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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Jul 30. 2024

검은물잠자리 날아가는 동안 - 3

그렇게까지 홀가분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장례식은 혼자서 해내기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많았다. 그럴 땐 남의 호의에 기대야만 했다. 남에게 신세지는 건 질색이었다. 결국 다 갚아야하니까. 그러나 사람 사이에서 사는 이상 호의를 받지 않을 수도 호의를 베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내가 상처준 사람들과 내게 상처준 사람들이 문상을 왔다. 그들을 동시에 맞으며 상처도 마찬가지임을 알았다. 사람 사이에서 살기에 상처를 받지 않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느쪽이든, 적어도 지나치게 두려워할 건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골을 어떻게 처리할지 걱정이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집안 사람들도 내게 일임했으니 이혼해서 남 돼버린 사람 유골에 신경쓰지 말라고도 했다. 어머니는 넌 귀찮다고 변기에 넣고 내릴 놈이라 걱정이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하도 기가 막혀 거칠게 항변했다. 아이 참, 엄마. 내가 그렇게까지 생각없는 놈이야? 그렇게 하면 변기 막히잖아!


 화장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밤 어릴 때 살던 동네 뒷산에 올라갔다. 동시에 아버지가 어릴 때 살던 동네의 뒷산이기도 했다. 한때 아버지와 함께 자주 올랐던 곳이었다. 훗날 이곳에 자기가 묻힐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만, 아버지가 그걸 원했다고 믿기로 했다. 어차피 이 모든 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난 지게를 진 머슴처럼 아버지의 유골함이 담긴 배낭을 매고 산에 올랐다. 어딘가 찾아보면 아버지와 형제들이 두려움에 떨며 얘기했던 장수설화의 주인공, 할아버지의 손자국이 남은 바위가 있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다.


 한쪽으로 나의 어린 시절 동네가, 반대편에 아버지의 어린 시절 동네가 보이는 맞춤한 곳을 찾았다. 비록 내가 불의를 저지른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하여간 합법은 아니니까 서둘렀다. 그러나 산에 들어선 후 도로 내려오도록 단 한사람도 보지 못했다. 다람쥐 한 마리 없었다. 아버지의 유령이 출몰해도 놀래켜줄 사람조차 없을 듯 했다.


 동네 생활용품점에서 사온 모종삽과 호미로 바닥을 팠다. 모종삽은 있으나 마나였고 호미는 인류사에 남을 발명품이었다. 낮에 잠깐 왔던 비에 젖은 바닥에서 강렬한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집에 돌아오니 새벽이었다. 라면을 끓여먹고 잤다. 독감에 걸려 사흘을 앓았다. 그 말미에 옛 직장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며 애도를 표했다. 퍽 부끄러웠다.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딱히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부류는 아니었지만, 이를테면 섭취해서 얻는 칼로리보다 소화시키는데 더 많은 칼로리가 소비된다는 곤약처럼 영양가 없는 이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시간이 지났으나마 이렇게 연락하고 애도의 마음을 전해준 것만으로도 실제 와준 것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진심으로 말했다. 내가 꽤 감동했다는 사실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는 한결 홀가분한 어투로 절대 그것이 본 목적이 아니었던 것처럼 자신이 지금 일하는 보험사의 보험 가입을 권유했다.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채근을 하기에 부득이하게 차단했다. 마음속으로나마 탓하진 않았다. 다른 모두가 그렇듯 그 또한 자기 자리에서 있는 힘껏 살아갈 따름이었다.


 독감을 털어낸 나도 나대로 있는 힘껏 살아갔다. 당장 착수한 것은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흔적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육신의 흔적은 몇 달 되지 않아 눈과 비와 바람과 햇볕이 말끔하게 지워줄 터였다. 행정적인 흔적을 청소하는 것은 더 간편했다. 동사무소에서 서류 몇 장을 제출하면 끝이었다. 언젠가 써줬던 부양의무포기각서를 돌려받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동사무소 직원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뜻밖에 처리가 오래 걸린 건 금융 전산망에 남은 흔적들이었다. 동사무소에서 일러준대로 조회해보니 시중의 무수한 은행에 아버지의 계좌가 남아 있었다. 대부분 계좌를 해지하는데 필요한 서류를 떼는 비용보다 적은 금액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산망에 남은 아버지의 유령 또한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많이 은행에 들른 것은 처음이었다. 대기번호 줄어드는 재미로 지루한 시간을 견뎠다. 내 번호가 아닌 번호를 부르면, 숨마저 멈추고 꼼짝도 않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해당 번호의 주인으로 오해받으면 기다리는 시간이 몇 초 더 길어질 수 있었다. 은행원이 해당 번호를 넘어가 다음 번호를 부른 뒤에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집으로 돌아와 저금통으로 쓰는 찻잔에 불룩해진 지갑을 털어 동전을 쏟아냈다. 전에 있던 동전 무더기와 뒤섞어서 아버지의 흔적을 꼼꼼하게 지워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집을 찾아갔다. 기억을 더듬어 지름길인 모텔촌을 가로질러 갔다. 이 많은 모텔 중 한 곳이 수 년 전 아버지가 약을 먹은 곳일 터였다.


