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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Dec 29. 2021

나의 왼쪽 시력


나는 왼쪽 시력이 거의 없다. 오른쪽 시야를 100이라 하면 왼쪽은 5 이하다. 밝고 어두움은 구분하지만 사물을 분간하지는 못한다.

다섯살 무렵에 이 사실을 알았다. 사시가 있어 안과에 갔다가 ‘그 기회에’ 듣게 되는 식으로. 나는 아주 어린 날부터, 어쩌면 인생의 첫 날부터 이 조건에 적응하며 자랐고 따라서 진단이 가져온 변화도 처음 한두 해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엄마, 아빠는 달랐다. 한동안은 틈만 나면 내 눈 이야기를 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밥상 앞에서도. 어른의 대화가 내게도 스미고 스몄는지 한번은 대여섯 살의 내가 제법 진지하게 아빠에게 물었다 한다. "그럼 나는 이제부터 내가 하나로 보면 그게 실제로는 두 개인 거야?" '오른쪽 눈에 사과 한 알이니 왼쪽 눈에도 사과 한 알. 그럼 혹시 사과가 모두 2개인 것은 아닌지' 순간 혼동했던 거다. 이제껏 아무 지각도 불편도 없이 살다가, 어른들이 눈 얘기만 하니까.

부모님은 처음 몇 해는 왼쪽 시력을 '찾는 데' 목표를 두고 각지의 병원을 찾아 다녔다. 일곱 살 무렵에 다녔던 안과에서는 오른쪽 눈으로만 보려고 하면 왼쪽이 더 퇴화되니 오른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생활하라는 제안을 했다('치료 '혹은 '처방'이라고는 쓸 수 없다). 때문에 하루 이틀에 양쪽 시력을 다 잃은 처지가 되었는데 그 무렵 다닌 미술 학원이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3층이었다. 난간을 손으로 짚어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오던 기억이 몸에 촉각으로 남아있다. 그 건물  2층에 전당포가 있었다. 한  층을 조심스레 내려와서 전당포 앞 철창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면 든든했다.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부모님의 기 혹은 의지가 좀 꺾였다. 무허가 침술원에서 머리에 긴 침을 맞거나 하는 시절을 거치고 거쳐, 치료나 회복은 전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불편 없이 너무나 잘 지냈기 때문이다. 아빠의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테니스를 내게 가르치고 싶은 꿈을 접은 것 정도가 아쉬웠을까. 공의 움직임을 빠르게 인지하고 몸 동작을 조응해야 하는 구기 종목에서는 실력이 영 꽝이었다(그렇다고 지구력을 요구하는 다른 운동을 잘한 것도 절대 아니었다. 운동을 못하는 이유를 들자면 시력까지 가지 않아도 꼽을 이유가 당장 눈앞에 너무 많았다.)

고학년에 올라가서는 사시도 많이 교정돼서 그 또한 괜찮았다. 어릴 때 친구들과 싸울 때 논리로 막다른 구석에 몰린 친구들이 내게 툭 던지던 말이 있다.  

“야, 너 근데 지금 어디 보냐? 똑바로 보고 말해." 


그런 말 앞에서도 나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어. 니 마음. 니 마음 본다. 왜?" 혹은,

"어. 니 머릿 속. 네 생각 내가 다 알고 있지. 너 지금 쫄리 잖아. 너도 니 좋은 눈으로 상황을 똑바로 봐."

아무튼 부모님에게는 마음의 짐이었으나 나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제 멋대로 늘어나는 체중에 비하면 왼쪽 눈의 시력은 얼마나 사소한 일인가? 같은 생각을 했던 거 같다.  

물론 어떤 지점에서 행동을 제한하고 사소한 지점에서 몇 가지 습관을 남기기는 했다. 우선, 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운전석 쪽 사이드미러를 자연스럽게 보기 어렵다.  운전석이 왼쪽에 있는 한국에서는 특히.  

일할 때는 1번 모니터를 가운데 놓고 2번 모니터를 오른 편에 놓는다. 부득이 2번 모니터를 왼편에 놓게 되면 2번 화면에 슬랙과 카톡을 열고 소리 알림 버튼을 놓는다. 이렇게 하면 왼쪽을 신경 쓰지 않고 일하다가 알람이 있을 때만 보면 된다.

