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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숙 Monica Shim Sep 13. 2024

8. 설국의 밤-카와유온센

홋카이도 day5. 2024.2.27


  설국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사방 천지가 눈이다. 숙소 앞에  인동忍冬호텔이라고 간판이 불을 밝히고 있다. '인동忍冬‘ ’ 겨울을 참다 ‘ 기나긴 겨울을 참아 견뎌내야 사는 곳, 홋카이도다. 북해도의 혹독한 겨울을 버텨 살아낸다는 건 대단함을 뛰어넘어 숭고한 일이다.  오늘 밤은 홋카이도의 동북쪽, Akan-Mashu 국립공원 안 Teshikaga의 카와유온천지역에서 보낸다. 북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러시아와 연결된 오호츠크해다.


 눈보라 속에 긴장하며 산을 넘어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오후 4시경 이건만 밖은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이대로 여장을 풀고 앉으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밤새 눈 속에 파묻혀 버릴 것만 같은 이 작은 마을을 오늘 돌아보지 않으면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카메라를 들고 혼자 동네로 나왔다. 설국의 밤이 궁금해서다.


 눈은 조용히 쉼 없이 내려 쌓였다. 순백의 세상에 발을 딛기가 조심스럽다. 호텔을 나와 옆길로 들어서니 가겟집 아저씨가 장사를 일찌감치 접고 가게문을 닫고 있다. 이런 눈보라 속에 찾아올 손님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부지런히 문을 열었다 닫는다. 한 남자가 삽을 들고 집 앞 눈을 치우고 있다. 그 두 사람을 본 후로 길에서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눈더미가 성벽 같이 쌓인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왔다.  버스가 손님 없는 정거장에 그저 한참 섰다가 떠났다. 그래도 두서너 명의 승객이 버스에 타고 있다. 이 험한 날씨에도 사람들은 어딘가로 떠나고 온다. 일찌감치 문을 닫은 스모박물관 앞에 선 동상이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서있다.  눈바람에 숲의 나무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동네 개울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부스럭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사슴 한 마리가 쌓아둔 나뭇더미를 뒤적이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눈 깊은 숲을 헤매다 인가까지 왔나 보다. 그와 눈이 마주쳐 한동안 꼼짝 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도 내가 이 저녁, 먹이를 찾아 동네를 어스렁 대는 걸로 보였으려나. 그는 묵묵히 쳐다보다 시선을 나무더미로 되돌렸다.


 개울 한쪽에서 수증기가 몽글몽글 솟는다. 다가가보니 '원천'이란  팻말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와유온천'이라 쓰여있다. 온천샘이 솟아나는 곳이었다.  바깥세상의 날씨에 아랑곳없이 지구 속은 끓고 있다. 길가엔 친절하게도 족욕탕이 있다.  늦은 시각이 아니면 뜨거운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내리는 눈을 감상하련만.


 인적 없는 길로 눈은 깊게 내리고 바람은 싸리비가 되어 지붕의 눈을 쓸어내렸다. 어둠이 내리는 마을에 창으로 비어져 나오는 불빛 만이 온기를 품고 있다. 저 창안엔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있으리라. 눈은 이 작은 마을을 밤새 삼킬 듯 점점 세차게 내렸다. 먼 이국의 북녘 마을을 홀로 헤매고 있는 내가 보였다. 객기를 부리다 눈에 묻혀 버릴 것 같아 숙소로 걸음을 재촉했다.


저녁은 일본 정식인 가이세키였다. 종업원이 무릎 꿇고 정식으로 대접하는 일본식 정식에 귀한 손님이 된 느낌이다. 섬 요리답게 각종 해물이 가득했다. 이 엄동의 땅까지 무사히 옴을 감사하며 사케 한잔으로 건배를 나누었다.


 호텔방은 나즈막한 침대가 있는 침실 위쪽으로 일본식 테이블이 있는 다다미방이 연결되어 있었다. 테이블 앞에 앉으니 커다란 창으로 눈 내리는 바깥풍경이 펼쳐졌다. 눈 내리는 밤은 잠들기조차 아까웠다. 저렇게 하늘을 열어 눈을 퍼부어 주는데 어찌 잠을 청할 수 있으랴. 온천에 몸을 담그고 나니 곤한 몸에 졸음이 몰려왔으나 20여 년 만에 만나는 눈 내리는 밤을 그냥 지나기 아쉬워 깨어 앉았다.


늦은 밤 설국의 사람들은 잠들고 낯선 객만 깨어 설국을 지킨다. 작은 가로등만 켜진 채 집들은 잠들어있다. 바람이 이끄는 데로 눈은 이리저리 휩쓸리다 비가 내리듯 사선을 그으며 내린다. 눈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밤이다. 연대를 이루며 나는 철새처럼 눈송이도 떼를 지어 난다.  겨울은 홀로 길을 나설 수 없음이다.


북방의 마을을 조용히 덮어가는 눈, 설국의 깊어가는 밤,  가로등 아래 흰 치맛자락을 흩날리는 무희 같은 눈의 유혹에 홀려 잠마저 달아나 버렸다. 그냥 눈에 갇혀 이대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머물고 싶어졌다. 글도 쏟아지는 눈송이처럼 절로 펑펑 내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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