움(plaisir)’을, 그리고 사랑의 노고에 관해 ‘기쁨(joie)’을 말한다. (…) 완전한 행복은 무한에 대한 유한한 향유이다. (…) 완전한 행복은 어떤 의미에서 의지의 힘으로 획득된다. (…) 철학에 대한 나의 이해는 바로 전달 불가능하다는 선언에 그칠 수 있을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이다. (…) 나는 참된 삶의 정동이 있다고 믿으며, 이에 가장 단순한 이름인 ‘행복’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 이 정동은 개별자의 해방감이라는 긍정적 정서인 동시에 진리의 주체에게 공속된다. (…) 철학자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철학자는 삶의 내부에서 무엇이 참된 삶인지 알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리라는 것이다. (…) 철학,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4. '철학의 목적과 정동들' 중에서)

keyword
이전 14화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에드워드 호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