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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Feb 28. 2024

언어를 찾아서

작업 노트 0


24.02.28



오랜 시간을 보내는 방에는 같이 시간을 보내는 물건들이 있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 공간에서 주워온 돌멩이, 철학 합숙으로 통영에 갔을 때 미술관에서 산 컵 받침, 각성을 위해 거진 매일 마시는 커피 용기, 에스프레소 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현무암, 루드락샤 씨앗으로 직접 만든 염주, 유칼립투스와 소나무 아로마 오일, 절규 피규어 로즈, 생각하는 사람 피규어 고래, 마셜 스피커, 황동 전기 포트, 책상 위 공간을 나누는 선반들, 북 다트 수천 개, 책갈피 대용으로 쓰는 향초 필터 100개, 라미 만년필, 몰스킨 노트 3개 그리고 책. 책. 책.


 옷장에는 20년 된 옷부터 최소 3~5년 된 옷들이 있다. 애용하던 빨간 티는 20년이 훌쩍 넘었는데, 이제는 구멍이 여러 개 났다. 세 보니까 7개다. 언제 버려야 하나 생각만 하고 결국 또 입는다. 양말도 마찬가지다. 신을 때 꺼내면서 '구멍 났네?'라고 느끼지만 일단 신는다. 이번만 신고 버려야겠다, 하지만 자기 전 씻을 때 양말을 벗으면 아무렇지 않게 두다가 결국 잊고서 빨아버린다. 빨래를 갤 때 구멍을 다시 발견한다. 그러면 이왕 빨았는데 한 번 더 신지 뭐, 서랍에 넣어둔다. 신발도 닳도록 신는 건 마찬가지다. 가장 자주 신었던 신발은 10년 전 누나가 사준 운동화다. 딱 봐도 다 터지고, 헤졌지만 그냥 신었다. 길 거리에서 내 발을 보호해주는 기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부엌 찬장 문에는 15년도부터 찍어 온 폴라로이드 사진과 여러 증거물이 부착되어 있다. 대부분 나를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 나를 찍어준 마음, 나를 그려준 마음,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과의 마음. 기억하고 싶은 것들도 있다. 길렀던 개, 전시 굿즈, 티켓, 약 3년 동안 주말마다 찾아가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을 보냈던 카페의 스탬프 카드, 사진 찍는 친구가 선물해준 사진, 유년 사진 등등.


 플레이리스트는 약 3~5년 전 그대로다. 320곡이 있다. 13년도 1월부터 21년도까지 사용한 '에버노트'에는 약 2,000개의 작업 노트가 있다. 21년도부터 현재까지 사용하는 '스크리브너'의 작업 노트는 약 470개, 글자 수는 약 400만 자다. 책은 읽기 시작한 22살부터 군대 시절 약 150권, 13년도부터 15년도까지 대학 시절 대출 권 수 약 1,000권, 15년도부터 작성하기 시작한 개인 독서 목록 중 읽은 책은 약 200권, 읽지 않은 책은 약 700권이다. 7~8평 남짓 원룸 방에서 사는 나의 집에 켜켜이 쌓인 책은 약 510권이다. 책 장사나 글쟁이 노릇을 하는 게 아니므로 이 모든 글자와 책은 모두 창작을 위한 누적이다. 글자나 책 중 의미없어 보이거나 도움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은 없애거나 애초에 갖고 있질 않다. 13년도 5월부터 게으르게 적기 시작한 몰스킨 노트는 약 5권이다.


