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day5 2024.2.27
새벽 4시, 학을 만나러 츠루이로 향했다. 추우니 방한할 건 모두 갖춰 최상위 보온을 하고 나오라 어젯밤 당부했는데 예상보다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스츠리강에 도착하니 벌써 차량 두 대가 먼저 와있다. 오토와 다리 위에 이미 여러 개의 삼각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간을 담는 사진작업은 부지런히 준비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게 된다. 겨우 자리를 비집고 삼각대를 세웠다.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희미한 여명사이로 스츠리강이 멀리 산을 배경으로 드러났다. 얕은 강 위로 눈 덮인 모래톱들이 강물의 흐름을 인도한다. 강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와 풀들이 강을 껴안으며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추위에 강물은 얼지 않고 흐른다. 흩날리는 눈으로 인해 산은 아스라이 멀어 보인다. 망원렌즈로 당겨서야 스츠리강 저편 모래톱 가에 모여있는 학들을 볼 수 있었다. 혹한의 밤을 지새운 학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물 위에 한 다리로 서서 움직임이 없다.
학은 포식자들의 공격을 피해 밤에는 얕은 물 위에서 잠을 잔다. 물 위는 열손실이 적고, 다가오는 포식자를 물소리로 알아챌 수 있어서다. 신체의 노출을 최소화해 체온손실을 줄이려고 한 다리를 들고 잔다. 해가 뜨면 먹이를 찾아 일제히 날아오르는데 그 순간을 포착하려 카메라를 세팅하고 모두들 숨죽이고 있었다.
학(鶴)은 두루미과의 한 종으로, 한국 철원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겨울 철새이다. 홋카이도 동부는 흰 깃털에 머리에 빨간 왕관을 쓴 단정학 (丹頂鶴, Red-crowned crane)이 많은데 일본에서는 탄조(Tancho)라 부른다. 겨울을 이곳에서 보내기 위해 시베리아에서 날아온다. 키가 1미터 40센티미터고 날개를 펼치면 2미터 40센티미터가 되는 거구다. 목과 다리가 길며 우아하고 기품이 있다. 30년에서 50년을 사는 장수동물로 일부일처제라 한다. 감정표현을 잘하며 서로 짝을 이루면 끝없이 애정 표현을 한다. 번식기의 수컷은 화려한 춤으로 구애를 한다. 수컷은 콩, 암컷은 꼬깍하며 반응하는데 새의 언어로 '사랑해요' 란 뜻이란다. 학들은 식사가 끝나면 구애춤(Courtship dance)을 춘다. 이 춤은 적수로부터 애인을 방어하고 짝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 서로의 애정을 재확인하는 몸짓이라 한다.
매일 애정을 표현하는 새들이라니. 잡은 물고기에게 왜 미끼가 필요하냐며 결혼 전후가 다른 인간에 비해 학은 사랑표현에 있어 인간보다 한 수 위다. 부부가 매일 식사 후 사랑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가.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살아보니 표현을 해야 사랑도 신뢰도 깊어진다.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던 사랑도 시들 때가 오고 때때로 리필이 필요한 것이다. 학들처럼 매일 사랑을 표현한다면 헤어질 부부가 있겠는가. 사람은 누군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 속에 자라고 성숙한다. 사랑 결핍은 영양 결핍처럼 사람을 시들게 한다.
아침 해가 서서히 오르자 강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햇살로 몸을 데운 강은 물안개를 피워냈다. 희미하던 먼 산이 제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학들이 잠에서 깨어 아침인사를 하며 서로의 머리 위를 날기 시작했다. 눈을 쓴 산과 겨울나무와 풀숲, 스츠리강 위의 학들과 하얀 모래톱, 그 사이를 돌아 흐르는 강물이 한 폭의 겨울 풍경화를 만드는 모습을 조용히 감상했다. 아름다웠다.
이 지역은 과거에 학이 많이 살던 곳이었는데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습지개발과 무차별 낚시로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 멸종된 걸로 알았다. 그러나 어느 해 몇 마리가 다시 목격되어 인근 아칸 Akan 타운과 츠루이Tsurui 마을이 학 보호에 발 벗고 나서면서 이후 약 1500마리로 회복되었다 한다. 혹한과 눈으로 먹이가 귀한 11월에서 3월 사이에 츠루이 학 보호구역에서 먹이를 제공함으로써 학들이 점점 많이 찾아오게 되었다. 현 기후나 환경 조건하에선 겨울 모이 제공이 없다면 학은 십 분의 일로 감소할 거라 한다.
