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의 <소소한 사건들>
# 사건은 돌발적으로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작가와 같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소소한 사건들을 들여다본다. 과거의 내가 한창 말을 배우고 있었을 1970년대, 당시 ‘현재의 그’가 2015년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건다. 뭉뚱그려진 말의 덩어리에서 이제는 나만의 뾰족한 말들을 낱낱이 발라내고자 애쓰는 나에게. 바르트는 어떤 해석도 무의미하다는 듯한 말투로 무심코 일어난 일들을 무심코 건넨다. 그 말들이 현재의 내 몸 속으로 어떻게 스며들지 알 바 아니라는 듯. 그러나 간간이 반응이 궁금하다는 듯 슬쩍 눈길 한번 보내주는 그런 표정으로 말이다.
SNS나 개인 블로그에 올리는 짧은 글쓰기에 대하여 ‘회의적인 감정’과 ‘도리 없는 일’이라는 이중적인 시각 사이를 오가는 중이었다. 이게 다 뭐 하는 일이지? 싶다가도 (왜 내가 이 일을 멈추지 않는가 자문해보면) 도리 없는 일이니까,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 그러던 중에 이 ‘하릴없는’ 일에 대한 명분을 느닷없이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 방식에서 빌려오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돌발적으로’ 다가온 소소한 ‘사건(incident)’이다.
<소소한 사건>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책이다. 아니 쉽게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책 같기도 하다. "스냅사진 찍듯 써내려간 메모와 일기를 통해 현재적 글쓰기, 현재적 소설이라는 실험을 시도한다"는 압축된 소개 글을 일단 내세워야겠다. 그렇지 않다면 페이지를 넘기면서 '대체 이건 뭐지'라는 당혹감이 점차 짙어질 것이므로.
# 글로 쓴 스냅 사진: 과거-기억에서 '지금-쓰기'로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바르트가 말하는 '소소한 사건들'은 "미니 텍스트, 쪽글, 하이쿠, 약자略字의 말뜻을 갖고 노는 언어유희, 마치 나뭇잎처럼 떨어지는 모든 것"이다. 이 책은 4편의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남서부의 빛'과 '팔라스 클럽에서'라는 제목의 단문, 짧은 메모들로 이루어진 '소소한 사건들', 일기 형식을 취한 10여 편의 글 모음 '파리의 저녁들'이다.
그의 단문들, 메모, 일기 등의 글에서 깊이 있는 해석을 끄집어내려 애쓰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의 독법은 이렇다. 쓰는 자의 시공간으로 슬쩍 들어가 그의 시선이 바라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 '보는 행위'를 어떻게 저자(혹은 화자)가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는지, 사건과 사태를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접속'하고 '배치'하여 내 앞에 하나의 풍경(이미지)을 불러앉히는지 따라가보는 것.
짧은 회색 턱수염을 지극정성으로 손질하고, 손도 역시 잘 다듬은 성직자 어른 하지가, 결이 곱디 고운 천으로 지은 새하얀 젤라바(이슬람 남자들의 의상)를 예술적으로 차려 입고 새하얀 우유를 마신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 비둘기가 볼 일을 본 것인지, 티 없이 말끔한 그의 두건 위에 한 점, 살짝 통 채색.
- 롤랑 바르트, <소소한 사건들>, '소소한 사건들' 중 33쪽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저서를 읽어본 적 없는 이라면 본문에 앞서 해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사진적인 글', '글로 쓴 스냅 사진'으로 불릴 만한 이 책의 특성을 고려할 때, 책의 해설을 맡은 사진영상학과 박상우 교수의 글은 본문을 더 '납득할 만'하게 읽을 수 있는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에 관한 에세이 <밝은 방>(1980)에는 그의 유명한 용어인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 나온다. 사진이 (깊은 의미를 감추고 있는 '어두운 방camera obscura'이 아니라) 오직 표면만을 밝게 보여주는 밝은 방(camera lucida)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은 '사진적인 글', 즉 사물의 '표면성'을 강조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으로 관심을 유발할 만한 풍경(스투디움에 대입될) 속에서 찌르듯 섬세하고 강렬한 '개인적' 감응을 일으키는 인상(푼크툼에 해당될)들을 '현재의 글쓰기' 형식으로 보여준다.