 담배는 16년도 하반기부터 피기 시작해 지금까지 끊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하루에 2~3개피를 피다가 3일에 1갑 정도로 18년도까지 유지됐다. 19년도부터 하루 반갑으로 늘어났다가 21년도인가 22년도부터 전자 담배로 갈아탔다. 이때부터 하루 반갑~1갑으로 조금 늘어났다. 지금까지 핀 담배 갯수는 약 25,500개 정도다. 담배값은 대략 600만 원이 나온다. 커피는 14년도 중반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하루 에스프레소 2샷 기준, 지금까지 마신 커피는 약 3,800잔이다. 직접 샷을 뽑아 마시는 기준, 에스프레소 2샷 1잔의 가격은 약 450원 정도다. 지금까지 마신 커피 값은 아마 250~300만 원은 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을 같이 보내는 대표적인 물건들이 이렇다. 이것들은 나의 생활을 구성하며, 삶이다. 숫자는 때로 시간을 가리켜주기도 한다. 개수나 액수 등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누적시킬 때 그렇다. 이런 상상도 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나열한 무수히 많은 것들을 오직 단 하루만에 취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로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기계 장치다. 생명과 기계의 차이 중 하나다. 하지만 이런 정량화 측정을 통한 개체 비교로는 안 되는 게 있다. 의미를 발생시키는 언어가 그렇다.


 




 근래까지만 해도 나는 내 방이 싫었다. 모든 게 지겹고, 정적인 게 따분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물건들. 그 자리에서 늘 하던 행동들. 컴퓨터와 접속하면서 벌어지는 여러 행동 패턴도 그렇다. 방에서 작업이 잘 안 된다고 느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려고 하거나 하는. 내 방에서 작업을 하는 건 여러 이점이 있었다. 커피도 직접 내려 마시고, 옷도 편하게 입으며, 발이 차갑지 않게 덥혀주는 난방 장치도 있고, 담배도 편하게 핀다.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외부 자극이 별로 없다.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들을 수 있고, 쉬고 싶으면 쉴 수 있다. 그런데 가로막는 게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에 집중하지 못한다. '집에선 작업이 안돼'라고 생각이 든다.


 위에서 나열한 시간을 같이 보내는 물건들과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다른 무엇'이 분명 존재한다. 이것들은 분위기, 느낌, 기분, 마음, 충동, 직감, 공상, 망상 등으로 기술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앞서 나열한 무수한 수치들 이면에, 바로 이 '무엇'이 있다. 이것도 내 생활을 구성하고, 삶이다. 전자를 '다룰 수 있는 것'이라고 부르면, 후자는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를 견제하고, 충돌하고, 때로는 이겨먹는다. 이 전황이 그날그날 다르다. 하루 안에서도 오전과 오후가, 오후와 새벽이 다르다. 다룰 수 없는 것들은 나쁜 습관, 버릇, 도파민 중독, 귀찮음, 쉬고 싶은 마음, 보상, 욕망 등의 어휘로 설명되기도 한다. '심리학'이라는 표현을 갖고와 하나의 원리처럼 설명되기도 한다. 다룰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룰 수 있어요, 친절하게 알려주려고 한다.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면)으면 그것은 정말로 다룰 수 있게 되고, 그렇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 '왜 다루지 못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 또한 다룰 수 없는 것들을 다루지 않는 것들로 여긴다.


 내 삶에는 다루는 것과 다루지 않는 것이 공존한다. 다루지 않는 것을 위해 다루는 것을 더 다룰려고 마음을 쓰기도 한다. 내 방에서 작업이 안 되니 카페에 가자, 따위가 그렇다. 시간을 같이 보내는 무수한 물건들이 오직 '숫자'로만 느껴질 때가 그렇다. 하지만 숫자 이면에는 다루지 않았던 마음이 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옷에 구멍이 나도 버리지 않는 건 신경써야 하는 마음을 다루지 않기에 무관심한, 방치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새것'으로 보여야 하는 마음이 내겐 없다. 구멍난 옷을 보고 '버리지 왜 계속 입어'라는 마음도 없다. 그런 걸 보는 순간 순식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언어가 내겐 없다. 내게 옷의 시간은 곧 옷의 언어다. 나에게 옷이란 꾸밈과 스타일, 표현과 표현하지 않음, 관심과 무관심 등이 어우러진 그때그때의 언어다. 오래된 옷을 입고 외출을 한다는 건, 남들의 평가나 유행, 매력, 시선 등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다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다루지 않는 언어가 이렇다.