 열쇠공을 불러 들어간 아버지의 집은 흉가에 가까웠다. 왜 집 놔두고 모텔까지 가서 약을 먹었는지 알 만 했다. 온 집안에 거미줄이 가득했다. 이곳에 대한 권한과 책임이 내게 있지 않았다면 한발짝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안방문을 열고 놀라 자빠질뻔 했다. 나 못지 않게 놀란 고양이가 열린 창문으로 뛰어나갔다. 창문을 닫고 밖으로 나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거지에게 살래도 거절할만한 꼬락서니였다. 어린애 유치원 숙제처럼 덕지덕지 붙여놓은 꽃무늬 벽지가 눈에 띄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아버지는 그런 무늬로 집을 꾸미는 걸 좋아했다. 집안의 엉망진창 꼬락서니가 아니라 꽃무늬 벽지 덕에 이곳에 아버지가 살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편함에 가득한 우편물을 살펴보니 대단치 않은 빚이 조금 있었다. 밀린 주민세와 핸드폰 요금, 그리고 위성방송 구독비용이었다. 마지막 항목을 한참 들여다봤다. 아귀아귀 식탐을 부리듯 삶에 탐을 부려 살아남아서 고작 하겠다는게 그깟 티비 시청이라니. 고장난 냉장고와 곰팡이 핀 담요 깔린 집에 살던 주제에 위성방송이라니. 조잡한 그랑죠를 소중하게 품고있는 전쟁 고아 마냥 하찮아서 눈물겨웠다.


 돌아오는 길 모텔촌에 이르러 도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안방의 창문을 열고 다시 나왔다.


 아버지의 물리적인 실체도, 행정적, 전산적인 흔적도 다 지우고 나니 남은 건 정서와 감정이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아버지를 이해하거나 용서하거나 잊고 말기에는 나의 기억력이 몹시도 총명했다.


 큰이모가 힌트를 줬다. 곧 아버지의 사십구제이지 않냐며, 간소하게라도 치르라고 약간의 돈을 보내주셨다. 나는 전혀 치를 생각 없었던 사십구제를 치르면서 아버지에 대해 남아있는 마음의 응어리를 모두 갈음한 셈 치기로 했다.


 이 또한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며, 나 좋을대로 상을 차렸다. 내가 라면 끓여 먹을 때 쓰는 상 위에 장례식장에서 누끼를 따서 뽑아줬던 영정을 배치하고 아버지가 좋아하던 귤과 육포와 새우깡과 쏘주를 올렸다. 위패고 촛대고 향이고 없었다. 석 잔의 쏘주를 올리고 두 번 씩 세 번 절했다. 그대로 끝내기 뭣해서 오래 전 새댁아줌마네 살 적에 그랬듯이 바지라도 까야할지 고민했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영정을 향해 말했다. 욕보셨습니다, 아부지. 저는 나쁜 기억 말고 좋은 경험만 간직할테니 편히 쉬십쇼.


 새우깡에 쏘주를 마시며 음복을 했다. 아버지의 영정을 응시했다. 수십년 전, 번듯한 여행 한 번 못가본 동생 부부가 안쓰러웠던 큰이모 덕으로 나 빼고 놀러간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문상객마다 빠짐없이 칭찬 한마디씩 할 만큼, 마치 세상없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잘 나온 사진이었다. 저 사람을 원망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음을 실감했다. 더 이상 원망거리가 갱신될 일은 없을 터였다. 아무래도 억울했지만 아버지를 뒤따라가 복수할 작정이 아니라면, 주어진 만큼은 살 작정이라면 묻어두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초코파이도 못 먹는 빈 잇몸으로 홀가분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부지, 홀가분하라고 한 말은 맞는데 그렇게까지 홀가분하라는 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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