학에게 먹이를 제공한다는 츠루이 학 보호구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눈으로 덮인 넓은 들판에 40여 마리의 학들이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은 들판의 눈을 쓸어 추위로 웅크리고 있는 학들에게 사정없이 뿌려댔다. 머리를 날개 속에 묻고 한 다리로 선 그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도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다. 갑자기 학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울어 제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멀리서 학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친구와 가족을 식사시간이라고 부르는 소리였다. 친구들이 오자 날개를 펼치며 뚜뚜루룩 소리를 내며 환영인사를 했다.
한 남자가 수레를 끌고 오더니 들판 여기저기에 곡식을 뿌려주었다. 먹이를 먹고 나자 학들이 짝을 이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긴 날개를 펴 껑충 뛰어올랐다가 연인의 주위를 돌며 날았다가 사뿐히 내려앉으며 눈을 맞추었다. 암컷은 눈길도 주지 않다가 수컷의 열렬한 구애에 마침내 함께 춤사위에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눈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도 아랑곳없이 모두들 사랑춤에 열중이었다. 언젠가 공연장에서 보았던 선비처럼 기품 있던 학춤을 눈앞에서 감상하다니 실지로 보니 더 아름답고 우아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소리로 몸으로 열렬히 표현하는 학들로 눈 들판은 사랑고백 무대가 되었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 한편이 뜨거워졌다. "사랑한다"는 말을 왜 우리는 아끼며 사는 걸까.
말 수가 적은 아들이 전화 오면 꼭 "사랑해 아들" 하고 먼저 인사를 해보았다. 처음엔 쑥스럽게 "네, 저도요" 하던 아들이 이젠 통화 끝에 먼저 "엄마 사랑해요" 한다. 사랑한다는 말도 습관이 되면 어렵지 않구나. 그 말을 아끼다 어느 날 사랑하는 이가 먼저 떠난 후 가슴 치는 일이 없기를.
학마을 츠루이를 나와 백조의 호수인 쿠샤로 호수를 향했다. 눈보라가 거칠어지고 기온이 점점 떨어졌다. 쿠샤로 호수 가까이 가니 모든 걸 날려버릴 것 같은 강한 눈보라에 잠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추위에 몸을 가누기도 힘드니 카메라와 삼각대가 큰 짐으로 느껴졌다. 눈앞에 얼음으로 덮인 거대한 호수가 희뿌옇게 나타났다. 흰 눈으로 덮여 호수인지 들판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수평선과 하늘의 경계마저 희미했다.
호수의 가장자리만 얼지 않은 물이 겨우 남아 있었다. 그 좁은 공간에 수십 마리의 백조들이 떠 있었다. 난생처음 백조를 가까이서 보는 터라 신기했다. 하얀 깃털에 긴 목을 하고 노란 부리를 가진 백조는 목이 긴 오리 같아 보여 상상하던 백조와는 달랐다. 얼음 위엔 공처럼 몸을 말은 백조들이 머리를 깃 속에 파묻고 있다. 이 강추위에 바람 피할 곳 없는 호수 위에서 온몸으로 고스란히 눈보라를 맞고 있었다.
이 녀석들은 어찌 겨울을 나나 측은한 마음이 들 즈음 먹이통을 든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가 나타나자 백조들이 소리를 내며 모이기 시작했다. 먹이를 뿌리며 사내가 달리자 백조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머리 바로 위로 일제히 날아오르는 백조들의 비상은 장관이었다.
셔터를 누르려 노출한 손가락 하나도 얼어터질 듯 해 사진 찍기는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추위와 바람과의 싸움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핫팩으로 수시로 손을 데워가며 가까스로 촬영했다. 영하 20도의 추위가 어떤 건지 절감한 순간이었다. 이 추위에 호수 위에서 밤을 지새워야 하는 백조를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지가 않았다. 홋카이도의 겨울을 살아낸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처럼 거룩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