# 메모와 일기
바르트는 소설의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연속적, 시간적 구조), 따라서 시간적 거리 두기를 포기하고 현재의 근접성을 선택한다. 그는 현재를 즉각적으로 기입하는 방식, 지금 자신에게 ‘돌발적으로’ 다가오는 것들(incidents)을 즉시 적어내는 자세 혹은 그날그날 ‘일기’를 적는 사람의 자세를 취한다. 그는 한 눈은 종이에, 다른 눈은 그에게 들이닥치는 현재의 사건들에 집중하면서 보는 것과 쓰는 것의 ‘동시성’을 추구한다. 이런 측면에서 글쓰기가 과거의 소설에서는 ‘기억’에 의존했다면 현재의 소설에서는 ‘적기notation’에 의지한다. 현재를 즉각적으로 적을 수 있는 글쓰기 형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르트에게 ‘짧은 메모Notation d’incidents’와 ‘일기Journal’이다. (박상우, 해설 중에서)
'이베리아' 항공사 카운터에 앉은 여직원은 웃음 짓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화장은 진하지만 메마른 느낌이고, 아주 긴 손톱에는 핏빛 같이 빨간 매니큐어를 칠했다. 오랫동안 몸에 밴 권위적 동작으로 길쭉한 항공권을 만지작거리고 접고 하는 저 손톱들... (43쪽)
# 미니 텍스트, 하이쿠, 사진
이 ‘미니 텍스트(바르트 표현)’는 짧게는 두 줄, 대부분은 다섯 줄 이내로 씌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실린 많은 이 미니 텍스트들 사이에는 시간과 이야기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일종의 ‘하이쿠’이다. 하이쿠는 바르트에게 ‘길거리의 생생한 글쓰기’의 형식이다. 그것은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을 ‘즉각적으로’ 기입하는 형식이다. “현재를 기록하는 대표적인 형식”이다. 그것은 프루스트의 ‘회상rememoration’과는 달리 현재, 즉 지금, 여기를 가리킨다. 이처럼 길거리, 즉각성, 순간성, 현재성이 특징인 하이쿠는 문학의 형태 중에 가장 사진의 속성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형식이다. (…) <소소한 사건들>은 전형적으로 ‘사진적인’ 글이다. 글로 쓴 ‘스냅 사진’이라 할 수 있다. 시제는 거의 현재형으로 씌어졌으며 묘사된 공간은 발화자의 위치(카페, 기차, 호텔 창문 등)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해설 중에서)
메디나. 저녁 여섯 시, 물건 파는 어린애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거리에서, 서글퍼 보이는 한 남자가 길가에서 딱 한 자루 남은 식칼을 사라고 권한다. (110쪽)
# 재현이 아닌 제시
<소소한 사건들>은 사진처럼 지시체를 선명하게 가리키기만 할 뿐 지시체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바르트의 핵심적인 미학 개념인 ‘중립le neutre’이 있다. 짧은 글쓰기, 하이쿠, 그리고 사진은 그의 중립 미학을 실현하는 여러 형식이다. 작가는 사물에 대해 모든 판단과 해석을 중지하고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때, 즉 사물을 '재현(présentation)'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제시(présentation)'할 때 그 사물은 역설적이게도 블랑쇼의 지적처럼 "가능한 모든 의미의 깊이를 부른다." (해설 중에서)
기호학과 신화적 의미 작용에 바탕을 둔 바르트의 글들은 철학적인 동시에 문학적이다. 그의 책 <텍스트의 즐거움>이나 <사랑의 단상>을 읽을 때에는 행간마다 멈추어 그의 사유와 나의 상념을 조응시키는 과정에서 조밀한 즐거움을 누리는 태도를 취했다면, 이 규정할 수 없는 작은 책을 읽을 때에는 현대적 산문시를 읽듯 해석의 노력을 배제하고 표면에 드러난 흐름 자체를 만끽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 현재의 소설
<파리의 저녁들>이라는 글은 일기처럼 보이지만 일기의 일부 형식을 빌려 쓴 일종의 새로운 소설에 해당한다. 이 ‘소설’은 저자가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꾸며서 이야기를 전개했다기보다는 실재를 즉각적으로 포착한 느낌을 독자에게 부여한다. 이것은 결국 1970년대 바르트가 추구한 제3형태의 소설, ‘현재의 소설’의 새로운 형태이다. (해설 중에서)
문득 ‘일시적 공사중단’처럼 끝나지 않은 나의 글들이 생각난다. 스치는 하나의 생각에서 기세 좋게 써 내려가다 마무리되지 않은 잡문들, 단어 하나 혹은 문장 한 줄에서 끊겨버린 글의 부스러기들, 초록 인덱스를 붙여놓고 ‘아이디어’로만 분류해놓은 무수한 메모들 말이다. 여기엔 모종의 강박관념이 묻어난다. 아무리 짧은 단문이라 할지라도 주제를 중심으로 각 구성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간결하게나마 체계적 단계를 거쳐 또렷한 메시지를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등등.
