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타파_13]
오래 전부터 아내가 올해 초 새로 개관한 수원 스타필드 도장깨기 하러 여러 번 가자고 했으나, 오늘에서야 다녀왔는데, 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하고 붐비지 않아 너무 좋았습니다. 다음 주는 대전으로 3일간 강의하러 가야하고, 돌아오자마자 바로 평가를 해야 하므로 저도 시간이 없지만, 아내도 오늘 아침 여행용 캐리어 꺼내 정리할 정도로 다음 달 북유럽 갈 날짜도 얼마 안 남아.. 말 나오자마자 얼른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제일 맘에 들었던 곳은 별마당 도서관으로 시간이 되면 조용히 일도 하며 사색도 하고, 다양한 먹거리도 마음껏 골라 사먹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주차도 6시간 무료이므로 좋은 아지트를 찾은 것 같습니다.
저렇게 많은 책들이 저에게 있으면 처치 곤란하겠지만, 좋은 장소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보기 좋았고, 과연~ 인간의 머리에 저 많은 정보들이 저장 될 수는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갈릴레이의 명언이라 알려져 있으나, 사실 갈릴레이가 그러한 발언을 했다는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하는.. 지구가 둥글다는 건 그 시절에도 이미 종교를 불문하고 상식이었지만, 재판 끝내고 나오면서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말했다 카더라 가 별안간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진실/진리의 불변성을 역설하는 말이라 할 수 있는.. 어찌 보면 나약한 지식인의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에 따르는 그 당시 시대상에서 순전히 갈릴레이가 주장하는 논리에 대한 이론의 부족 때문에 생긴 문제였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이는 갈릴레이가 종교이슈를 일으킬만한 행동을 한 것에 비해서는, 자신의 행동이나 이론에 대해서 별다른 증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환경에서 그 장애물적 아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철학적으로 우매하고 신학적으로 이단적인 지동설을 철회하라함에 따르는 철회의 굴욕적인 맹세는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국의 교황 대사들에게 전해졌고,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그와 동일한 같은 상황은 작금을 이루는 마지막 때에 우리들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예표가 아니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물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같은 맥락을 이루는 처사는 항시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타난 것들에 대한 의미적 전달이 아닌, “신학적으로 이단적인 지동설”이라는 측면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근대물리학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 갈릴레이가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복권되어 천문학계의 전설이 될 수 있었음에는 350여년이 걸렸다는 부분입니다. 오죽하면 죽기 전 말년에 갈릴레이는 “슬프다. 앞선 모든 시대의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던 한계를 내가 탁월한 관찰과 명석한 논증으로 백배, 아니 천배나 넘게 확장시켜놓은 이 하늘, 이 지구, 이 우주가 이제는 나의 육체적 감각으로 채워지는 좁은 영역 안에 움츠러들고 말았구나.”라고 탄식을 할 정도입니다.
맞아도 자신들과 다르면, 이단으로 몰아감에 있어,, 재판은 열려야 했고, 까놓고 보니 갈릴레이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완벽한 해설을 제대로 내놓지는 못하는 등의 해프닝이 벌어지자, 갈릴레이도 당시의 과학이론으로는 지동설을 완전히 증명할 수 없음을 재판 도중에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Eppur si muove)”는 말은 여러 달의 재판을 통해 심신이 극도로 지친 칠순 노인이 서슬 퍼런 종교재판관들 앞에서 가볍게 속삭이는 혼잣말이라 해도 그런 말을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을 것이고, 재판이 끝난 다음 마차를 타고가다 내리면서 문제의 말을 외쳤다는 설도 있으나, 재판을 다시 받기를 자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런 행동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의견이 많다고 합니다. 저는 했거나 안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상황 전체적인 맥락적인 부분에서 스스로들이 아니라 하드라도 잘못 알고 있었던 지식이나 사실이 언젠가는 시간이 지나며 그 진실이 밝혀짐에 따르는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자는 것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아닌 것을 아니라 해야 하며, 잘못된 것이라면 잘못됨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환경적 기반은 꼭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로움을 넘어, 현재의 시점에서 너무나 충격적이며 터무니없다 여길 수는 있겠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은 제자리 매김을 할 것이지만, 갈릴레이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결과로 가톨릭교회의 미움을 사, 죽고 난 후에도 장례를 치룰 수 없었으며 묘소도 마련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성격 소심한 그런 갈릴레이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음은 잘못된 생각과 무지, 권력들과 싸워 나가며 승리한 정의로움을 지닌 학자이기 때문으로.. 스스로의 주장을 목숨을 다하여 관철함으로 그 모든 것들은 근대 과학의 토대를 이루었음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흘러나온 소리라도 읊어 낼 수 있는 그 자신감을 확보함을 우리 믿는 자 모두는 지녀야 할 것으로 스스로 십일조하고 봉사와 헌신을 이루며.. 아닌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는 자세로 그 무엇보다 너무나 소중한 구원과 휴거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것으로 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서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낌은 당연한 것으로.. 제대로 모르며 아는 것처럼 한다고 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며, 경험도 없고 진정하게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말한다고 장땡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무지한 자는 유일하게 구원을 주시며.. 삼라만상을 뜻대로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외에 것들에 매달리는 자들을 일컬음은 교회적 측면보다는 박학하다 여기는 무지로 부터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식이며 최대의 지식을 자유자재로 풀어 헤치지만, 실제 제시하는 것들의 적용과 활용은 적절치 않으며 제한적임을 통하여 주시고 부여하신 그 지식을 제대로 습득하여 삼라만상(세상)을 통하여 깨닫고,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그 지식이 빛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함으로 알기는 알지만 그 결과는 무지의 소치라 하는 것입니다. 알면 뭐하고, 몇 번 읽었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음에는 그 말씀을 통하여 말씀 자체이신 그 분을 제대로 느끼고, 그 안에서 절대적인 성품과 영의 관계성을 울어 내야함에 있어 매일 매일이 창세기라면 그는 모양만 비스꾸리하게 갖춘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문자와 활자로 된 말씀이 살아 역동적인 생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제한적이 되지 않도록 성령의 역사와 함께 들어나야 한다는 것으로 그와 같지 않으면 활자와 영의 세계는 크나큰 간격을 지니므로 제한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으로 제시되고 규정되는 것은 그 때에 맞춰 규정하는 것들과 서로의 연계를 이루어 주님과의 관계를 맺어내야 할 것으로 그 때의 현실과 영적세계에서 주님의 모습(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내 박학한 무지와 대립되는 것들을 통하여 종교적 부정성을 걷어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