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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랑 Nov 22. 2020

비로소 이름을 찾았다.

그녀들이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

윙윙윙

엄마의 핸드폰이 울렸다.

윤정심. 누구일까? 

엄마의 전화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놀랍게도 앞집 아줌마, 혹은 진이 엄마라고 불리는 이웃이었다.


윙윙윙

엄마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이광순.

이분은 또 누구시려나?

이번 목소리의 주인공은 몇 년 전 이사 간 옆집 아줌마, 혹은 민수 엄마라고 불리는 이웃이었다.


연달아 울리는 전화기에서 발견되는 낯선 여자들의 이름... 도대체 누구일까? 이 코로나 시국에 70대에 접어든 노인이 어딜 돌아다니시길래 하나같이 낯선 이름들일까? 엄마한테  짜증을 부릴까 생각도 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낯익은 이웃 아줌마들이셨다.


윤정심

이광순

이강자

김순자

노옥희

김선혜

등등



처음에는 낯설었고, 좀 지나서는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는 40년, 짧게는 20년을 같은 동네에서 부대끼면서, 누구 엄마 내지는 형님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던 분들이 왜 이제야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걸까? 나름 도시의 깨어있는 할머니들이긴 하지만, 다들 아들 부심으로 똘똘 뭉친, 이제와 페미니즘으로 새삼 무장하실 분들도 아닌데 말이다. 

나의 의문에 엄마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아주 명쾌하기 대답을 내놓으셨다.

몇 년 전 죽은 내 동창의 이름으로 불리던 지수 엄마를 더 이상 지수 엄마로 부를 수가 없어서,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고 말이다. 이웃들이 부를 때마다 지수 엄마의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아서, 한 명씩 한 명씩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사실, 친정동네 어머니들에게 이름 바꿔 부르기는 처음이 아니다.

30년 전 부산의 친정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 동네의 터줏대감은 당시 11살이던 정수 오빠였다. 뇌성마비에  몸이 무척 작았던 그는 늘 엄마의 등에 포대기로 싸여 업혀있었다. 다 큰 아들을 업고 다녀야 해서인지, 정수 엄마는 돌아다니는 것보다 집으로 동네 아줌마들을 초대하는 걸 좋아했었는데, 그 집의 커다란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고, 안방은  동네 아줌마들로 북적였었다.  늘 업혀서  다니던 그 정수 오빠는 2년 정도 후에 죽었고, 그 이후  정수 엄마는 본인을 청기와집 형님, 청기와집 아줌마라고 부르라고 했었다. 그 당시 10살이던 나는 호칭을 다르게 부르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느꼈고, 그래서 일부러 그 집 앞을 빙 둘러서 먼 길로 집에 오곤 했었다.


30년 전에는 한 명, 아들의 죽음에도 이름을 찾지 못했던 분들이 30년 뒤에는 이름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픈 자식과 안 아픈 자식이 주는 슬픔의 강도가 다른 탓은 아닐 것이다.

어린 자식과 장성한 자식이 주는 슬픔의 정도가 다른 탓은 아닐 것이다.

이유가 궁금해서 엄마한테 여쭤보니, 엄마의 대답은 명쾌했다.


'나이 70에 이제와 서라도 이름을 써야지. 아껴서 저승 가서 불릴 것도 아닌데'라고.

서로 이름을 부르니, 조금은 낯설고 어색했지만, 너무너무 좋다고, 내가 나 같은 느낌이 든다고 일부러 이름을 더 불러주곤 한다고 하셨다. 청기와집 아줌마는 어떻냐고 했더니, 그분 역시 선혜라는 이쁜 이름을 찾았다고 한다.


이름이 불린다고, 자식 잃은 슬픔이 흐려질까만은, 그래도 그 슬픔을 후벼 팔 수는 없기에 이름을 부른다는 이유가 괜히 내 눈 끝을 시리게 한다. 

하지만, 좋다. 나는 친정 동네 아줌마들이 이제라도 이름을 찾은 게 참 좋다.

부산의 오래된 동네 아줌마들이 슬픔을 극복해나가는 방법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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