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
호주에서 귀국했을 땐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소송이 한창이었다. 어머니는 작은 이모와 경기도 외곽 도시에 있었고 아버지는 탄핵된 전직 대통령과 같은 인덕원 모처에 있었다. 난 이혼 재판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경기도 외곽 도시와 서울 구치소와 법원과 동사무소와 병원을 오갔다. 으레 미비한게 있어서, 자주 인덕원 모처의 탄핵된 전직 대통령의 지지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했다.
이혼이 확정된 후, 아버지의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위해 부양의무포기각서라는 것을 썼다. 나 홀로 먹고 살기도 빠듯할 뿐더러 설령 여유가 있다한들 해당 여유를 헌옷수거함이나 폐건전지 수거함에 버리고 말지언정 아버지를 도울 생각은 없다고 적었다. 동사무소 직원에게 각서를 주며 이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 전해달라했다. 공무원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전해줬을리 없었다.
이전에 해왔던 것처럼 단기직과 계약직을 전전하며 글을 썼다. 코로나로 하던 일을 잃었다. 외출이 줄고 약이 늘었다. 어느 구정이었다. 내가 살던 고시촌은 연휴면 유독 혹독하게 우울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는 수없이 많은 배달 오토바이의 배기음에 귀를 기울일 때, 며칠만인지 모르게 전화가 울렸다. 경찰이었다. 아버지가 여관방에서 다량의 약을 먹었다고 했다. 지금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곧이어 구급대원에게 연락이 왔다. 코로나 시국에, 연휴까지 겹쳐 병원을 찾지 못하고 뱅글뱅글 돌고 있다고 했다. 만약 끝내 병원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냥 그대로 길바닥에 던져두고 갈거냐고도 물었다. 그럴 수는 없죠... 말끝을 흐리는 대원에게 뾰족하게 되물었다. 그럼 왜 저한테 전화하신 거에요?
아버지는 돌고돌아 영등포의 병원에 들어갔다. 이름을 바꿔 처음엔 몰랐지만, 공교롭게도 수 년 전 어머니와 나로인해 처음으로 강제입원 당했던 바로 그 폐쇄병동이었다.
강제입원은 직계가족 두 명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혼 이후였으므로 아버지의 직계가족은 세상천지에 나 혼자 뿐이었다. 근처 동사무소에서 떼온 가족관계증명서와 함께 입원동의서에 서명했다. 늘 그랬듯이 최대한 공들여서 아름답게 했다. 그곳이 아버지의 첫 병원이자 마지막 병원이길 바랐다.
면회실 벽 고흐의 그림은 그대로 있는 지 확인할 수 없었다. 코로나라는 구실로 면회는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수시로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었다. 부담이 되는게 전화비 뿐만은 아니었으나 받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괴롭힐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알콜성 뇌손상으로 인한 아버지의 망상은 정점에 이르렀다. 딸이 있다고도 했고, 숨겨둔 금괴가 있다고도 했고, 이십년 전에 작고한 할머니가 찾아왔다고도 했고, 오래 전 허물어버린 고향 본가에 다녀왔다고도 했다.
와중에 꼬박꼬박 3개월마다 아버지와 내가 세상천지에 하나 뿐인 가족임을 나라에서 보증해주는 문서를 들고가 입원 연장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네 번을 반복하니, 더 이상은 안된다고 했다. 계속 입원하려면 이제는 본인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병원의 누구도 아버지에게 입원 동의서 서명을 종용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것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동의서라고 믿었다. 난, 비록 전화로나마 어쩌면 생애 가장 긴 시간 동안 아버지와 대화했다.
알았어, 아부지. 지금부터 아무도 믿지마. 아무도 믿지 말고 나만 믿어. 지금 사람 한 명 보냈어. 내가 보낸 거 들키면 안 되니까 말 걸진 말고. 서류를 하나 줄텐데, 거기 싸인하면 돼요. 그러면 이제 다 끝나.
아버지는 서명했다. 병원 직원과 보건소 직원과 동사무소 직원과 더불어 경찰까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난 제가 죽인 사냥감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냥꾼처럼 한참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한동안은 평안했다. 30대에 코로나 시국을 맞은 나는 단기직을 전전하며 글을 쓰는 형태의 삶이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절감했다. 뒤늦게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정신 없이 바빴고 입원 동의서를 받아낸 이후로는 아버지에 대해 거의 잊고 살았다. 내 앞으로 청구해달라 요청한 약간의 본인 부담금 외에는 나라에서 감당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애국심이 샘솟았다. 딱 한 번 평소의 두 배 가량의 돈이 청구됐다. 전화로 항의했더니 비급여 독감 예방 주사값이라고 했다. 보호자 동의도 없이 그런 걸 맞히나요? 본인이 워낙 강력하게 희망했단다. 나는 혀를 차고 말았다. 그 옛날 <생로병사의 비밀>의 애청자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 지경이 되어서도 아버지는 식탐을 부리듯 삶에 대해 탐을 부렸다.
