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 열풍이 불면서 그동안 글쓰기에 대한 책이 참 많이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현상이다. 글쓰기에 왕도란 없고, 그저 다독(多讀), 다상량(多想量), 다작(多作)의 간결한 공식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던 나도, 유명 작가들의 내밀한 집필 노트나 글쓰기에 대한 솔직한 심경(주로 고달픈 소회)을 밝히는 책이 적잖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인간적인 호기심이 일었다. 허황된 부류의 비법서가 아닌 다음에야 ‘작가들이 생각하는 글쓰기’라는 주제는 충분히 흥미로운 것이니까.


‘나는 왜 쓰는가’라는 물음은 ‘나는 왜 사는가’라는 철학적 물음만큼이나 거대하고 모호한 질문이다. 쓰는 것에 대한 불안이 점차 커져가던 시기에 번역가(로 더 많이 알려진 작가) 이윤기의 글쓰기에 관한 책을 접했다. 많고 많은 글쓰기 책들 중에서 유독 이 책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언젠가 번역가 이윤기에 관하여 쓰고 싶다는 메모를 남겼기 때문이다.


"언젠가 번역가 이윤기에 관하여 쓰고 싶다. 훌륭한 저작의 독서와 이해에 관한 한 그에게 빚진 바 많다. 융의 <인간과 상징>,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등 모두 그의 정치한 번역에 힘입어 깊숙이 스며들 듯 읽을 수 있었다.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은 그의 종교적, 문학적 토양을 이해하고 나면 수긍할 만하다. 어찌하여 그의 번역문이 그토록 매끄럽고 생생하며 깊이 있는지를.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 그를 비추어 생각하면 정확한 말이다." (2015-5-19)


이윤기 사후에 출간된 이 책은 생전 고인이 여러 곳에 싣고 연재한 산문들을 ‘글쓰기’라는 주제로 걸러 내어 한 데 엮은 모음집이다.


“아무래도 문자로는 안 될不立文字 것 같다. 문자로써 되게 하려면, 문자로써는 다만 건드리고 지나가기만 해야 할 것 같다. 나에게 이 세상 삶의 현상은 거대한 원어 텍스트, 내가 부리는 언어는 ‘원어를 고스란히 재생시킬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역어’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의 선조적 언어로써 원에 가까운 원융한 진리의 세계를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단지 한 점만을 건드리고 지나갈 수 있을 뿐이다."


- 이윤기,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2013), ‘글쓰기는 내 몸을 가볍게 한다’ 25p


첫 장부터 그는 번역이라는 천직과 운명에 대해 솔직히 고백한다. 직업적 소명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기쁨과 동시에, ‘원융한 진리의 세계’를 더듬어 자신의 말로 키워낸 나무를 심지 못하는, 그리하여 문학이라는 시원(始原)의 숲에 쉽게 가 닿지 못하는 애달픈 열망이 담담히 느껴진다.


‘행복한 징크스’ 덕분에 그는 행복한 번역자였다. 그리스 신화에 대해 알고자 벼르고 있으면 그리스 신화 관련 서적의 번역 의뢰가 들어오고, 기독교학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성경을 살피고자 하면 역시 그 방면 서적의 번역 의뢰가 들어오더라는 것. 고대 신화에 빠져드는 것과 때를 같이해 칼 융의 <인간과 상징>을 번역하고, 조셉 캠벨이나 벌핀치, 엘리아데, 오비디우스의 책들, 그리고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을 차례대로 번역하게 되었다 하니, 그의 말대로 ‘행복한 글 읽기, 행복한 자료 조사’를 통해 태어난 책들인 셈이다.


그가 황희 정승의 시조를 빌려 말한 대로 “술 익자 체 장수 돌아가는(돌아다니는)” 격이다. 술이 익어 이제 거르기만 하면 되는데 마침 체 장수가 체 사라고 외치는 형국이다. 얼큰하게 취할 일만 남은 그런 행복한 상황. 그런 그도 (번역이 아닌) 문학적 글쓰기에 관한 한, 암담한 심정을 숨기지 않는다.


