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day6. 2024.2.28
여행 6일째가 되니 그리도 맛나던 음식들이 물리기 시작한다. 이럴 때 매운 라면이나 김치가 적격이다. 아침에 속이 메슥거려 음식을 먹기 힘들었다. 피곤해서인가 하고 간단히 요기만 했다. 마음에 드는 호텔을 떠나기가 아쉬웠다. 떠나기 전에 어제 들렀던 츠루이와 쿠샤로 호수를 한번 더 가자는 의견에 따라나섰다. 호텔을 나서자 앞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눈폭풍이 휘몰아쳤다.
호텔서 30분 거리의 쿠샤로 호수는 어제보다 추위가 더 맹렬했다. 눈보라와 추위에 호수의 빙판은 점점 불어나 백조가 떠다닐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나마 호수 언저리 실오라기 같이 남은 물 위에 백조들이 빽빽이 모여 있다. 겨울바람은 그 실낱 같은 희망마저 모두 얼려버릴 기세다. 이런 혹한 속에 밤을 지새우다니. 백조는 이따금 호수 끝자락까지 이어지는 빙판 위로 날아올랐다가 이내 물가를 찾아 머리를 날갯죽지에 넣고 웅크렸다. 서로 끌어안고 체온을 나누면 좋으련만 삶은 결국 스스로 이겨내는 것임을 아는 건지 제각기의 방법으로 겨울을 버텨내고 있다. 아직도 멀게 남은 겨울을 살아내야 한다. 그들의 겨울나기의 무게가 느껴져 발길 돌리는 마음이 무거웠다.
산을 넘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맑아졌다. 산을 경계로 날씨가 판이하게 달랐다. 학농장엔 오늘도 많은 사진가들이 몰려있었다. 먹이 주는 시간 전에 도착해야 날아오는 학들을 찍을 수 있는데 오늘도 한발 늦었다. 눈보라가 잦아들어 사진 촬영에는 편했지만 학들의 사랑춤을 볼 수는 없었다. 밤새 얼었던 몸을 녹이기라도 하듯 가만가만 햇살을 따라 걸으며 식사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도 식후경인가 보다.
가는 길에 상고대로 가득한 숲을 만났다. 나뭇가지가 눈과 얼음에 덮여 고드름 같이 변한 상고대는 마치 얼음 갑옷을 입은 것 같았다. 햇살이 비치자 영롱한 크리스털 숲에 들어선 것 같았다. 프로즌 Frozen의 엘사공주가 이곳을 다녀간 걸까.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던 마이다스나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엘사는 행복할 수 없었다. 추위에 떠는 이의 언 손을 잡아줄 수 없고, 먹고 싶은 음식을 집을 수 없고, 사랑하는 이를 안을 수 없는 손은 더 이상 손이 아니라 무기였다. 사랑하는 이도 나 자신도 해칠 그 무기를 가지려 어리석은 우리는 평생 애쓰고 사는 건지도 모른다.
사슴 가족이 길가까지 나와 눈 속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숲에서 먹이를 구할 수 없었는지 나무껍질을 뜯어먹고 있다. 모두가 제 나름의 최선의 방식으로 이 냉혹한 겨울을 버텨내고 있다. 결국 봄은 올 것임을 알기에 모든 생명들은 겨울나기의 혹독함을 참아낸다.
아까부터 불편하던 속이 뒤틀리며 복통이 심해져 참기 어려웠다. 급기야 차를 세우고 토했다. 곧이어 다른 선배도 속이 거북하다며 같은 증상을 보였다. 일행 중 한 분이 밤새 토했다고 한다. 식중독인가 보다. 호텔 측에서 전화가 왔다. 침대 시트에 토한 흔적이 있어 다른 사람도 문제가 없나 확인차 한 거란다.
가이드 말이 일본에선 가끔 노인요양소에서 식중독이 생겨 전염까지 되더란 말을 했다. 증상이 심하면 일찍 다음 숙소로 가서 병원에 들러 검사받고 보건성에 보고를 해야 한단다. 그래도 속을 비우고 나니 한결 상태가 좋아졌다.
세 사람이나 같은 증상을 보여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마지막 숙소인 십승천온천호텔(Tokachigawa Onsen Daiichi Hotel)에 들었다. 죽은 듯 쓰러져 저녁도 건너뛰고 선배가 갖다 준 흰 죽도 마다하고 잠이 들었다. 병원을 가 검사하고 보건성에 보고해야 한다던 가이드는 별 말이 없었다. 밤새 옆선배는 끙끙 앓고 나도 곯아떨어졌다.
얼마를 잤을까 창이 밝아 잠이 깼다. 호텔방 큰 창으로 달빛이 환히 들어오고 있었다. 밖으로 흰 강과 강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다리가 보였다. 십승천(Tokachi River)이었다. 열 번을 이긴 강이라. 저 고요하고 아름다운 강도 전쟁으로 얼룩진 상처를 품고 있었던가. 높이 뜬 하얀 달이 흰 눈 덮인 강을 푸르게 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