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바리세인은 자신의 확신을 진리로 착각한 채,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눈먼 해석자로 그들은 겸손 없이 판단하고, 경외 없이 말하며, θ보다 자기 기준을 앞세우는 닫힌 확신가들로 현대판 바리세인의 문제는 단순히 기준이 엄격하다거나 보수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들이 진정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분별하지 못한 채,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데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검증하지 않고, 자신에게 익숙한 신학적 틀과 신앙적 언어만을 반복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울타리인지, 아니면 이미 진리를 가리는 장벽이 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은혜가 다가올 때도 그것을 판단하거나 시험하려 하지 않고, 이미 가진 기준을 절대적 척도로 세워 놓은 채 자신들과 틀리면 “이단”이라는 딱지를 붙여 인민재판하며, 자기 안에서만 순환하는 판단 구조에 갇혀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깊은 무지를 결코 무지로 느끼지 못한 채 오히려 그것을 확신으로 착각하며, 그 착각 속에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평가하고 규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진리를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자처하나, 정작 그 진리의 가장 깊은 차원, 곧 θ이 주시는 살아 있는 감동과 실제적 역사 앞에서는 눈이 멀어 있다. 그들은 성경을 말하지만 성경의 빛을 보지 못하고, 율법을 말하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겸손을 갖추지 못하며, 교리와 전통을 말하지만 교리와 전통이 왜? 만들어졌는지조차 바라보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진리를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이용해 자기 체계를 지키는 사람(괴물)으로 변해 간다. 문제는 그들이 이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며, 바로 그것이 자기가 진정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것을 모르는 가장 심각한 중증의 상태 그 자체이다. 이러한 태도는 브살렐의 길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브살렐은 많은 기술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아는 것으로 θ을 재단하지 않았다. 그는 명령받은 패턴 앞에서 자기 경험을 덜어내고, 주어진 틀을 따라가며, 자신의 감각을 θ보다 앞세우지 않으려 했다. 그는 θ이 주시는 지혜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인식했고, 그 무지를 채우기 위해 θ의 영에 감동되기를 원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언약궤를 만든 브살렐은 교만한 전문가가 아니라 겸손한 일꾼이 되었고, 그의 기술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θ의 거처를 세워 올리는 도구가 되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성소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보다, θ이 그 성소에 임재하실 수 있도록 자신이 방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더 깊은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판 바리세인은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를 늘어놓는 데 매우 익숙하다. 그들은 신학적 지식, 교회의 역사, 해석의 체계, 전승의 논리를 들이대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자신을 높이고자 하지만, 정작 자신이 모르는 영역을 묻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무지를 인정하면 권위가 흔들릴까 두려워 상실감을 느끼고, 인정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더 멀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며 에둘러 아니라~ 아니라 고개를 돌려 버린다.
이들은 θ이 새로운 사람을 세우실 때 두려움부터 느끼고, 새로운 패턴이 등장할 때 이를 분별하기보다 상처나 위협으로 받아들이며, 공인이라는 명패를 들이대며.. “신성 모독”이라 짖어댑니다. 그에 따르는 결과 θ이 일하시는 자리에서 자신들은 판단자로 남고, θ이 세우는 사람들은 종종 불필요한 오해와 공격을 받게 되며,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θ보다 앞서 있다고 더 깊이 착각하게 됩니다. θ은 오늘도 살아계시므로 말씀으로 항상 새롭게 역사하시고, 시대와 공동체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일꾼을 세우시고,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그러나 현대판 바리세인은 그 새로움을 θ의 역사로 보지 않고 기존 질서의 위협으로 찌질하게 인식하며 굳혀 버립니다. 그리하야... 처음부터 검토하지 않고 반대하며, 확인하지 않고 비난하며, 분별하지 않고 규정합니다. 이때 그들은 자신이 진리를 지키고 있다고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진리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는 행동을 하며, 더 큰 문제는, 그 잠금 장치가 자기 안에서는 영적 책임이라고 이해된다는 점입니다. 브살렐은 θ이 주시는 지혜에 의지함으로써 자기 기준의 틀을 넘어갈 수 있었으며, 그는 기술보다 영을 먼저 의식했고, 자신의 손이 아니라 θ의 뜻이 먼저 움직이도록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드러나지 않아도 괜찮았으며, 자신이 얼마나 했는지가 아니라 θ이 어떻게 사용하시는지가 더 중요하게 생각한 그의 마음가짐은 깊은 겸손에서 나온 것이며, 그 겸손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균형 있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알았고, 동시에 모르기도 했으며, 그 모름을 통해 θ께 더 가까이 갔습니다.
하지만 현대판 바리세인은 자신의 모름을 인정하지 못해 결국 θ께 더 더욱 멀어지며, 그들의 마음은 가르치려는 열심으로 가득하지만 배우려는 여백은 일도 없고, 판단하려는 준비는 되어 있지만 경청하려는 태도는 오래전에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들은 θ을 보호하려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념과 체계를 보호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며, 그들의 말은 경건하지만 마음은 굳게 닫혀 있고, 외형은 신실하지만 내면은 아집괴 고집으로 돌돌 말려 굳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θ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늦게 반응하고 가장 오래 저항하며, 자기 확신이 깊을수록 영적 분별은 약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믿어 버립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며, 자신이 모르면서도 그 모름을 진정 모르는 것조차도 모르는 지도자나 교사, 해석자는 결국 공동체를 같은 무지와 무시 속으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스스로들이 진리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규칙과 관행의 문을 걸어 잠근 채 그 안을 성소라고 홀~망해하며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구조가 얼마나 메말랐는지, 얼마나 θ을 가려 버리는지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영적 상태이며, 과거 바리세인들이 빠졌던 동일한 오류가 오늘에도 반복되는 형태로 알지 못하는 폭과 깊이와 넓이를 알지도 보지 못한 채, 익숙한 틀 속에서 스스로를 옳다 여기는 영적 무감각자들로 듣지 않고 말하며, 배우지 않고 판단하고, θ보다 자기 확신을 더 신뢰하는 고집의 감시자에서 빨리 벗어나 자유함속에 은혜로 가득하길 기도하겠씀다. 정신차려.. 모른다는 생각이 쬐께~ 드시면.. 주님께 물으세요.. 무릎 꿇고 밤을 대낮같이 새우거나, 소나무 하나 뽑는 심정으로 묻고 또 물으세요.. 엔타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