내 문학의 마을에서는 (…) 술은 익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체 장수도 당분간은 마을로 들어올 것 같지 않다. 상황은 전혀 희망적이지 못하지만 나는 그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 내 글쓰기는 이렇듯이 암담하지만 글 읽기에 관한 한 지금 이 시각에도 술이 익어가고 체 장수는 돌아다닌다. 술 익어가고 있는 줄 알지 못하는 이들, 체 장수 외치는 소리에 가는귀먹은 이들에게 화 있으리.


- 같은 책, ‘글쓰기가 곤혹스러워서 묻는다’ 37p


무릎을 치게 만든다. ‘번역에서 이루어낸 성취’와 ‘아직도 가야 할 문학의 길’에 대한 갈망을 황희의 시조를 빌어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불과 몇 장 읽기도 전에 나는 그의 글맛에 푹 빠진다. 천천히 그의 문장들을 음미하듯 읽는다.


변역(變易)의 힘


그가 장편소설 <하늘의 문>으로 문단에 돌아오며 남긴 ‘작가의 말’은 구구절절 스며든다.


사람의 삶은 나남(나와 남을 통칭한 듯)의 삶에 간섭하면서 끊임없이 그 삶을 변화시켜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남의 삶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나는 가정합니다.


첫 번째는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형 形, transformation’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두 번째는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은 화학적, 연금술적 변화의 단계입니다. 나는 이것을 ‘변성變成, transmutation’이라고 불러보기로 합니다. 세 번째는 포도주가 그것을 마신 사람 안에서 성체가 되기도 하고 술주정이 되기도 할 때 일어나는 제3의 초물질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역變易, 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이 변역의 특징은 끊임없이 변역의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 ‘나아가기 위해 돌아보는 소설가의 작업’ - <하늘의 문> 작가의 말, 70p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내 안에서 무언가 연쇄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가 말하는 변역(變易)일까. 이제껏 ‘변화’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기껏 도달할 수 있는 개념의 범위는 ‘물리적 변화’ 아니면 ‘화학적 변화’ 아니면 ‘둘 다를 포함하는 변화’였다. 어쩌면 나는 제3의 초물질적 변화라고 그가 이르는 '변역(變易)'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역(變易)을 일으키게 만드는 힘을 지닌 글. 그 변역(變易)의 힘을 그의 글에서 읽는다.


자전(自傳)과 타전(他傳)


‘자전적 글쓰기’라는 말. 글쓰기 앞에 꼭 ‘자전적’이라는 말이 붙어야 할까. 글쓰기라는 행위가 곧 글 쓰는 이의 경험과 생각을 바깥으로 쏟아내는 작업이므로, ‘자전적’이라는 수식어는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미 글쓰기 내부에 장착된 요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수식이 붙는 것은 왜인가. 자전적 경험(개별성)을 밑바탕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쌓고 올려 그럴듯한 서사구조(보편성)를 획득해야 하는 의무와 자유가 동시에 열려 있는 곳이 바로 소설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일까.


이윤기가 어릴 적 만난 ‘세계 명작 소설 전집’과 ‘세계 위인 전기 전집’은 그에게 각각 ‘무슨 짓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장차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책이었다. ‘전기 전집’ 쪽이 좀더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던 것도 이 “전기 전집이 문학의 근원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177p)이었다.


‘전기 전집’과 관련된 기억, 그중에서도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묘사 대상의 ‘안’과 ‘밖’에 관한 문제, 즉 자전과 타전의 문제인데 (…) 문학은 전기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문학이라는 것의 본질이 결국은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녁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이녁이 쓰면 ‘오토 바이오그래피(autobiography, 자전自傳)’, 남이 쓰면 ‘바이오그래피(biography, 타전他傳)’가 되는 것이다. (…) 나는 타전과 자전을 나란히 놓고 읽는 독서 체험을 통하여 한 인간의 표리와 만나고는 한다. 나는 타전이 전설이라면 자전은 진실이라고 믿는다.


