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에드워드 호퍼

마크 스트랜드의 <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방의 빛.jpg


매일 조금씩 <빈방의 빛>을 읽었다. 아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읽었다고 해야 할까. 부제는 ‘시인이 말하는 호퍼’. 미국의 계관 시인 ‘마크 스트랜드’의 눈과 입을 빌려 호퍼의 그림을 새롭게 읽는다.


세 번 감탄한다. 그림에 한번. 시인의 시선과 언어에 한번. 그리고 이 둘을 매끄럽게 엮은 역자의 열의에도 한번.


이젠 누구에게나 익숙해진 호퍼의 그림. 언제 처음으로 호퍼의 그림을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왠지 멈칫했던 순간들은 기억한다. 그 순간들을 하나의 공통된 정서로 수렴해내지는 못한 채 나는 호퍼의 그림들을 지나쳐오곤 했다. 잠시 멈췄다 지나가는 쇼윈도 밖의 행인처럼.


그런 나를 좀더 오래 붙들어두고 머무르게 한 것이 이 책이다. 그의 대표적인 그림 제목처럼(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내 모호한 느낌의 공간(=빈방)에 빛(=언어)을 주었다고나 할까.


"호퍼의 작품에서는 두 개의 상반된 명령어 -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동시에 머무르게 하는 - 가 긴장감을 자아내고, 이 긴장감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 마크 스트랜드, <빈방의 빛>, 한길사, ‘익숙하지만 소원한’ 중 16쪽


# 공간을 읽어내는 시간


“내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대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그동안 비평가들이 낳은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다”라고 시작하는 스트랜드의 머리말은 모종의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머리말의 마지막 두 문장. 모호했던 나의 느낌에 형태를 입혀줄 결정적 힌트를 발견한다.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그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다."- 마크 스트랜드


호퍼의 그림 30편에 각각 짧지만 작가 고유의 통찰을 담았다. 이 책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그림 에세이라 해야 할지, 시적 평론이라 해야 할지. 100쪽가량밖에 되지 않는 책을 일주일에 걸쳐 천천히 읽었다. 읽었다,라기보다는 이 책을 중심에 놓고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일정 반경의 생각들을 정돈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첫번째 그림은 그 유명한 <나이트호크>.

h1434p 나이트호크.jpg 나이트호크 (1942)


이 그림에서 우리는 다이너 안으로 들어간다기보다는 그 옆을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 그리고 잠시 다른 모든 것에서 우리를 고립시켰다가 이내 가던 길을 가도록 놓아준다. (…) 관객은 미처 궤도의 끝까지 가지 못하고 그 중간쯤 머물게 된다. 관객들이 다다르고자 하는 종착지처럼, 소실점은 캔버스를 벗어나 그림의 바깥쪽 어딘가, 실재하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공간에 존재한다. 다이너는 그 옆을 지나치는 게 누구든-여기서는 우리가 된다-그 여정을 방해하는 빛의 고도(孤島)다. (같은 책, 20쪽)


잠시 멈췄다 지나가는 쇼윈도 밖의 행인처럼 호퍼의 그림 앞에서 멈칫하곤 했던 나의 감정들이 희미한 형태를 부여 받기 시작한다.


내가 이상하리만큼 불안한 느낌을 받곤 했던 호퍼의 그림 속 나무와 숲에 관하여 스트랜드는 비슷한 결의 정서를 읽어낸다. 예컨대 <오전 7시>(1948)에 드러난 한 덩어리의 나무들을 “어둡고, 어지럽고, 불가해한 자연의 모습”(25쪽)으로 보는 것이라든지.


호퍼 주유소.jpg 주유소 (1940)


특히 그의 1940년작 <주유소>에 나는 좀더 오래 머무르게 된다. 이 그림은 내가 어떤 낯선 공간 - 문명의 표지를 나타내는 건물(혹은 실내)과 거친 자연(혹은 날씨 사나운 바깥)이 함께 병존하는 공간 - 에 들어설 때 느끼곤 하는 기묘한 양가 감정을 강력하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질서, 정연함, 빛이 주는 ‘안도감’과, 무질서, 야생, 어둠으로 촉발되는 ‘불안감’이 동시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안’은 구체적 대상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다. 오히려 아득한 동경과 막연한 호기심까지 포괄한다. ‘지양’과 ‘지향’이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상태랄까.


이 책이 매력적인 것은 1) 빳빳하고 질 좋은 종이에 인쇄된 호퍼의 그림을 보며 빈 공간에 나의 감상을 적어넣는 즐거움, 2) 시인의 렌즈로 들여다본 그림이 시적 통찰로 진술되고 있다는 점, 3) 나로 하여금 잠든 기억과 흥미로운 이미지를 일으켜 뭔가 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예컨대 <서클 극장>(1936)을 보고(읽고) 영화 <패터슨>이 떠오른다든가, <파도>(1939)를 보고 動과 靜에 관한 내 나름의 기하학적 다이어그램을 그려본다든가, <펜실베이니아 탄광촌>(1947)이 실린 페이지 여백에 문득 5년 전 파리 보쥬 광장에서 느낀 이상한 감정과 ‘그늘’에 대한 단상을 겹쳐 적어 놓는다든가 하는 식이다.

