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세의 나이에 폐암 3기 진단을 받은 남편. 마흔이 넘은 아내는 둘째를 임신 중이고 고등학생인 아들은 뇌성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다. 고등학교 화학교사인 남편은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부업으로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지만 이런저런 청구서도 제때 해결하지 못하는 여유롭지 않은 경제상황도 한 가지 이유이다. 한 때 동업을 했던 친한 친구가 건네는 치료비도 자존심 때문에 거부한다. 아내는 남편의 태도가 못마땅하다. 설득을 위해 가족회의를 여는 아내. 가깝게 지내는 여동생 부부도 부른다. 아내는 남편에게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나며 친구가 건네는 돈을 받고 적극적으로 치료하자고 부탁한다. 아들도 아버지에게 왜 모든 걸 포기한 듯이 행동하냐며 그것은 겁쟁이 같은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장애가 있는 자신을 아빠가 처음부터 포기했다면 지금 자신은 어떻게 되었겠냐며 아빠도 포기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처제와 처제의 남편 얘기까지 다 듣고 난 주인공 월터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다.
난 그냥 인공적으로 살아가는 살아있는 시체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걸 원하는 거야? 아니. 안돼. 당신은 그런 내 모습만 기억에 남겠지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가족이야. 서로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싶은 거겠지. 정말 고맙게 생각해...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난 뭔가를 내 맘대로 결정해 본 적이 없구나. 선택의 기로에서 말이야. 진심을 말할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고.. 나도 물론 딸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걸 보고 싶어... 의사들은 내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 그게 그들에게 최고의 관심사겠지. 하지만 조금 더 오래 산다고 그게 좋은 걸까? 너무 아파서 일도 할 수 없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당신과 사랑을 나눌 수도 없어. 난 남은 시간 동안 내 집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 내 침대에서 잠들고 싶단 말이야. 매일 30~40개나 되는 알약을 삼켜야 하고 머리는 다 빠져서 빈둥거리면서 있긴 싫다구. 혼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피곤에 지쳐서 고개조차 가누지 못하고 토해대면 당신이 그걸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그냥 인공적으로 살아가는 살아있는 시체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걸 원하는 거야? 아니. 안돼. 당신은 그런 내 모습만 기억에 남겠지. 그게 나로선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부분이야. 그래서 내 생각은, 미안하지만, 치료를 받지 않겠어.”
당신이 암 3기에 걸린 남편의 입장이라면? 둘째를 가졌는데 남편은 암에 걸렸고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는 아내의 입장이라면? 암에 걸린 아버지를 둔 아들의 입장이라면? 처제의 입장이라면? 먼 친척의 입장이라면? 모르는 사람의 일이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당사자에게는 어떤 권유를 하겠는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하여 결정할 것인가? 누가 결정해야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