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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Aug 30. 2020

“불멸의 신들이 죽을 운명의 인간을 질투한다?”

[영화로 풀어가는 죽음학 이야기] / 영화 "트로이"

“불멸의 신들이 죽을 운명의 인간을 질투한다?”

-영화 <트로이, Troy>, 감독-볼프강 페터젠, 2004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트로이>, 신의 아들이자 인간의 아들이기도 한 전쟁영웅 아킬레우스(브래트 피트)는 적국 트로이의 포로이자 여사제였던 브리세이스를 사랑하게 된다. 포로로 잡혀 온 브리세이스는 신을 섬기는 사제이다. 반면 아킬레우스는 수많은 사람을 죽인 그야말로 전쟁 영웅이다.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에게 신들에 대한 비밀을 하나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신들이 인간을 질투한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어이없게도 인간은 모두 죽기 때문이란다. 인간은 모두 마지막 순간을 살며, 그래서 삶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며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네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킬레우스가 잠든 사이 브리세이스는 적국의 장군이기도 한 아킬레우스의 목에 조용히 칼을 갖다 댄다. 그를 죽여야 더 이상의 살육이 없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이를 눈치채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데 오늘 죽는다 한들 무슨 상관이겠냐며 찌르라고 한다. 물론 브리세이스는 찌르지 못한다.    

인간은 모두 마지막 순간을 살며, 그래서 삶이 아름답다

자, 신들이 우리 인간을 부러워한다고 한다. 그것도 우리 인간이 언젠가는 죽기 때문이란다. 가끔 나는 어떻게 죽음과 죽음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곤 한다. 사실 자라면서 죽음과 관련한 큰 사건을 겪은 것은 없다. 다만, 중학교 시절, 죽는다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죽을 땐 숨을 쉬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숨을 최대한 참아봤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 날부터 난 죽음이 두려워졌다.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에게 죽음에 대해 물어봤지만 중학생이 이해할만한 정도의 답을 듣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3~4개월간 머릿속에는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죽음에 대한 나의 고뇌(?)는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마흔 중반에 우연히 죽음학을 접하게 되면서 내가 왜 그렇게 죽음에 천착하게 되었는지 지난 시간들을 찬찬히 돌아봤다. 대학에서 학교 방송국 생활을 했었는데, 1학년 수급 국원 시절 PD로서 쓴 첫 작품이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작품을 쓰기 전인지 후인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즈음, 쇼펜하우어의 <삶과 죽음의 번뇌>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도 났다. 군대에서 쓴 7권의 일기에도 삶과 죽음에 대한 글들이 많았다. 이후 살아오면서 읽었던 독서노트 목록을 훑어보니 죽음에 대한 책이 의외로 많았다.

       

내가 죽음에 대해 알고자 하고 죽음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그 두려움의 대상을 알기 위해서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죽음과 죽음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죽는 것이 것이 무섭다는 얘기다. 죽음으로 인한 내 존재의 소멸이 두렵고, 죽는 순간의 고통이 두려운 것이다. 내가 죽음에 대해 알고자 하고 죽음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그 두려움의 대상을 알기 위해서이다. 파헤치고 파헤쳐서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때까지 그 대상을 알아가고 그 대상과 친숙해지고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을 피하기만 할게 아니라 오히려 다가가서 알아보는 것도 두려움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떨쳤다는 얘기는 아니다.      

언젠가는 소멸될 존재이기에 매 순간이 소중하고 그 소중한 순간이 아름답고 감사한 건 아닐까? 

우리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꽃(조화)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생화를 좋아하고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화는 얼마든지 화려하게 만들 수 있고 시들지도 않는다. 반면 생화는 언젠가는 시들고 죽는다. 그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싹과 잎이 자라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나면 서서히 시들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 언젠가는 소멸될 존재이기에 매 순간이 소중하고 그 소중한 순간이 아름답고 감사한 건 아닐까? 그래서 영원불멸의 신들이 죽을 운명의 인간을 부러워하는 건 아닐까? 어떤가? 당신은 여전히 영원불멸의 신들이 부러운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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