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흐라발,이라는 고독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K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타이베이로 거처를 옮긴 지 1년이 조금 넘도록 그녀와 아무 연락도 주고받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 역시 프라하로 이미 돌아갔는지 모른다.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밀린 안부를 빌미 삼아 보후밀 흐라발이라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최근 뜻하지 않게 내게 선뜻한 충격을 선사한 이 놀라운 체코 작가를 핑계로 그녀에게 연락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둘을 이어주는 고리라고는 '체코'라는 막연한 국가 개념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이 어설픈 동기라도 부여잡으려는 심산은 무엇일까.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 그 욕구를 적극적 행위로 전환하고자 하는 의지. 비가시적 계기를 가시적 실천으로 끌어내려는 꼼지락거림. 내면의 미세한 진동을 언어의 형상으로 외면화하고픈 하릴없는 욕망.




130여 쪽에 불과한 이 얇디 얇은 책은 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마력을 발휘한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문학동네, 10p


내가 그랬다. 천천히 녹여 먹고 싶은 단단한 사탕과도 같은 그의 문장들이 나로 하여금 멈추어 음미하게끔 했다. 문장 자체의 딴딴한 농도를 알아채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 문장을 매개로 반추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이 스멀스멀 날아드는 것을 보는 즐거움까지. 마치 화자의 폐지 압축기 속에서 변용(變容)되어 나오는 육면체 꾸러미처럼 문장들은 응축되어 농밀하다.


# 대기의 순환


진정한 책에 내 눈길이 멎어 거기 인쇄된 단어들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대기 속에서 파닥이다 대기 중에 내려앉는 비물질적인 사고들뿐이다. 대기에서 자양분을 얻고 다시 대기로 돌아가는 사고들. 면병(麵餠) 속에 있으면서도 없는 성혈(聖血)처럼 만사는 결국 공기에 불과하니까. 삼십오 년째 나는 책과 폐지를 꾸려왔고,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서 살고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그보다 더 큰 슬픔이 담긴 생각과 이미지를 머릿속에 차근차근 쌓아가는 습관과 광기가 항시 존재해온 유서 깊은 왕국에 나는 거주한다. 이제 그 모두가 내 안에서 되풀이된다. (1장, 11p)


비물질적인 사고들, 언어에 기댄 그 비가시적 존재들이 한없이 가볍고도 거대한 몸피를 이리저리 꾸려 대기처럼 끊임없이 순환 반복하는 이미지를 머리 속에 떠올려본다. 그 모든 것은 하나의 개별자 안에서 되풀이되고, 그 반복 속에 거주하는 ‘나’라는 차이는 다시 대기 중에 내려앉을 운명이다. 차이와 반복.


# 술과 고독


삼십오 년째 나는 내 압축기의 붉은색 버튼과 녹색 버튼을 누르고 있지만, 삼십오 년째 수리터들이 맥주를 마셔온 것도 사실이다. (…) 사고의 흐름을 돕고 텍스트의 심부까지 더 잘 파고들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독서는 기분 전환이나 소일거리가 아님은 물론, 쉽게 잠들기 위한 방편은 더더욱 아니다.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 사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독서로 인해 영원히 내 잠을 방해받고 독서로 인해 섬망증(譫忘症)에 걸리기 위해서다. (…) 내 손 밑에서,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12p)


한때 (치기 어린 시절) 내 안에서 무언가를 뽑아내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밖으로 드러난 적 없는 내 안의 말, 갈피를 못 잡고 첩첩이 겹쳐 소용돌이 치는 말을 순수하게 꺼내기 위해서는 팽팽한 자의식의 그물을 느슨하게 풀어주어야 한다는 나름의 정당성. ‘사고의 흐름을 돕고 텍스트의 심부까지 더 잘 파고들기 위해서’라는 말은 당시 내가 가졌던 생각을 소환한다. ‘(자의식이 어느 정도 제거된) 생각의 흐름을 분방하게 놓아두고 (내 몸 속) 내장(內藏) 텍스트의 심부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는 까닭과 조응하며.


# 실존주의자 한탸


한탸는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35년 동안 폐지 압축기를 통해 ‘작업’해왔다. 이 ‘작업’은 단순한 폐지 압축 처리가 아니다. 그는 독특한 콜렉터이자, 자신만의 독서 의식을 행하는 종교인이자, 산더미 같은 폐지를 응축하여 자신의 영혼 한 자락을 부여한 꾸러미(혹은 예술작품)로 탈바꿈시키는 예술가이다. ‘폐지를 성물聖物로 변화시키는’ 화자의 헌신적 작업은 순수한 예술 행위를 넘어 엄숙한 종교 제의마저 연상케 한다. 그는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을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이 매일의 형(刑)을 치르며 현존하는 실존주의자이기도 하다.