여럿이 나란히 걸을 땐 일행을 오른 편에 둔다. 왼쪽에 사람이 서면 그 이의 표정이나 몸 동작을 빨리 알아채기 어렵다. 처음에 어떻게 섰든 내가 자연스레 대열의 왼쪽 끝을 찾아가는 식이다. 같은 이유로 학교 다닐 때는 짝궁에게 내 오른 편에 앉아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이 지점에서는 가끔 오해도 산다. 한번은 동료가 내 자리 왼편으로 다가와 서 있는 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 화를 낸 적이 있다. 그는 방해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조심스레 온 것인데 눈치 채지 못한 나는 놀래키냐며 한 소리를 했다. 마음 좋은 후배는 “깊이 집중하셨나봐요”라고 했는데 내게 그런 집중력이 있을 리 없다. 시야가 좁고 감각이 둔한 탓이다.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은 뒤로는 이름 부르고 오라고 미리 부탁하곤 한다. 혹은 사무실 왼쪽 모퉁이 자리를 찾아 앉는다. 왼쪽에 벽을 두도록.

그 외에 또 뭐가 있을까. 오른쪽 시력을 잘 지켜야겠단 생각을 한다. 결막염 유행하면 알아서 피한다. 혹시라도 시술이 잘못 될까 싶어서 안경 벗고 싶지만 라식이든 라섹이든 안 했다. 시야를 가리는 캡 모자는 거의 쓰지 않는다.

앞뒤 없이 왼쪽 시력 얘기를 하는 이유는 며칠 전 동네 뒷산을 오르다가 만난 들개 때문이다. 볕이 뜨거워서 그날 따라 모자를 썼고 귀에 이어폰도 꽂은 채였다. 어떤 일 하나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깊은 숲 길로 접어 들어 비탈을 오르려는데 문득 왼쪽에서 무언가 물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목줄이 없고 털이 부시시했다. '얘가 언제부터 나를 따라 오고 있었지. 오른쪽이면 더 빨리 알았을텐데...’

날 공격할 것 같진 않았는데 내가 갑자기 달리면 판세가 뒤짚힐까봐서 일단 견시見視, 아니 견견見犬. 일단 주의 관찰 하기로 결심. 경계 태세를 높이고자 걷는 척하며, 개의 왼편으로 바꿔 서 섰다(개가 내 오른쪽 시야에 들도록). 그랬더니 이 놈이 다시 내 왼편으로 온다. 내가 다시 위치를 바꾸면 개도 이어서 제 위치를 바꿔 모든 시도를 허사로 만들고 일을 제자리로 돌려 놓는 식. '얘가 지금 나하고 뭐하자는 건가? 혹시 내 약점을 알고 공격하려는 건가' '공격을 하려면 차라리 빨리 해라. 탐색전 싫어.' 하는 데 까지 생각이 흘렀다.

바짝 긴장한 십 여 분. 혼자 걷는 산 길이라 무서웠는데 다행히 반대쪽에서 등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들개가 그 편으로 붙었다. 그쪽을 따라 붙기로 작정했는지 나 따위는 다시 돌아보지도 않더라.

나의 왼쪽 시력. 평소에는 개의치 않고 의식하지 않고 지내지만 이런 일이 있으면 생각과 감각의 버튼이 켜진다. 약점일까? 불편한 지점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내 왼쪽 눈은, 나에게는 어떻게 해도 나로서는 결코 온전히 볼 수 없는 것, 하지만 온전하지 않음을 의식하고 보완하고자 노력하면 점점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는 것. 새로운 시야, 혹은 관찰의 깊이를 주기도 하는 것. 한편으론, 한 순간에라도 무심코 둔해지면 바로 닫히는 시야. 곁에 있어도 볼 수 없는 것...  그런 사람, 세상의 어느 동네, 어떤 일의 이면을 상징하는 감각의 통로다. 아마도, 어쩌면 그런 것 같다.

신경학적 사실과 거리가 먼 은유이겠지만 우리들 모두는 각자의 결점을, 실은 결점이 아닌 고유함을, 일상의 서사 안에서 설득하고 설명할 은유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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