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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위나 Oct 27. 2022

대단하지 않지만 동네한의원입니다

황혼육아의 명암




"따릉"

마감시간이 다 될 무렵 문을 여는 종소리가 들렸다.

60대 중후반 정도의 여자분이 다리 한쪽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끝날 시간인데 미안해요. 어젯밤에 다리를 삐끗했는데 오늘 너무 아파서..."

접수를 하고 치료실로 향하는 환자의 거동이 심상치가 않다. 저 정도의 통증이면 필시 인대 문제 이상일 수도 있다.

발목 검사를 몇 가지 한 후 골절의 의심은 사라졌으나 침을 놓는 동안 몇 마디를 나눈 후 발목의 악화 요인을 알게 되었다.

하루 전날 밤, 아파트 마당을 걷다가 발목을 삐끗한 후 크게 통증은 나지 않았고 다음날 즉 오늘 외손주를 돌봐야 할 일이 생겨서 급하게 딸네로 가서 하루 종일 손주를 돌봤다고 한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코로나에 확진이 되어 외손주는 어린이집을 가지 못하고 집에 있어야 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장에 다니는 딸은 휴가를 낼 수가 없어서 급하게 친정어머니한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날 무심히 삐끗한 발목은 하루 종일 무리한 탓에 부종과 통증이 심해졌고 딸이 퇴근하고 돌아온 뒤에 부랴부랴 한의원을 찾아오신 것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치료가 오래 걸릴 수가 있으니 열심히 나오셔서 치료받으세요. 되도록 발은 쓰지 마시고요. 내일도 나오셔야 해요"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

손주를 봐주러 가셔야 한다는 말씀이다.

치료를 마치고 돌아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온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네, 다시 왔습니다."

7년 전 중풍으로 한쪽 거동이 불편한 남편과 그를 돌보는 아내이다. 70대 초반과 60대 후반이니 처음 내원할 때만 해도 60대 중반과 초반이었을 것이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될 무렵부터 여름이 시작되기 전까지,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두 부부는 한의원에 찾아온다.

"나도 어깨 치료를 받아야겠어요. 팔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좀 아프네."

가끔 드물게 허리를 치료를 받던 아내는 올봄부터 어깨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다.

 문득 한동안 손녀를 업고 내원하시던 게 생각이 난다. 3,4살 정도 되는 손녀는 한의원 소파에 앉아 할머니와 동화책을 읽거나 대기실을 조심조심 걸어 다니곤 했다. 얼마 후 손녀는 어린이집에 가게 되어 한의원에 오는 일은 없었다. 그 뒤에도 어김없이 부부는 계절이 바뀌면 오셨다가 발길을 잠시 끊었다가 하면서 한 해 한 해 늘어가는 세월의 뒤안길을 걸었다.

 "이제 아픈 팔은 좀 아끼시고 다른 팔로 천천히 써보세요. 그 사이 치료되면 양팔을 함께 써보시고요."

 "나도 그래 보려고 하는데 맘처럼 쉽지 않아. 답답해서 아픈 팔로 참고 쓰게 되더라고."

 "조금 천천히 하신다 생각하세요. 아픈 팔을 쓰면서 치료하면 치료 기간이 오래 걸려요"

 "저 양반 수발들다가 이렇게 됐어. 저 양반 한쪽 팔 행세를 이 팔로 다 했으니.."

 한 칸 건너 누워계시는 남편분이 들으면 맘 상할까 싶어 나는 얼른 치료를 끝내고 나온다.



 




나의 시어머니는 손주가 8명이었다.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이제 어머니는 더 이상 안계시기 때문이다.

어머니댁은 늘 어린 손주들로 붐볐다. 며느리와 딸들이 출산을 하면 산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산후조리가 끝나도 손주들을 늘 안고 얼르고 하셨다. 며느리와 딸들이 일을 나가면 손주들을 데리고 어린이집과 학원을 오가셨다. 손주들이 커서 각자 학교를 다녀도 주말마다 할머니 댁으로 모여들었다. 할머니는 부모 이상이었고 할머니는 손주들을 끔직이도 아꼈다.

할머니는 어느 날부터인가 당뇨를 앓으셨고 언제인가부터 암수술과 항암치료를 하셔야 했다. 초등생부터 대학생까지의 손주들은 주말마다 누워계시는 할머니를 찾아왔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손주들은 떠나지 않았다.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의 육아로 성장한 나는 시어머니의 육아가 당연한 것처럼 느꼈고, 시어머니의 황혼육아는 자손들과의 화목과 행복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혼육아로 인해 몸의 건강상에 이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양가감정이 생겨난다.

본인의 몸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시는 모습(발이 다쳤는데 하루 종일 참고 손주를 돌보거나, 중풍 남편을 돌보면서 손주를 봐야 했던..)을 보게 되면서 나의 시어머니를 떠올린다. 인생의 후반기를 손주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돌보는 기쁨으로 살다 가신 시어머니.. 무한한 사랑과 희생은 과연 본인을 위한 진정한 행복이었을까..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둘째가 9살일 때 출산한 막내 딸아이는 두 돌 때까지 내가 돌보았다. 이후 아파트 1층에 있는 어린이집에 보냈고, 저녁 5시에 시부모님이 데리고 올라오신 후 내가 7시에 퇴근할 때까지 함께 계셨다. 물론 위에 두 사내아이들과 함께..  유치원까지 그렇게 지냈고, 학교에 입학 후 4,5교시가 끝난 후 오후는 교내 돌봄 교실에서 지냈다. 엄마를 무척이나 목말라했던 딸아이는 우려와는 다르게 커갈수록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랐다. 가정과 보육기관, 교육기관에서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고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엄마 아빠의 육아휴직 의무화와 믿고 맡길 수 있는 보육, 교육기관, 돌봄 지원의 수준 높고 체계적인 시스템이야말로 지금의 마을 전체가 아이를 키우는 현실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전적으로 시부모님한테 의지했던 첫째 둘째와는 다르게 막내 딸아이는 연로하신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려 애를 썼던 것 같다. 그것이 어린이집, 유치원, 돌봄 교실의 종일반이었다. 당시 나와 딸아이가 운이 좋아서 혜택을 받았지만 지금은 더 확대된 체계(아이 돌봄 지원사업 등) 속에 지속적인 수준 향상이 이루어진다면 황혼육아의 어두운 터널은 밝은 야외 소풍로 탈바꿈되지 않을까.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을 하시잖아요. 손주가 아주 잘 자라고 금방 클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시간 내셔서 치료 열심히 받으시고 틈틈이 쉬시고 취미도 하시고 그러세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들을 돌보다가 아픔을 얻으신 황혼육아의 어르신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의 말은 이것뿐이다.

 황혼육아를 할 때 중요한 건 당사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관리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돌봄이 필요한 시기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노년의 건강지킴의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다. 주변의 관심과 배려로 행복한 육아와 건강한 노년을 지키고 나아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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