 내가 다루는 언어는 곧 나와 시간을 같이 보내는 온갖 사물들의 언어다. 이 언어에는 의미가 있다. 돌멩이들은 나에게 늘 닻을 느끼게 한다. 피규어들은 박제된 상징을 키치하게 보여준다. 담배와 커피는 건강을 위협한다. 하지만 내 정신은 이롭게 여긴다. 언어와 관련된 노트, 부속물, 컴퓨터에 있는 기록, 책들은 '세계를 다룰려는 마음'이다. 나는 왜 이런 삶을 사는가? 취미라고 부르기엔 너무 과도하진 않은가? 근 10년에 걸쳐 이런 삶을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에의 적응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의미가 있다. 이건 내 생활이나 삶의 순간순간과는 거의 무관해 보인다. 돈을 버는 일, 세금을 내는 일, 원룸에서 지내기 위해 지탱되어야 할 각종 행동들과는 무관해 보인다. 원룸의 세계와는 무관해 보인다. 


 




 원룸의 세계는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다. 카메라 한 대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을 관음할 수 있고, 온갖 물건들을 나열해 가능한 행동을 추론할 수 있고, 인간이라는 한 생명체가 21세기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여러 장치를 통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를 찾고 만드는 건 이런 세계론 부족하다. 일상의 세계를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 해도, 그 언어는 그 세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애초에 세계에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없는 걸 있게 만들기 위해 삶을 살았던 게. 나는 실제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다른 현실'을 갈망했다. 그것들은 때로 공상이나 망상으로, 여러 욕망이 쉽게 충족될 수 있는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했다. 아버지의 빚 문제가 해결돼 다시금 우리 가족이 안정적으로 사는 모습. 매일을 그렇게 복권을 긁어대니, 그래 차라리 1등이라도 당첨되서 이제는 해방되었으면 좋겠다는 모습. 공부를 잘 해서 인정을 받는 모습.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주는 장면. 어떤 낭만적인 사랑이 이뤄지는 순간. 나의 창작물로 감탄을 자아내는 장면.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모습. 10대 때 이런 망상을 했다. 한 인간이 무언가 대단한 걸 해내려고 할 때, 그 동기나 목표가 처음부터 대단한 건 아니다. 존경하는 한 미국 철학자는 어릴 때 따돌림 당해 힘을 기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철학 공부를 하게 됐다. 당연히 그의 성숙한 중년의 모습은 그것과는 전혀 무관해 보인다. 그의 이론은 더욱이 '중재'의 성격이 강하다. 힘에 의한 복수나 보복 따위와는 전혀 무관해 보인다. 당연히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다른 현실에의 갈망'은 10때의 그것과는 다르다. 공부를 잘 하는 걸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고, 얼마나 독특한 관점의 언어를 내놓느냐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환상도 완전히 사라졌고, 관계에 대해 어떤 인격인지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현실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그대로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의 구조는 변했다.


 작업을 한다는 건, '다른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언어를 다루는 여러 정신을 만나는 일이다. 목적은 나 또한 현실을 다르게 기술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이 작업처럼 느껴진다. 이 작업이란 단어를, 나는 포괄적으로 사용한다. 큰 범주로는 '창작', 작은 범주로는 '창작에 수반될 여러 반복 행위'다. 현실을 다르게 기술하는 언어를 만나기 위해 문학이 아닌 철학과 인문서 일반을 선택하게 된 건 나의 개인 성향이다. 20때 초중반부터 지금까지 읽은 책의 권 수를 모두 더하면 약 1,000권이 될 터인데, 크게 문학과 그 외로 분류하면 3:7 정도다. 시를 쓰고, 또 쓰고자 하지만 문학은 잘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학은 내 기준에서 '다른 현실'의 범주를 충족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불만족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때는 집필을 왕성하게 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킬 것이다. 이 불만족은 거진 10년이 다 되어간다. 15년도 하반기부터 서서히 시작됐다.