35년째 압축기로 폐지를 압축해온 한탸의 소망은 소박하다. 5년 후 기계와 함께 은퇴하는 것, 저금해온 돈으로 그 압축기를 회사로부터 사들여 집으로 가져와 하루에 한 꾸러미씩만 꾸리는 것. 매 순간 영감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것. 긴긴 명상을 거쳐 완성한 부끄럽지 않은 꾸러미. 최종적인 압착이 있기 전 그 안에 반짝이 가루와 색종이 가루를 뿌려 아름다움이 창조되는 순간을 만끽하는 것.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꾸러미를 만들어 일 년 뒤에는 정원에서 전시를 여는 것.


작업을 하면서 어쩌다 읽게 된 책들, 그 안에 든 사고의 기름으로 내가 날마다 영원한 야등을 밝히는 책들을 이제 집으로 가져간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17p)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각자 한마디씩 남기게끔 되어 있었다. 나는 니체의 이름은 알았으나 그의 저서를 읽어보지는 못했고, 사촌 오빠로부터 물려받은 동서문화사의 세계문학사상전집 중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 제목에 속수무책 끌렸으나 왜 끌리는지 그리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한마디를 정성껏 골라 졸업 앨범에 남겨 놓는 허영을 부렸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긴 꼬리를 남기며 희미한 수수께끼처럼 떨어지는 별똥별 같았기에.

“그대들이 이상적인 것을 보는 곳에서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본다”는 니체의 말을 이해하는(적어도 알아 듣는) 데까지 약 20년의 세월이 걸릴 줄 그땐 미처 몰랐어도.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1장, 12p)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말은 각 장을 걸쳐 여러 차례 반복된다. 책을 통틀어 그 어떤 거창한 이상도 거룩한 신화도 위대한 이념도 발견할 수 없다. 미화도, 신비화도 없다. 한탸의 기억을 통해 드문드문 드러나는 생의 단면들은 무심한 농담처럼 불쑥 튀어나와 그 모든 아름다운 이상(理想)에 대한 기대를 보란 듯이 깔아뭉갠다. 바로 이것이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블랙 유머와 희비극,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경계 없는 페이소스가 책 전체에 진득하게 묻어 나온다.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대목 중 하나.


그러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외삼촌은 무밭에서 김을 매다가 문득 떠올렸다. 누이는, 그러니까 내 엄마는, 무라면 사족을 못 썼다는 것을. 그는 통조림 따개로 유골함을 연 후 무밭에 엄마의 재를 뿌렸고, 나중에 우리는 그 무를 맛있게 먹었다. (2장, 25p)


#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vs.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대장간 풀무가 그렇고,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 내 직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나선과 원이 상응하고,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 뒤섞인다. 그 모두를 나는 강렬하게 체험한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70p)

* progressus ad futurm. ‘미래로의 전진’이라는 뜻.

** regressus ad originem. ‘근원으로의 후퇴’라는 뜻.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은 폐지 압축공 한탸의 여정은 뜻하지 않은(그러나 예정되었을지 모를) 전환점을 맞는다. 자신의 압축기에 종이를 넣어 짓누르는 것이 폐지를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어왔던 그에게 부브니의 거대한 수압 압축기 한 대는 산업혁명 시대 증기기관차의 발명만큼이나 충격적이다. 이 괴물 같은 압축기는 ‘수공업자’나 다름 없던 한탸에게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예언과도 같다. 젊고 쾌활한 청년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이 밝은 색 유니폼을 갖춰 입고 우유와 콜라를 마시며 어마어마한 양의 폐지들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것을 보며 한탸는 모욕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이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6장 89p)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서적의 책등과 표지를 발견하는 그 놀라운 순간이 언제나 축제나 다름없었”던 한탸에게 부브니의 거대 압축기는 “일감에 매달려 혼신의 힘으로 맞붙었던 시절이 완전히 끝이 나고 만 것”임을 직감하게 해준다. 이제 그는 실존적 위기에 처한다.


부브니에서는 그렇게 비인간적인 일을 해치우고 있었다. (…) 카뮈 양반이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 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그러나 부브니의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은 일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괴테도, 불멸의 고대 그리스도 모르는 그들은 (…) 불안에 곤두선 책장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 안에 숨겨진 가치 따위엔 전혀 아랑곳없이 냉정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고, 이런 일들은 내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94p)


그는 자신이 자신의 작은 압축기보다 더 미미한 존재임을 비통하게 자각한다. 그리고 텍스트의 심부를 파고들기 위해 마셨던 맥주 대신 (생산성 향상을 위한 에너지원으로써) 1리터들이 우유를 마셔가며 현대 노동의 소외에 동참한다. 이것은 ‘미래로의 후퇴(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인가?


