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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May 13. 2023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그 사이로 노란 산수유꽃 향이 하늘거리는 나른한 오후.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리운 누군가의 얼굴. 나 없이 잘 지내나 싶기도 하고, 대화가 잘 풀린다면 한 번 얼굴이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레 카톡을 보내본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뜯으며 한참을 보내고, 마침내 “잘 지내고 있어?”라는 말풍선 옆 숫자 1이 없어지고, 잠시 후 서로의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말풍선이 불쑥 나타난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이 얼마나 설레는 도입부란 말인가? 그도 봄볕 속에서 내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던 걸까? 먼저 연락할까 했는데 쑥스럽고 민망해 망설이고 있었던 걸까? 얼굴을 마주한 지 조금 지났지만, 각자의 정신없는 일상을 지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음에 마음이 달뜬다. 먼저 연락한 게 안달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려나,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참을걸, 희미하게 번지는 웃음 속에서 짧은 후회도 해 본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말,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소중한 사람이 나를 잊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는 말. 그런데 나에겐 상대방의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오게 하는 숨겨진 비법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공식적인 통계이긴 하지만 성공률은 무려 70%에 육박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고 빠르게 따라 할 수 있는 방법이니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다면 찬찬히 읽어보시길. 


아무래도 자기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름만 대면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아는 대기업의 11년 차 직장인이다. 매달 25일이면 어김없이 수백만 원의 월급이 들어오고, 회사 실적이 좋은 시기에는 가끔 성과급도 기대하곤 한다. 얼마나 회사가 유명하냐면, 회사의 성과를 투자자들에게 공개하는 시점에는 온 직원의 평균 급여가 낱낱이 까발려지고, 성과급이 많이 나오는 달은 온갖 미디어에 “00, 전 직원에게 000% 파격 성과급 지급”, “00 노조, 000% 보상에도 더 달라고 생떼” 따위의 헤드라인이 등장하곤 하니, 이 정도면 온 국민이 내 수입에 대해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어쨌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굉장히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 있으며, 그 수입은 내가 원치 않았지만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굉장히 큰 부작용이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 부작용이란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주변 사람들의 접근성 좋은 ‘제4 금융권’이 된다는 점이다. 제4 금융권은 언제나 인기 만점이다. 제도권의 금융이 요구하는 깐깐한 심사도, 수 십장의 서류 작성도, 대리점 방문도 필요 없는, 오직 친분만 가지고 대출이 가능한 원스톱 비대면 사채! 앞서 말했듯 온 국민이 내가 얼마를 버는지 대충 알고 있는 상황이니 돈이 없다고 둘러대기도 힘든 상황. 때문에 매달 25일 즈음해서 오랜만에 오는 연락은 심상치 않은 경우가 많다. “카톡”하고 울리는 휴대폰에서 카톡을 바로 열어보지 않고 팝업만 슬쩍 곁눈질하는 경우가 많아진달까? 쓱 봤는데 한 1년 연락 안 한 친구가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로 시작하는 카톡을 날렸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직장인이 아니다? 촉이 온다. 이건 100% 돈 이야기다.


“야, 딱 20만 원만 빌려줘. 다음 달에 알바비 타면 바로 갚을게.” 


10여 년 전, 갓 취업한 시절에는 친구들의 유흥비를 변제해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액수는 크게 부담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건을 사서 납품해야 사업이 흘러가는데 돈이 공교롭게 딱 막혔네. 이번에 물건 사는 것만 도와주면 다음 달에 대금 받아서 바로 줄게.”


요즘은 주변에 사업하는 친구들이 많아져서일까 그 액수도 빈도도 눈에 띄게 늘었다. 백만 원 단위는 기본이요, 가끔은 ‘0’이 하나 더 붙은 액수를 요청하기도 한다. 연봉이 늘어나는 속도에 비해 고객들의 요구가 훨씬 빠르게 늘어나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그렇게 큰돈을 떼인 경험은 없다.


나는 지극히 보통 사람인지라 기꺼운 마음으로 돈을 빌려준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자존심 세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친구들이 오죽하면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할까 싶은 마음에 거의 대부분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음, 아마 내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 호구인가 보다. 보통 호구들은 일단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경향이 있다. 미용실에서 망한 머리를 보고도 헤어 디자이너에게 “괜찮네요.”라는 말밖에 못 하는 우리 호구들은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에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부탁하는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알았다고 한 뒤, 그때부터 내면의 합리화를 시작하곤 한다. 일종의 방어 기제랄까? “그저 잠깐 경기가 어려워서 그렇겠지.”(경기가 어렵지 않은 때는 없다.), “이번이 마지막이겠지.”(한 번 빌려본 놈이 계속 빌린다.), “돈 들어오면 내 돈부터 갚겠지.”(내 앞에 돈 받을 사람들 줄 서있다.) 등 호구는 정해놓은 결론을 정당화하는 긍정적인 생각들로 마음을 치유한다. 10여 년이 넘은 호구 커리어에서 나오는 치유력은 보통 강력한 게 아니다. 합리화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속 나는 ‘우정’이라는 세상 소중한 가치의 수호자가 되어있다. 훗, 감히 돈 따위로 내 우정을 시험하려 들다니. 


지금까지도 충분히 안타깝게 느끼셨겠지만, 이제부터 조금 더 안타까운 이야기다. 


일단 돈을 빌려간 친구는 돈을 갚기 전까지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딱 한 번. 돈을 더 빌려달라고 연락한 경우는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변제 기한을 넘기면,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연락도 하기 힘든가 보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내가 먼저 연락하는 건 또 좀 그런 것이, 마치 돈 내놓으라고 독촉하는 빚쟁이 느낌이라서다. 나는 그저 친구가 잘 사는지, 얼마 전에 애기 생일이었던데 잔치는 잘했는지, 새로 이사 간 집은 어떤지, 묻고 싶은 것이 쌓였는데도 그런 마음에 연락을 미룬다. 약속한 변제 시점 이후로부터 돈을 갚는 순간까지, 친구 관계는 잠정 휴업이다. 그저 돈을 빌려줬을 뿐인데, 그거 말고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친구 하나를 잃는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참다 참다 조심스레 먼저 연락을 해본다. 내가 먼저 안 하면 말 없는 이 관계가 영원할 것 같아서다. 정말 아무 의도 없이 그냥 딱 소주 한 잔 하자는 거다. 연락을 취할 때는 일부러 아주 가볍고 유쾌한 인사를 던져야 한다. 심각한 낌새를 조금이라도 눈치챈다면 상대방은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웅덩이 물을 할짝이는 야생 임팔라처럼 후다닥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 


“헤이~잘 지내고 있어? ;)”


그러고 나서 짧게는 1분, 길게는 두어 시간의 초조하고 긴장되는 침묵의 시간을 지나고 나면 저 위에서 말했던 설레는 첫마디를 약 70% 확률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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