 철학 위주의 책을 읽다 보면 간혹 균형잡기가 힘들 때가 있다. 철학도처럼 읽어야 하나, 이 이론을 빠삭하게 파악하여 정리-해제할 수 있도록 읽어야 하나, 개념 계보를 형성하며 이론 전반이 훼손되지 않게 요약할 수 있도록 읽어야 하나,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게 맹점을 파악하며 읽어야 하나 등등. 책 자체가 이런 자극을 주기에 그렇다. 어떤 책은 그저 생각없이 읽으라고 하는 반면, 어떤 책은 너의 생각을 모두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될 걸?이라고 거침없기도 하다. 나의 작업을 위해선, 이 읽기 태도를 조금 정돈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내가 소위 어려워보이는 책을 읽는 방식은 이해와 적용, 응용이었다. 다만, 불성실했던 건 사실이다. 이해든 적용이든 응용이든 모두 게을렀다. 그래서 지금 이 지경까지 떨어진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18년도까지는 의미를 차곡차곡 쌓는 태도로 임했었다. 곱씹고 곱씹어 마치 발효주를 만들듯. 하지만 19년도부터는 완전히 잃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나의 방황은 더욱 거세졌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각도로 이 '삶'을 다룰려고 시도했던가. 얼마나 많은 언어로 시도했던가. 이 모든 문제 상황의 발단에는 바로 나의 직관이 있다. 직관 이놈이 나에게 주어지는 '다루지 않는 것들'을 증식시킨 꼴이다. 직관은 정말 목줄 풀린 개같다. 다크나이트에서 조커가 묘사하는 장면이랑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풀리면 걍 가는 것이다. 뒤늦게 여기가 어디야 두리번거린다. 그게 직관이다. 개와 다른 점은, 가는 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직관이라는 시간 의식 혼자 간다. 아마도 내가 '다른 현실'을 하나의 큰 주제로 삼고 있는 건, 직관의 성향이 반영된 것일게다.


 다시 본격적으로 내 삶을 견인하기 위해 서서히 시동을 걸고자 한다. 작업 노트를 좀 더 성실히 작성하려고 한다. 이 작업 노트가 앞서 나열한 무수한 물건들처럼 의미와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될 사물이 될지는 모르겠다. 누적은 직관과 다르다. 그래서 내가 다룰 수 있을지 여전히 확신은 없다. 분명 현실의 순간들은 이 작업을 위협하고 위배하고 배신하라고 부추길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에 없기 때문이다. 이걸 내가 해줘야 한다. 현실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줘야, 현실로 느끼고 할 수 있다. 나에겐 종교도 없고 미신도 없다. 하지만 신성과 마술이라는 힘을 느낀다. 언어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다룰 수 있는 언어를 찾기 위해 삶을 살기 때문이다. 시를 쓰려는 마음은 여전히 붙들고 있다. 아직도 포기되지 않는다.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 마음을 포기해야만 무언가를 쓰게 될 수도 있다. 언제부터 뜻대로 삶이 살아진다고 생각했는지. 그건 나라는 인간의 적응과는 전혀 다른 길인데.


 앞으로 '숫자'가 더디게 늘어나길 바란다. 가속한 적은 없어도, 아무래도 나와 맞는 속도는 아닌 거 같다. 2024년에는 딱 30권만 읽었으면 좋겠다. 아니, 10권으로 낮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책 목록에 있는 모든 책은 죄다 가치가 있는 책이고, 읽으면 읽을수록 도움이 될 책들이지만 그래도 타협해야 한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유한성을 잘 못 다루는 것도 나의 성격이다. 인식의 독감을 수차례 앓고 나서야,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다. 사물들이 분명해지고 있다. 처음부터 타당했던 돌들이 부럽구나. 그게 너의 적응이라면, 나 또한 적응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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