IMG_9610.jpg?type=w1


# 기다리는 공간 - 호퍼의 빈 공간


호퍼의 1949년작 <계단>을 보고,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의 독특한 영화 <먼 목소리, 조용한 삶>(1988)에 나오는 계단을 겹쳐 떠올리게 되고, <웨스틴 모텔>(1957)에서 황량한 창밖 풍경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단번에 헤밍웨이의 단편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의 분위기가 이러했으리라 상상하며, <모텔방>(1931)을 보고 오래 전 뉴욕의 한 기숙사 방에 도착하던 날의 복잡한 감정을 되짚어내는 것이다.


특히 가장 좋아하는(나를 머무르게 하는) 그림들 - <뉴욕극장>(1939)이나 <바다 옆의 방>(1951) 그리고 <빈방의 빛>(1963) - 을 넘길 때면 조금 더 길게 단상을 적어 놓는다.


IMG_9609.jpg?type=w1


‘호퍼의 빈 공간’이나 ‘시간을 둘러싼 질문들’ 같은 꼭지는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각각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글이지만 높은 밀도를 느끼게 한다.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이 순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한다. 내용보다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증거보다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중략)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 – 우리 자신을 자각하고 있다면 – 그림이 드러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호퍼의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건들로 채워질 장소로서의 빈 공간vacancy이 아니다. 즉 실제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닌,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그린 빈 공간이다. 그 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 어두움은 우리가 그림을 보며 생각해낸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 있다고 말해준다.


- 같은 책, ‘호퍼의 빈 공간’, 50쪽


IMG_9608.jpg?type=w1


(…) 호퍼의 그림에서는 기다림이 흔하고, 사람들은 아무런 할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배역을 상실한 등장인물처럼, 이제 기다림의 공간 속에 홀로 갇힌 존재들이다. 그들에겐 특별히 가야 할 곳도, 미래도 없다.


- 같은 책, ‘시간을 둘러싼 질문들’, 51쪽


‘시간을 둘러싼 질문들’은 매우 짧다. 페이지의 1/3만 글이 차지할 뿐. 나머지는 빈 공간이다. 아껴 읽었던 책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가 떠오른다. ‘시간을 견디는 것’과 ‘기다림’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왔기에, 그 막연한 생각을 철학적으로 풀어내 반가웠던 책.


51쪽 빈 공간에 이렇게 적어둔다.

"호퍼의 빈 공간은 ‘기다림’의 공간이다."


# 데자뷔와 자메뷔의 동시적 엇갈림


1930년작 <이른 일요일 아침>에 관한 글 중 마지막 문장 역시 여운을 남긴다.


“부동不動과 정적靜寂의 몽상적인 조화로 마술적인 순간은 길게 늘어나고, 그 앞에 선 우리는 특별히 허락된 목격자들이다.” (39쪽)


IMG_9598.jpg?type=w1 이른 일요일 아침 (1930)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 박상미는 바로 이 그림을 통해 호퍼를 처음 만났다고 쓰고 있다. 그때 받은 느낌은 “세상의 이면異面에 대한 목격”이었다고, “표현할 방법을 몰라 막연한 인상으로만 남아 있던 낯섦의 분위기가 이 그림에서 언어처럼 분명한 것으로 환생하고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데자뷔와 자메뷔(jamais-vu)의 동시적인 엇갈림”이라는 역자의 표현에 나는 밑줄을 긋는다. 적확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러나 한번도 본 적 없는 풍경. 호퍼의 그림은 낯익고도 낯선 세계가 자신의 내면에서 동시에 교차하는 느낌을 불러온다.


역자는 스트랜드가 “일상을 그리면서 일상이 벗겨진 모습을 그리는 식으로 '떠남과 머무름의 역설’이라는 렌즈를 통해 호퍼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스트랜드의 작업을 통해 “그림을 볼 때 필요한 건 미술사적인 지식과 비평적 관찰뿐만 아니라 ‘나’라는 개인의 고유한 시각과 명철한 시정으로 예술에 접근하는 태도”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고도 썼다. 맞는 말이다.


“데자뷔와 자메뷔의 동시적인 엇갈림” 같은 호퍼와 스트랜드의 동시적인 엇갈림 속에서 내가 채굴한 시각은 무엇이었나. 키워드들을 나열해본다. 익숙하고도 새롭게 다가온. 기다림, 대기상태, 실존, 빛, 그림자, 그늘, 너머, 일상, 바깥 등등.


일상적(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저 너머의 공간과 시간을 생각하게끔 하는 기묘한 힘,이 호퍼의 그림에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 일상의 공간 옆으로 나란히 병치되는 혹은 공존하는 세계(분명 ‘있음’을 감지하지만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세계)를 조용히 놓아두는 것 혹은 암시하는 것. 그 방식은 시적 은유와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또 다른(어쩌면 같은 맥락의) 문제 - 바깥을 지향하는 것. 그의 그림은 그림 바깥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깥에서 그림을 보는 우리는 누구인가. 동시에 (그림을 들여다보는) 우리를 보는 또다른 관객을 상정하게 되지는 않는가. 그림을 보는 우리 또한 그 그림의 바깥에 포함된 더 큰 그림의 프레임 안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기에 우리는 그림 안쪽을 보는 동시에 그림 바깥을 생각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 두 개 운동의 공존, 양립상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호퍼의 그림인 것 같다는 생각 – 이것이 이 책을 렌즈 삼아 흐릿한 시력을 천천히 교정해본 나의 시각이자 시정(詩情)일 것이다.


(2019.12)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