2년 남짓 일했던 회사를 관둘 때 즈음 병원을 옮겼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더니 끝내 코로나에 함락되어 병원이 폐쇄됐다. 환자들은 곳곳의 다른 병원으로 퍼져나갔다. 아버지가 배정받은 곳은 선유도의 요양병원이었다.
새롭게 입원 동의 서명을 했다. 둘러보니 전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아버지에겐 과분하다 싶을 지경이었다. 이전 시대였다면 꿈도 꿀 수 없었을 괜찮은 환경을 누리는 아버지의 시운에 어수룩하게 감탄했다. 제한되나마 대면 면회도 가능했다. 아버님 보고 가시겠어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끝내 코로나에 함락된 전 병원 사람들의 일처리를 믿을 수 없었다. 적지 않게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 이 사람 우리 아부지 아닌데요? 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얼추 3, 4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난 어? 이 사람 우리 아부지 아닌데요? 하는 말이 튀어나올까봐 입술을 깨물었다. 가죽만 한겹 바른 것처럼 살이내린 두개골 안에 수십년간 숨어있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내 얼굴 안쪽에도 같은 것이 은밀히 숨어있으리라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병과 노쇠의 기색이 완연한 아버지는 그러나 내 모습을 보자마자 무작스러운 욕을 퍼부었다. 병실엔 들어가지도 않고 입구에서만 얼쩡거렸던 나는 몸을 돌려 병원 직원에게 간단히 말했다. 우리 아부지 맞네요.
직장을 관둔 뒤로는 자주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침상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삶이라고 할 수 없지만 죽음도 아닌 무언가를 영위했다. 먹고 싸는, 애완견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남의 손을 빌어 해결하면서도 여전히 허세와 패악이라는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이런 같잖은게 한 번 뿐인 유년을, 결국은 내 인생을 망쳐버렸다는 것에 울분이 났다. 치솟은 울분은 내 어린시절처럼 어둡고 음울한 빛깔로 지글지글 타올랐다.
병실엔 대여섯개의 병상이 있었다. 아버지와 별다르지 않거나 더 상태가 안 좋아보이는 노인들 뿐이었다. 아드님 면회 오셨어요! 활달한 병원 직원이 또랑또랑 외치면 죽어가는 것 같던 환자들이 고개를 길게 빼고 혹 자기 아들인지 쳐다봤다. 면회 신청서를 적다가 뒷장을 보면 지난주에 내가 썼던 신청서가 그대로 있었다. 난 마음 속으로 그곳을 버려진 아비들의 병실이라 불렀다.
아버지를 포함한 버려진 아비의 병실의 구성원들은 조금이라도 몸상태가 좋으면 코골이가 심하다는 둥 냄새가 난다는 둥 툭하면 옆 병상과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은 ‘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난 이런 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주 가끔 이웃 병상과 죽이 맞는 경우가 있었는데, 오히려 이내 병상의 위치나 아예 병실을 옮겨버리곤 했다. 어느 고참 요양보호사가 신참에게 하는 말을 듣고 이유를 알았다. 환자끼리 친해지면 관리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난 아버지가 그것에 화를 내길 바랐다. 유감스럽게도 아버지는 그런 ‘관리’를 인지하거나 고통을 느끼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엉뚱하게도 수십킬로는 떨어진 남양주 병원의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건너편 환자는 구례 병원이었다. 전국의 병원에서 무수한 환자들의 피와 액즙을 받아내던 환자복들이 끝내 버려져 버려진 아비들의 병실에 모여드는 상상을 했다.
병상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아버지에겐 단맛을 느끼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두유를 입 안에서 발효가 되도록 물고 있다가 치주가 다 썩어버린 후엔 코에 관을 꽂아 유동식을 주입했다. 말을 할 수 있을만큼 상태가 좋은 날에는 늘 초코파이를 먹고 싶다고 했다. 어수룩하게 진료실에 가서 잠깐 관을 빼고 초코파이를 먹은 뒤 다시 관을 꽂을 수는 없겠냐고 했다. 직원은 난색을 표했다.
정작 아버지에게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병상 옆에 앉아 휴대폰으로 ‘장례 비용 평균’이나 ‘유골 합법 매장’ 같은 키워드를 검색하다 시간이 됐다 싶으면 돌아올 뿐이었다. 돌아가려는 내게 아버지가 말했다. 벌써 가냐? 서운하다, 서운해.