어릴 적에는 유난히 위인전 부류의 책을 읽기 싫어했던 내가, 이제는 실존했던(혹은 실존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좀더 알고 싶어 하고 유심히 들여다보길 원한다. 어린 시절 열광하며 읽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다시 접할 때에는 홈즈보다 작가 코난 도일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된다. 에밀 아자르, 라는 필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보다는 이제 ‘로맹 가리’라는 작가의 진실이 더 궁금한 것이다.


(...) 나는 한 인간이나 사건의 전설되기 프로세스에 관심이 많을 뿐, 전설 그 자체에는 흥미가 적다. 전설은 외부 의미 체계와의 영합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진실은 외부 의미 체계에 영합하기 이전에 벌써 나름의 독창적인 의미 체계를 구성한다. 내가 관심하는 것은 한 인간이나 사건이 외부와 공유하는 의미 체계가 아니라 한 인간이나 사건 자체의 주관적인 의미 체계이다. 따라서 전설이 아니라 진실이다. 내가 허구보다는 전기, 전기 중에서도 타전보다는 자전을 더 좋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개인적 경험과 소설적 허구 사이’ 중에서 180p & 182


(자전自傳이라 할 수 있는)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가 궁금하거나, 사르트르의 <말>에 끌렸던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그 모호한 이유가 정연하게 설명되는 느낌이다.


신화(myth)는 거짓말(myth), 신화는 문학


이윤기는 신화와 종교 현상에 천착한 사람이다. 그의 책들이 유독 종교와 신화에 관한 것이 많은 점도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이 시원(始原)의 샘에서 문학을 읽는 듯하다. 황지우 시인의 말을 인용한 것도 그렇다. “문학이라는 것이 본디 기도나 발원문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그것이 익을 대로 익게 되면 그 열매가 다시 종교의 뒷마당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종교는 ‘신’과 ‘제의’로 이루어지고, 제의는 ‘드로메논 dromenon’과 ‘뮈토스 mythos’로 이루어진다. ‘드로메논’은 섬김의 대상에 대한 ‘제사 행위’다. 이 드로메논 절차에서 세상이 비롯되던 때를 재현하는 절차가 ‘드라마’이다. ‘뮈토스’는 무엇인가. ‘이야기 혹은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신화 myth도 여기에서 온 말이다. 뮈토스는 섬김의 대상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여기에서 산문이나 운문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렇다. 문학이라는 것이 본디 기도나 발원문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것이 익을 대로 익게 되면 그 열매가 다시 종교의 뒷마당으로 떨어지게 될까? 황지우 시인은 ‘종교’라 했지만 나는, 신화가 고대의 종교였던 만큼 그것을 ‘신화’라고 불러보겠다. (…) 문학이 신뢰성을 회복하고, 신화가 문학성을 회복하는 것. 이 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205p)


번역이나 하는 사람, 번역까지 하는 사람


아무리 그가 한평생 문학에 경도되어왔다고 해도 그를 떠올릴 때 대표적으로 붙는 수식어는 ‘뛰어난 번역가’이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번역하는 행위’는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완벽하게 옮겨내는 작업이 아니다. ‘번역하는 행위’는 "역어라는 이름의 직선으로써 원어 텍스트라고 하는 원의 한 점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는 행위"(299p)인 것이다.


특정 단어의 어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언어 고고학 여행’을 권한다. 역어는 사전에 있는 역어가 아니다. ‘나’의 말이다. 2차 번역 행위다. 텍스트의 문장과 번역 문장의 무게를 천칭에다 얹고 달아보는 일, 3차 번역 행위다. 번역도 예술이다. (…) ‘번역이나 하는 사람’으로는 안 된다. ‘번역까지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 ‘아름다운 고고학 여행을 하듯’ 중에서 120p


내가 그의 번역문을 읽으면서 느꼈던 자연스러움은 ‘사전적 역어의 원활한 배치’가 아닌 ‘이윤기의 말’ 덕분이었을 것이다. 여기, 프랑스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의 정확한 표현이 인용된다.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 일이다.


