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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May 04. 2023

아무래도 아이가 불로소득의 맛을 알아버린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있어 부모가 가르쳐야 하는 항목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다. 식습관을 시작으로 배변 훈련, 말과 글, 예절 교육, 양치질 등 갓 태어나 백지와 같은 아이에게 기본적인 삶의 밑그림을 그려주는 건 모든 부모의 의무이자 험난한 과제다. 이제 갓 여섯 살이 된 우리 아들 또한 험난한 밑그림의 과정을 넘어가고 있다. 약 5년의 일생동안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훈련은 모두 마치고 요즘은 특히 식사 예절과 한글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 어느 단계나 그렇지만 매사에 쉬이 넘어가지지 않아 골머리를 썩거나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잦다. 그중 특히 한글공부가 어려움이 많은데, 우리 부부는 한글 공부에 ‘용돈’ 개념을 도입하는 방법으로 이를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아이가 공부해야 하는 한글 책은 총 세 권. 각 권은 30개의 단원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매 단원의 공부를 마칠 때마다 하나씩 도장을 찍도록 하고, 30개의 도장을 모으면 만 원을 용돈으로 주기로 약속했다. 아이에게 무분별하게 사주던 로봇 장난감 또한 더 이상 사주지 않고 오직 모은 용돈에 한해 사고 싶은 장난감을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말처럼 순탄했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우선 아이에게 돈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찬아, 돈이라는 게 뭔지 알아?]

[알아. 엄마 아빠 지갑에 있는 거.]

(지갑을 열며) [맞았어. 엄마 아빠 지갑에 있는 바로 이 파란색, 갈색, 초록색, 노란색 종이를 돈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는 이 돈으로…]

(갑자기 신용카드를 빼며) [아닌데, 이건데. 이거 보여주고 마트에서 “주세요~” 하는 거잖아.]

[…]


아뿔싸. 우리 아이는 돈이 뭔지에 대한 개념도 없을뿐더러 물건과 돈을 교환한다는 개념조차 모르는구나. 생각해 보니 아이가 보고 배운 그 모든 결제 과정에서 현금을 주고받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으리라. 카드를 보여주기만 하면 물건을 주는 유토피아적 세상의 이미지를 깨부수는 것이 미안하긴 했지만 우리는 아이에게 현실의 냉혹함도 동시에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의 새로운 과제가 추가되었다. 바로 ‘경제관념 교육’.


우선 아이에게 그동안 쓰지 않는 장난감의 처분을 맡겼다. 아이는 지금은 타지 않는 하마 자전거나 가지고 놀지 않는 큰 나무 블록 등을 거실로 내놓았다. 우리는 아이가 고른 물건들의 사진을 찍고, 중고 거래 어플에 물건들을 올리고, 실제 거래 현장에 아이를 대동해 아이가 직접 물건과 돈이 교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아이가 아끼던 물건이 다른 아이의 손에 들어가고, 그 대가로 파란색 종이 몇 장을 받는 장면을 본 아이는 돈과 거래의 개념에 대해 서서히 그림을 그려갔다. 


돈을 버는 방법을 알게 되고 종잣돈까지 생겼으니 이제는 돈을 쓰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시작할 차례였다. 기껏해야 지금까지 모은 돈은 2만 원 남짓. 아이가 원하는 5만 원짜리 또봇 변신 장난감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아이에게 물건을 팔아 번 돈을 펼쳐 보여주며 돈의 가치에 대해 알려줬다. 아이가 가지고 놀지 않아 심심해하던 장난감들이 더 필요한 아이에게 가서 귀하게 쓰일 수 있다는 의미도 덧붙였다. 


[찬아, 쓰지도 않는 물건을 어린 동생들에게 주니까 기분 좋지? 동생들이 찬이한테 고마워하겠네?]

[…(관심 없음)]

[자, 찬이가 자전거를 팔아서 번 돈은 파란색 다섯 개와 초록색 하나지? 이게 만 오천 원이야. 그리고 블록은 갈색 한 장이지? 이건 오 천 원. 이렇게 합해서 2만 원을 번 거야. 2만 원 써볼까? 숫자 2에 0이 네 개…]

[그럼 이제 ‘슈퍼히어로 앤’에 ‘제트 썬더’ 사러 가자.] 