나는 익명의 꾸러미들을 미친 듯이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다. 예술과 창조, 미의 창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 그렇게 나는 우유를 병째 들이마시며 일했다. 부브니 사람들처럼 무심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100p)


# 우리들의 초상


압축기로 책들을 압축하노라면, 덜컹대는 고철의 소음 속에서, 인간의 뼛조각 소리가 들리곤 했다. 마치 고전 작품들의 뼈와 해골을 압축기에 넣고 갈아댄다고나 할까. 탈무드의 구절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26p)


이 책은 다양한 은유와 상징, 알레고리를 담고 있는 철학 소설로 읽힌다. 한탸처럼 지하 세계에서 일하는 동료들에 대한 언급은 절묘하다. 고등교육을 받은 그의 친구들은 하수구 청소부들이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두 사람은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 대한 책을 쓴다”(36p)라거나, “쥐들이 지체 없이 두 개의 무리, 두 개의 종족, 두 개의 조직화된 사회로 나뉘어 싸웠던 것”이라든가,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37p)라는 문장들 너머에서 우리는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추락한 천사들이 각자의 지하실에서 일하고 있다. 전투에서 패한 교양인들이다. 한 번도 이 전투에 가담한 적이 없지만 세상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다.(39p)


밝은 이상을 바라보며 걷지만 어두운 현실에 발을 철벅이며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그게 어디 한탸와 그의 동료들만의 초상일까. 그러나 실존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활기가 있다. 어둡게 빛나는 활기.


# 끝과 시작 - 근원으로 돌아가다


부브니의 거대 압축기로 인해 전환된 그의 ‘비인간적’ 작업 즉 ‘미래로의 후퇴(리그레수스 아드 프투룸regressus ad futurum)’는 다시 뜻밖의 반전을 맞는다. 그는 ‘근원으로의 전진(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살아내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그것들(내 압축기와 내 지하실과 내 책들)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한탸는 (늘 난데없이 등장하는) 철학 교수의 수수께끼 같은 말 “더 잘 찾아보라” 그리고 “또 다른 기회를, 다른 데서”라는 말을 듣게 된다.


결국 한탸는 그의 압축기 버튼처럼 전진과 후퇴를 오가다 (8장에 이르러) 양극간의 상통(相通)과 예정된 순환을 짐작한다. 전진이 곧 후퇴이고, 후퇴는 곧 전진을 준비한다. 근원으로 후퇴하는(돌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미래로의 전진을 의미한다. 끝과 시작은 이어져 있다.


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 그래,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은 같은 말이야. 너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 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지. (8장 119p)


너무 시끄러운 고독


한탸의 고독 속에는 조밀한 생각과 현실과 환영들이 시끌벅적 거주한다.


(…)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9p)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다가온다.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한 이유는 뭘까?”라고 질문하며. 그는 이제 자신의 지하실, 자신의 압축기 안에서 종말을 맞기로 한다.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가기 위해서. 손목의 동맥을 끊기 위해 욕조에 들어가는 세네카처럼 그는 자신의 압축통 안에 몸을 넣고 녹색 버튼을 누른다. 입술엔 지복(至福)의 미소를 띄운 채.


# 보후밀 흐라발,이라는 고독


저자가 자신의 책들 중 가장 사랑하는 책이었다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 (130여 쪽에 불과한) 이 압축된 꾸러미가 이토록 길게 나를 붙잡아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소리 없는 ‘시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고독의 경이로움. 존재와 세계를 압축하는 그 놀랍고도 매혹적인 기록.


폐지 더미 속에서 찾아낸 빛나는 책들을 발견할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사탕처럼 쪼아먹는 한탸의 모습에서, 내게 유독 반짝이며 다가오는 책들을 오래도록 만지작거리며 홀짝이는 나의 모습을 언뜻 보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삶의 존엄을 위한 한탸의 마지막 결정에서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이나 <자기 결정>을 겹쳐 읽게 되는 것도, 부조리한 세계에서 자기 존엄을 지켜내려는 결연한 자기 결정의 힘을 떨쳐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나는 지금 K에게 편지를 쓴다. 당신 나라 체코의 한 작가와 그 작품이 너무나 시끄러워서 나는 못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쓴다고. 최근 몇 년간 읽은 책들 중 가히 최고의 책으로 꼽고 싶다고.


(20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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