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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Apr 04. 2023

아가야, 부디 행복만 하길

저녁마다 한 번 쓸 수 있는 군것질 찬스,

우리 아이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하루 세 번 먹기 싫은 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다.

저녁식사 후 마침내 아이는 과자, 사탕, 젤리 등이 가득한 군것질 바구니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루 중 아이가 가장 행복해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 행복을 입에 넣기도 전. 아이는 어김없이 한마디를 더한다.

"이거 먹으면 이제 젤리 몇 개 남았어? 다 먹으면 또 사줄 거야?"


왜 무리 아이는 행복한 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걱정과 불만을 굳이 끌어와 행복을 파괴하는 것인가?

이런 경우에는 아이에게서 걱정의 요소를 없애기 위해 아예 젤리를 더 많이 사줘야 할까?

그랬다간 부족함을 모르는 이기적이고 나약한 아이로 자라지는 않을까?

아니면 사소한 것에 만족할 수 있도록 규칙적으로 주는 제도를 없애야 하는가?

그랬다간 어렵게 세워놓은 '노력과 인내에 따르는 보상'이라는 공식이 깨져버리는 건 아닐까?

언제나 그렇지만 아이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양 극단을 오가는 선택의 기로다.


아이가 보이는 그런 모습은 나에게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 스스로 콤플렉스로 생각하는 모습이 아이에게 나타날 때면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단지 천성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교육의 문제일 수도 있기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분명히 따지고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뇌과학을 다룬 어느 책에서 인류는 얻는 것의 기쁨보다 잃는 것의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식에서도 한 번 불리면 도중에 발을 빼기 힘들지 않은가?

이는 원시 시대부터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체계적인 사고방식일 것이다.

당장 토끼를 사냥해 기쁘게 먹는 일보다, 등 뒤의 포식자를 놓쳐 생명을 잃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니 말이다.

적당히 비관적이고 적당히 예민한 개체가 종의 생존과 발전을 이끈다는 주장도 있다.

두 주장 모두 우리 아이에게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부모 된 입장에서 아이가 종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하기를 바라진 않는다.

그저 우리 아이가 행복했으면, 작은 일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들아, 부디 진화의 힘에 무릎 꿇지 않길.

젤리를 먹는 순간만큼은 세상에 젤리와 너 둘만 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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