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Day7. 2024.2.29
창 밖으로 토카치강이 눈앞에 길게 펼쳐졌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현수교 위로 간간이 차가 지난다. 한편이 사그라져가는 흰 달이 하늘 높이 떠 강을 비추고 강은 물안개를 끊임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강 위로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올랐다. 햇살이 차가운 강으로 스며 들기 시작했다. 강 너머 눈 덮인 히다카산맥이 길게 누워있다. 히말라야산맥이 생성되는 시기에 생겼다는 히다카산맥의 끝은 태평양과 만난다. 우린 홋카이도의 남쪽에 와 있다.
이번 여행에서 총 주행거리 1540킬로미터를 달렸다. 혹한의 겨울을 카메라에 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셔터를 누르기 위해 노출된 손가락은 추위에 얼어 터질 듯하고 발은 동상에 걸린 듯 욱신댔다. 나무 한그루를 온전히 카메라에 담기 위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머리는 피사체를 어찌 담을까 구상하고 몸은 추위와 싸워야 하는 이중고를 견뎌내는 게 겨울 촬영이었다.
오호츠크해가 가까운 도시를 지날 때면 저 너머에 있을 사할린섬을 들르지 못함이 아쉬웠다. 사할린에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때 강제징용 되었던 조선인들이 전쟁 후에도 조국과 주변국의 무관심과 이념 차이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무국적자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대학 때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며 이들의 삶을 조명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기에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홋카이도의 수많은 터널을 지날 때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던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이 떠오르곤 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긴 터널 같은 시간을 지났을 터이다. 홋카이도 초기 정착민 아이누인들은 일본에 식민화되며 그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동화되고 사라져 갔다.
긴 터널의 역사를 거치며 또 다른 설국을 만나고 만난다. 아름다운 땅만큼 사람도 아름다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람이란 끝없이 다투며 살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인 걸까. 동물과 구분되는 존엄한 존재란 사람은 하느님이 창조한 데로 제 구실을 하고 사는 걸까. 이 아름다운 땅도 이 땅을 거쳐간 사람들처럼 언젠가는 지진과 해일로 사라질 것인가. 사그라져가는 달빛과 솟아오르는 해 앞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고요히 저물고 떠오른다 .
깊이를 알 수 없이 내리는 눈은 추억 속으로 잠기게 했다. 눈썰매를 지치던 어린 날의 겨울을, 외가에서 구들목에 누워 눈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던 날을, 돌절구에 쌀가루처럼 쌓이던 눈, 추위로 손이 떡떡 얼어붙던 펌프, 너른 논밭을 솜이불로 덮어가던 눈송이들, 가을에 말린 갈잎을 창호지 위에 붙이던 외할머니, 눈이 펑펑 내리던 청주역, 기찻길을 하얗게 덮어가던 눈송이들, 수많은 겨울날의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추억 속의 겨울은 온기가 가득했다. 홋카이도의 겨울도 또 다른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로 홋카이도 사진여행은 막을 내린다. 새벽에 주얼리해변을 촬영하기로 했는데 어제의 식중독 사건으로 취소되어 바로 공항으로 갈 것이다. 홋카이도, 눈의 나라에 와 평생 볼 눈을 보고 간다. 눈을 감아도 들판에 펑펑 내리던 눈이, 창가에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나무껍질을 뜯어먹으며 겨울을 견디던 사슴 가족, 눈보라 속에서 사랑 춤을 추던 학들,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눈 폭풍을 버티던 백조의 무리가 또렷이 보인다. 혹독한 겨울을 맨 몸으로 견디던 그들 만큼 봄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가 또 있을까. 이제 겨울을 떠나 봄을 맞으러 돌아간다. 이 홋카이도에도 머잖아 봄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