그런 점에서 바르트식 '현재의 소설'은 묘한 위안을 준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체 없이 바로 적어내고자 하는 ‘즉시성’에 대한 나의 강박관념, 혹은 크로키(croquis)의 완성도에 대한 나의 소심한 회의에 오히려 격려와 정당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개연성은 물론 핍진성과 의미 작용에 대한 집착 때문에 불필요한 잉여 문장들을 덧대지 말 것을 조언하면서 말이다.
쪽지 글, 하이쿠, 일기, 그리고 사진은 1970년대(그의 생애 말년 10년 정도) 바르트의 모든 미학적 사유의 기초이다. 글쓰기의 순간성, 현재성, 재현의 죽음과 제시의 강조, 언어의 죽음과 지시체 강조, 텍스트와 사진의 지시로의 환원, 의미의 부재, 사물의 강조 등. 이런 측면에서 바르트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反문학적, 반언어적, 반재현적, 반예술적이다. 그는 문학에서 ‘과거’와 ‘재현’이라는 불투명한 덮개를 열어 제치고 ‘현재’와 ‘실재’를 온몸으로 품고자 했던 또 다른 종류의 리얼리스트이지 않았을까. (해설 중에서)
# 소설의 편린들, 소설적 이미지들
책의 두 번째 글이자 이 책의 타이틀이기도 한 ‘소소한 사건들’을 다시 읽어본다. 해설자의 말마따나 ‘문화적으로 혹은 교양으로 쉽게 해석되지 않는 애매한 일들’로 구성된 미니 텍스트들을 조금 다른 각도로 그리고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때때로 내가 과거에 품었던 유사한 장면들(묘사에 매달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그러나 순간적 충동으로 빠르게 적어놓았던, 그러나 당시의 ‘현재성’을 잃고 나면 시들해져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고 멈추어버린 그런 장면들)과 조우할 때에는 데자뷔처럼 깜짝 놀라거나 은근히 공감하는 재미를 누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 지점에서 촉발된 글쓰기 충동을 즉흥적으로 실천한다면 또다른 ‘현재의 소설'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누보 로망을 떠올린다. 대학 시절 읽었던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이나 우리나라 소설인 <경마장 가는 길>도. 순간의 풍경을 포착하려는 치밀한 묘사가 한 편의 소묘처럼 다가왔던 소설들. 무수한 소묘들이 조각처럼 이어져 전통적 줄거리를 탈피한 뜻밖의 소설로 드러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던 기억. “소설적인 것,이란 본질상 조각들이다”라고 말한 편집자의 말도 겹쳐 와 닿는다. 바르트가 모로코 등지에서 쓰고 엮은 ‘소소한 사건들’은 다음과 같은 편집자 프랑수아 발F.W.의 말 그대로이다.
이 글은 일종의 ‘유희’이다. (…) 텍스트 속에서 어떤 해석 같은 것은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이며, 그런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은 당장 떨쳐내야 할 오해다. (…) 의떤 의도 하에 구성된 캐릭터나 개성 같은 것은 이 글에서 모조리 배제되었다. 즉 개개인이라는 받침대가 없는, 소설의 편린들뿐인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는 연달아 이어지는 이야기 구성도 일절 배제되었는데,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이야기에는 불가피하게 ‘메시지’가 강요될 터이다.
편린들이 주는 예상치 못한 ‘소설적’ 이미지들에 대해 나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래서 (당장에 쓸모없어 보이는) 그 편린들을 어떻게든 잊지 않고 적어두려 애써왔던가. 하치장에 부려놓은 적재물처럼 하릴없이 쌓인 내 글의 편린들을 미완성 부스러기로 볼 것이 아니라 좀더 떳떳하게 ‘개별적인’ 조각들로 바라보아도 괜찮은 걸까. 조각보를 이으려면 조각들이 필요한 것처럼. 나는 여전히 기이하고 쓸데없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소설을 쓸 수 없는 이가 ‘소설적 이미지’에 오랫동안 경도되어 끌어모은 말과 글의 조각들. 그 결과물 자체가 ‘현재의 소설’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 이 짧고 (어찌 보면) 허무한 책 한 권을 내 맘대로 읽고 나서 얻은 결론이요 희망이다.
# 글쓰기라는 실천
바르트는 독자에게 저자와 그리고 아주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쓰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가 될 것'을 제안한다.
나는 무언가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 있지, 더 이상 무언가에 '관해'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 있지 않다. 즉 나는 하나의 산물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생산을 떠맡는다. 나는 담론에 대한 담론을 철폐한다. 세상은 이제 내게 하나의 대상의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의 형태로, 즉 실천의 형태로 다가온다. 나는 또 다른 유형의 앎(즉 '애호가'의 앎)으로 넘어간다...
- Roland Barthes, <Le Bruissement de la Langue>, Paris, Seuil, 1984, p.325
(201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