- ‘모든 것은 번역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에서 133p


조르비스트 이윤기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의 대표 역서 중 하나이다. 어쩌면 그는 “조르바처럼, ‘조르비스트’로 살고자”(143p) 했는지도 모른다. 조르바는 곧 자유이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마지막 문구도 ‘나는 자유다’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조르바가 사업이 거덜 난 후 “중력에 저항이라도 하듯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춤을 춘 것에 대해, 카잔차키스는 그것이야말로 ‘메토이소노’라고 말했다. 카잔차키스가 지향하던 궁극적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聖化)’는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 즉 '거룩하게 되기'를 의미한다.


“보라, 조르바는 사업체 하나를 ‘춤’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이다. 나는 조르바라고 하는 위대한 자유인을 겨우 책 한 권으로 변화시켰을 뿐이다.” (155p)


이윤기는 이 ‘성화(聖化)’를 ‘삶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일찍이 ‘변역(變易)’으로 번역하여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번역은 물론 문학과 삶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이윤기의 (역시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딸 이다희 씨가 '공들여' 쓴 서문으로 시작한다. 이 산문집 제목이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로 붙여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나는 작가이며 번역가 이윤기가 언어라는 약속 체계에 들어갈 것인지, 거기서 나올 것인지, 문지방을 딛고 설 것인지 오로지 제 마음대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았다. 길을 따르지만 길에 갇히지 않는 말,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살아 펄떡이는 말에 대한 집착을 읽었다. 말에 대한 그와 같은 태도는 문학과 번역, 나아가 삶과 세상에 대한 이윤기의 철학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산문집에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 우연일 리 없다. 이윤기의 글은 땀과 자유로 범벅이 되어 있다.


- 딸 이다희 씨의 서문 ‘땀과 자유의 글쓰기’ 중에서 9p


누가 쓰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쓰고 싶어 쓰는 것이니 요즘 나의 두서없는 글쓰기는 ‘땀과 자유의 글쓰기’라 할 수 있을까. ‘책 읽기를 빙자한’ 글쓰기 행위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읽기라는 행위를 빌어 거기에 어떻게든 (틈을 벌려) 공간을 확보한 후 나 자신의 생각 조각들을 늘어놓기라도 해보려는 꼼지락거림.


읽기와 쓰기


이윤기는 (자신이 ‘선생’이라는 경칭을 유일하게 붙이는) 프랑스 작가 ‘미셀 투르니에’의 산문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미셀 투르니에)가 쓴 산문은 그가 한 사유의 끝이 아니다. 그의 사유는 텍스트에도 열려 있고 우리에게도 열려 있다. 그의 산문을 읽는 일은 그 산문의 행간에다 우리의 사유를 풀어놓는 일이다.


- ‘투르니에, 깊어가고 넓어지는 텍스트’ 128p


어쩌면 나는 이윤기 산문의 꽤 많은 행간을 빌어 내 생각을 풀어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텍스트에 기대어 나의 말을 적어보려는 하릴없는 행위. 쓰기보다는 읽기에 가깝다.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쓰기'일 텐데. 갈 길은 여전히 멀어 보인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지요, 라는 질문을 나는 자주 받는다. (…)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면 초단(初段)은 되어요, 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아 초보자의 입단(入段)은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되풀이해서 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만 하면 초단은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여느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가? 유식해 보이고 싶어서 폼 나는 어휘를 고르고,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제 생각을 비틀다 제 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 ‘껍진껍진한 입말로 글쓰기’ 중에서 83p


글쓰기에 관한 한, 적어도 초단은 되고 싶다.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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