아, 이 사람을 죽여야겠구나. 연기처럼 희미했던 생각들이 엉겨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버지를 찾아오는 것이 아직도 사과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버려진 아비들의 병실에 있는 처지면서도 나의 병문안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세상이 뒤집혀도 결코 반성도 사과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를 누구에게나 평등한 시간의 흐름으로 곱게 보낸다는 것은 가혹하리만큼 부당했다. 사과를 받을 수 없다면 후회라도, 혹은 경악이라도 끄집어내고 싶었다. 스스로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합리화하고 있을 그 인생이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 뒤늦게나마 깨닫게 하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 아버지는 비자연적 방식으로 죽어야 했고, 내 손에 죽어야 했다. 그래야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었다.
결심을 하고도 결행을 미룬 것은, 그것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끔찍하게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라는 걸 짐작할 만큼의 상상력은 있었기 때문이다.
버려진 아비들의 병실의 담당 직원은 딱히 직업 의식이나 꺾이지 않는 신념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타고난 사람이었다. 고통의 신음과 찌르는 악취가 가득한 지옥같은 곳을 디즈니 공주마냥 발랄하게 누비고 다녔다. 숫제 콧노래까지 부르며 기저귀를 갈고 손발톱을 깎고 수염과 머리와 코털을 다듬었다. 병상마다 카네이션을 달아둔 것도 그녀인 듯 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법한 조잡한 만듦새였으되 칙칙한 병실에서 거의 유일하게 화사한 색으로 빛났다. 실용적이게도, 카네이션은 사람이 아니라 자리에 귀속되어 있었다. 옆환자 코골이에 항의한 아버지의 자리를 옮겼을 때, 벽면에 붙은 카네이션은 그대로였다. 옮긴 자리 벽에도 카네이션은 있었으므로 아버지는 그것을 새로 제 것 삼으면 되는 모양이었다.
하루는 면회 온 내게 예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희소식을 알렸다. 아버님이 아주 점잖해지셨어요. 어쩜, 이젠 욕도 전현 안 하시구 아주우 의젓하세요!
아버지는 죽어가고 있었다. 표정을 일그러뜨리거나 고통의 신음을 내뱉을 힘조차 없었다. 힘껏 내리친 줄다리기 줄의 파동이 잦아들듯 아버지의 생명도 그래 보였다. 의사는 여름이 고비라고 했다. 슬슬 생각해오던 구직을 미루고 아버지의 죽음을, 혹은 나의 결단을 기다리기로 했다.
종종 정신이 돌아오면 아버지는 가족 얘기를 했다. 자기 부모에게, 그리고 형제와 그들의 아내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와 이모들에게는, 무엇보다 나에게는 미안하지 않냐고 울부짖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광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이제는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죽여야 한다. 다시 한 번 다짐했을 뿐이다.
때론 그들이 면회를 왔다갔다고도 했다. 어수룩하게도 원무과에 가서 확인하고 나서야 꿈이나 환시임을 알았다. 그들에게 연락을 해야할까 고민했지만, ‘다 끝나고’ 난 뒤가 적절하리라고 고쳐 생각했다.
바람이 추워지니 또 겨울이 고비라고 했다. 여름에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느냐 항의하기엔 아버지의 상태는 확실히 더 안 좋아보였다. 겨울은 커녕 해를 넘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가을과 겨울의 갈피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횡설수설이었지만, 임종을 지키러 오라는 뜻임을 알았다. 택시기사는 최대한 서둘러달라는 내 사정을 짐작했는지 사정없이 차를 몰았다. 이러다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가겠다 싶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마냥 기다릴 수 없으니 집에 가라고 했다. 아니, 말씀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한테 말한대로 다시 돌려놓으세요! 하고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돌아올 때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뭔가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뜻밖에 별달리 준비할 것이 없었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장례식장이란 예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했다. 내일 몇 시 쯤 가겠다고 할 수도 없었고, 차마 노쇼를 할 수 없어 모종의 조치를 취한 뒤 모셔왔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의 잔소리에 라면 대신 밥을 해먹었다. 동전처럼 생긴 쇳조각이 박힌 칼갈이에 칼끝이 온전한 부엌칼을 정성스럽게 갈아 한참 그 날을 들여다보다가, 애호박을 썰어냈다. 죽이려는 의도와 행위와 결과가 결합되면 살인이다. 결과가 빠진다면 살인미수다. 의도가 없었다면 과실치사가 될 것이다. 행위없이, 살해 의도와 죽었다는 결과만 있다면 그것은 어떤 죄가 될까?
아버지는 ‘오늘을 못 넘길 것 같은’ 상태로, 심지어 ‘아드님 오시는 중에 가실 수도 있는’ 상태로 일주일을 버텼다. 마치 나의 결행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고 나의 우유부단함을 비웃듯이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