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물잠자리 날아가는 동안
아버지가 죽고 첫 구정을 맞았다. 아버지가 약을 먹었던 구정 이후 세번째인지 네번째인지 헤아려보다가 관뒀다. 경기도 외곽 도시에서 세배를 했다. 어머니는 하나마나한 덕담 말미에 물었다. 혹시 아빠한테는 세배 했니? 여전히 안 된다.
서울에 돌아와서 석달만에 아버지를 묻은 옛 동네 뒷산에 올랐다. 좀 낮은데다 묻을 걸, 풍광이 좋으면 뭐해 죽은 사람은 보지도 못하는 걸. 산을 오르는 와중 쉴새없이 투덜거렸다.
아버지를 묻은 곳에 도착했다. 흙 아래에는 이미 아무것도 없겠지만, 아버지를 위해 온 것은 아니니 상관 없는 일이었다. 어릴 때 슈퍼 있던 자리 편의점에서 사온 쏘주의 빨간 뚜껑을 따서 이리저리 뿌렸다. 눈치가 보여 세배는 못했다. 지난 번과 달리 한낮이라 몇몇 등산객이 있었다.
산을 도로 내려오는 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 여름 방학이었다. 방학 숙제인 곤충채집을 위해 친구들과 수십년 뒤 아버지를 묻게될 바로 이 산에 올랐다. 그 시기 가을은 잠자리가 허공보다 많았다. 언제부터인지 벌레와 곤충을 무서워하게 되어 지금은 시도조차 할 수 없겠지만, 그 때는 잠자리를 잘 잡았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잠자리채 같은 거추장스러운 도구는 쓰지 않는 정통 맨손파였다. 별달리 비법이랄 건 없이 절대 성급하게 굴지 않는 것 뿐이었지만, 끽해야 열 살 전후의 어린애들에게는 드문 미덕이기도 했다.
친구들이 문방구에서 천오백원에 파는 허술한 잠자리채를 들고 허우적거리는 사이 난 수십 마리의 잠자리를 잡았다. 노란색 플라스틱 채집통에 더 이상 잠자리를 집어 넣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나 만족스러웠던 것은 검은물잠자리였다. 새카만 날개에 자개처럼 아롱다롱한 청록빛깔 몸통을 가지고 있었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모습은 잠자리보다 나비에 가까웠다. 검은물잠자리는 보기도 힘들었고 조금이라도 기척을 느끼면 곧장 날아가버렸다. 완전히 기척을 죽이고 결코 서두르지 않아야 했다. 그러고도 끝내 포획을 포기한 것이 여남은 번은 됐는데, 마침내 수십마리의 고추잠자리를 잡아내며 불붙은 나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검은 날개를 끼워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해지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고도 여전히 가득한 채집통을 들고 의기양양 하산하던 나는 돌부리에 걸려 요란하게 자빠져버렸다. 충격에 열린 채집통의 잠자리들이 푸라라락, 헬기 뜨는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침내 손 안에 들어왔던 검은물잠자리도 물론이었다.
그 날 내내 어찌나 유세를 부렸는지 친구들은 걱정하기보다 오히려 고소하다는 반응이었다. 힘없이 집에 돌아온 나는 울다지쳐 잠이 들도록 아쉬움에 투정을 부렸다. 아들을 달래다 지친 어머니가 움켜쥔 주먹을 통제하느라 부르르 떨었다.
날개를 다쳐 도망도 못간 한마리와 오성대감의 대장장이처럼 친구들에게 돌려받은 두 마리를 합쳐, 흔하디흔한 고추잠자리 세마리를 방학숙제로 제출했다. 숙제 말미에 검은물잠자리를 잡았으나 도로 놓쳐버린 사연이 담긴, 차라리 한 편의 서사시라고 할만한 구구절절한 변명록을 덧붙였으나 누구도 그닥 개의치 않았다. 유독 아픈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았다.
멀리 시간이 흘러, 아버지를 묻은 자리에 쏘주를 뿌리고 내려오던 나는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와선 어찌됐든 상관없을 그깟 방학 숙제 때문에 검은물잠자리를, 그 많은 잠자리를 죽이지 않아서 다행한 일이라고. 그 때 넘어져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보고했다. 아버지를 묻은 곳 근처의 사진도 몇 장 보냈다. 어머니는 짐작도 못한 답장을 했다.
- 안주는?
아마도 어머니는 영원히 안될 것 같다. 난 곧장 전화를 걸어 어머니에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엄마, 안주는 이제부터 내가 먹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