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는 보통 힘들지 않다. 씻는 것을 귀찮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지 머리 말리는 것이 귀찮아서다. 특별히 많지도 않은 머리숱이지만 머리 말리는 그 시간이 왜 이리 길게만 느껴지는지, 이젠 다 말랐겠지, 생각하고 드라이기를 끄고 머리를 만지면 어김없이 물기가 남아있다.
드라이기가 문제인가 싶어 50만 원이 넘는 드라이기도 사봤다. 바람이 세서 처음엔 좀 빨리 마르는가 싶기도 했지만 몇 달 지나니 원래 쓰던 5만 원짜리와 큰 차이가 없는 듯도 하다. 사람이 살면서 머리 말리는 시간만 합쳐 다른 데 쓰면 큰 일 하나 했겠지 싶다. 첨단 과학이 난무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자동으로 머리를 말려주는 기계 하나 없다니 믿어지질 않는다.
오늘은 저녁 조깅을 마치고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화장대에 앉았다. 조깅을 너무 길게 한 탓일까, 샤워를 했음에도 여전히 더워 도무지 더운 바람으로 머리를 말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시간이 두 배는 걸릴 것을 알면서도 일단 찬 바람으로 드라이를 시작했다.
몸이 힘들어서 그랬는지 그저 하염없이 드라이를 쐬며 앉아 있었다. 머리가 마르든 말든 그저 멍하게 있었다. 머리가 이쪽, 저쪽으로 바람을 타고 제멋대로 휘날리는 것을 하나하나 지켜봤다. 드라이기를 앞으로도 했다가, 뒤로도 했다가, 빙 돌려봤다가, 머리를 초사이어인으로도 만들어봤다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게 앉아있으니 문득 편안해졌다. 왜 그동안 찬바람으로 머리 말릴 여유도 없이 가장 뜨거운 3단 바람으로 후다닥 거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 머리 말리던 자세와 달리 어깨가 축 늘어진 채였다. 간신히 드라이기 하나 손에 들고 거울을 바라봤다.
바쁘게 사는 게 습관이 된 걸까?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을 아예 빼지 못하게 되어버린 걸까? 기껏해야 머리 말리는 데 5분 더 걸리는 걸 왜 못하고 살았을까? 뭐가 그리 급해 매번 머리 말리는 걸 숙제처럼 해냈을까? 그렇게 싫고 귀찮았으면 그냥 머리가 젖은 채로 놔두면 되지 않았을까?
별 거 아닌 습관인데 가끔 이렇게 습관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외면하고 있던, 싫지만 못 본 채 하던 내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 습관이 짜증스러울 때가 있다. 머리 말리는 시간이 길어지니 별 생각이 다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