※ ‘슈퍼히어로 앤’은 이마트 안의 전자제품 코너인 ‘일렉트로 마트’에서 나오는 CM송 가사이며, ‘제트 썬더’는 찬이가 푹 빠져있는 로봇 캐릭터의 이름이다) 

[찬아. 아빠 말 좀 들어봐…]


가격에 대해 쉽지 않은 설명을 마치고 우리는 5만 원을 모을 때까지 한글 공부를 열심히 해보자는 어려운 합의에 도달했다. 그리고 약 세 달, 아이와 함께 하는 길고 긴 레이스가 시작됐다. 공부를 지루해하는 아이를 억지로 책상에 앉혀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제트 썬더 로봇 사진을 보여주며 이제 조금만 더 모으면 된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어쩌다 마트에 같이 갈 일이 있을 때는 다른 장난감에 눈이 멀어 당장 돈을 쓰려는 아이에게 “지금 이 돈을 써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해야 하는 거야.”라며 소비 욕구를 꾹꾹 눌러 담는 연습도 잊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이 전례 없이 크게 흔들린다 싶을 때는 ‘슈퍼히어로 앤’에 가서 제트 썬더를 만져보며 의지를 다지게 했다. 아이는 로봇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결연함을 드러냈다. 시간은 흘러(나와 아내의 인내심을 쥐어짜서) 아이는 90개의 도장을 모두 찍었고, 종잣돈 2만 원을 더해 마침내 5만 원을 손에 넣었다. 작년 10월에 시작된 프로젝트가 1월 초가 되어 모두 끝난 것이었다. 


아이와 함께 제트 썬더를 사러 가기로 한 주말을 앞두고 설 명절을 맞이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난 아이는 글자를 읽는 자신의 모습을 뽐내며 어르신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글을 다 공부해서 이제 곧 제트 썬더를 사러 갈 거라고 자랑했다. 기분 좋은 어른들은 나와 아내에게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며, 잘 가르쳤다며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세배 시간. 아이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손을 모아 세배를 했고 어르신들은 미리 준비해 놓은 세뱃돈을 아이의 손에 쥐어주셨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이 듬뿍 담긴 5만 원이었다. 아이는 설 연휴 동안 그렇게 삼촌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게까지 모두 세배를 돌며 총 15만 원의 세뱃돈을 받았다. 단 세 번. 녀석이 15만 원을 벌기 위해 무릎을 굽혔던 횟수. 우리 부부가 삼 개월 동안 탄탄하게 쌓아 올렸다고 믿었던 경제관념 교육의 성은 그렇게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아이가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이는 알듯 말듯한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본인의 피카츄 지갑에 돈을 차곡차곡 넣었다. 지금 저 작은 머릿속에선 어떤 생각이 흘러가고 있을까? 한글 공부를 괜히 했다는 생각일까, 아니면 15만 원으로 살 수 있는 세 개의 다른 또봇을 떠올리고 있을까? 


우리 부부는 아이를 재운 후 와인을 앞에 놓고 머리를 맞댔다. 약 두 시간의 논의를 거쳤지만 우리 부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1. 세뱃돈은 노력해서 번 돈이 아니므로 공정하지 않다고 설명한다.(요즘 같은 세상에 불로소득을 꼭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나?)

2. 세뱃돈은 장난감을 살 수 없는 돈이라고 카테고리를 분리한다.(아이가 왜냐고 물어보면 말이 막힐 게 뻔하다)


그 어느 쪽도 논리가 빈약해 구차하긴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아침. 부끄럽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가 어려서 가장 듣기 싫었던 그 한 마디, 명절마다 분노하게 만들었던 그 뻔한 거짓말을 아이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찬아, 세뱃돈은 엄마, 아빠한테 주면 잘 맡아뒀다가 찬이 크면 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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