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방금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다. 몇 번이나 반복된 긴급 호출에 지쳐 꼭 임종을 지키는 의미가 있을지 의문을 가졌던 참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치사스러운 의문에 항의하듯 가버렸다.
아버지는 ‘오늘을 못 넘길 것 같은’ 상태로, 심지어 ‘아드님 오시는 중에 가실 수도 있는’ 상태로 일주일을 버텼다. 몇 번이고 지옥에서 온 폭주기관차처럼 모는 택시를 타고 가서 지루하게 느려터진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택시 라디오에서 죽음과 무연했던 사람들이 사고와 범죄로 죽어나가는 뉴스가 나오는 동안 도리어 죽음과 가장 가까운 아버지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버틴다고 버텨지는 것도, 안 버틴다고 안 버텨지는 것도 아니라고, 상황을 전해들은 어머니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의사가 내 도착을 기다려 한시간 늦은 사망선고를 했다. 다발성 장기부전. 늙은 장기가 제 기능을 못해서 죽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자연사라는 것이었다. 끝내 아버지는 모두에게 평등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죽었다.
병원에 따로 자리가 없어 아버지는 커튼을 쳐둔 병상 위에 그대로였다. 아버지가 자주 눈을 굴리며 병실의 침대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모르긴 몰라도 지난 일 년 십수 명의 죽음을 봤으리라. 그토록 죽음이 흔할지라도 여전히 죽음은 전인미답이었으리라.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것에 심장께가 조금 따끔했다.
미리 점찍었던 장례식장에서 운구차를 불렀다. 운구하는 직원은 단 한 명이었다. 어수룩하게도 베테랑이라 혼자 일하나보다 생각하는 내게 말했다. 자, 상주님은 다리쪽을 들어주세요. 아버지의 욕창에서 터진 진물이 손에 묻었다. 그게 소스라치게 차가워서 우리 아빠는 이제 죽었구나, 새삼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병원을 떠나기 전 잔금을 지불했다. 직원이 아버지가 입고 있는 환자복을 도로 가져오면 5만원을 환급 해주겠다고 했다. 헛웃음을 지었다. 말한 직원도 머쓱해 보였다.
아버지를 냉동고에 안치하고 택시부터 잡았다. 난 아버지 가족들의 연락처를 알지 못했다. 직접 찾아가야했다. 블랙 택시라는 것을 처음 타봤다. 좀 멀리 간다면 선산도 날릴 지경이었다. 살아있는 아버지의 형제 중 가장 연장자인 셋째 큰아버지의 동네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이십여년 만에 대면하는 큰어머니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몸의 균형을 잃고 현관문틀에 기댄채 벌벌 떨었다. 그간 아버지가 얼마나 패악질을 하고 다녔는지 그제야 짐작이나마 할 수 있었다. 잘못왔구나 싶었다. 아부지 가셨다고, 다른 뜻은 전혀 없이 그저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하고 얼른 몸을 돌렸다. 블랙 택시 기사가 멀찍이서 장초를 끄고 와서 민망한 듯 말했다. 난 또, 여기서 몇 분 데리고 가신다고.
장지는 테이블 두 개에 그 외의 모든 것을 최소화한 간소한 곳이었다. 평소엔 거의 쓰이지 않아서 창고로 사용되는 곳이라고 했다. 오히려 아버지에겐 맞춤했다. 그마저 과했는지도 모른다. 친지조차 오지 않을테니 그냥 화장터로 직행해도 좋을 뻔했다.
장례식장에서 누끼를 따다가 뽑아준 영정사진을 배치하고, 제일 먼저 그 앞에 초코파이를 올렸다. 죽은 사람은 초코파이를 먹지 못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날 아무 때 애호박을 사러 마트에 갔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초코파이를 보고 불현듯 울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오지 않게 될 친지들의 응대를 대비해 딱 한 명 불렀던 친구가 두 명을 더 데려왔고, 두 명이 네 명을, 네 명이 여덟 명을 불러왔다. 이쯤되니 어쩔 수 없어 아는 모두에게 부고를 전했다. 친구 한 명이 떡과 과일을 가져왔다. 나 주는 줄 알았더니 아버지의 영정 앞 초코파이 옆에 차렸다. 그럴 필요 없다고 하니 아버지가 아닌 날 위해서라고 했다. 논쟁하고 싶지 않았던 난 겨우 한마디했다. 우리 아부지 약식 못 먹어.
오지 않겠다던 친지들도 결국은 왔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둔 내가 불쌍한 놈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이제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기로 한 나는 그들의 과도한 위로에 고개를 갸웃했다. 장례비 분담하라고 덤빌까봐 이러는 걸까?
다들 늙어서 나도 나이 들었음을 알았다. 아버지 친구가 왔기에 어떻게 알고 왔을까 생각하며 인사하려고 다시 봤더니, 내 친구였다. 간소한 장지가 비좁아서 친구들은 입구 밖 벤치에 길게 앉았다.
아버지는 다리를 구부리고 죽었다. 그대로 굳어버려 펼 수 없었다. 구부린 정강이에 어릴 때부터 봐서 익숙했던 검은 반점들이 박혀 있었다. 아버지가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젊은 시절 교통사고를 당해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수 일 간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버지는 종종 그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까-매. 새-까매! 죽으면 아무 것도 없어. 그냥 까-매! 아버지는 40년간 유예되었던 까-만 세계로 떠났다. 난 그 유예된 시간의 산물이었다. 결국 추가금을 내고 관 치수를 늘렸다. 내가 괘씸해서 엿 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고통 받는 사람보다는, 그냥 끝까지 못된 사람이었길 바랐다.
화장터가 밀려서 아버지는 냉동고에 하루 더 있었다. 화장은 다그친다는 느낌이 들만큼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부서진 아버지의 뼛조각을 분쇄기에 넣었다. 분쇄가 어찌나 빨랐는지 그저 넣었다가 다시 뺐을 뿐인데 밀가루처럼 되어버렸다. 쌀을 가져다 주면 미리 해둔 떡을 주던 옛날 방앗간처럼 미리 갈아둔 남의 뼈를 준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받아든 유골은 작고 가볍고 아직 따뜻했다.
화장터까지 와준 친구들에게 밥을 먹이고 집에 돌아왔다. 책장 한 칸을 비우고 작고 가볍고 금방 식은 아버지를 두었다. 친구들 사준 고기도 몇 점 주워먹고 말았던 나는 그제야 심한 허기를 느꼈다. 라면 두 봉을 끓여먹었다.
책장 위에 올려둔 아버지의 영정이 내 자취방의 꼬락서니를 보며 혀를 찼다. 아버지의 시선을 막기 위해 정수리까지 이불을 뒤집어 썼다. 장례식 내내 말라있던 눈가는 여전히 갈라질듯 건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