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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Apr 30. 2024

리뷰 - 단독성들의 사회

작업 노트 7


24.04.30



[단독성들의 사회]는 작년 9월 말부터 읽기 시작해 3번째 읽는 중이다. 좋은 책을 읽으면 남김 없이 발라 먹고 싶어지는 게 나의 버릇인데, 이번 책은 좀 과도한 거 같다. 책에서 인용, 발췌, 참고하는 모든 문헌을 하나하나 찾으며 국내에 번역된 책들을 대략 30권 정도 추렸다. 욕심이 조금 과했나 싶다.


 이 책은 처음 읽자마자 반드시 추천해야만 하는 책이라고 느꼈다. 동시대의 주요 현상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은데, [단독성들의 사회]는 그 역할을 꽤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특히 '가치'를 둘러싼 우리네 정서 반응에 그렇다. 그 이전까지 사회 내 통용되는 온갖 '가치 사용법'에 혼란을 느낀 나로서는, 아주 숨통 트이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표지는 이렇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목에 딴지를 좀 걸자면 '과잉 히스테리'는 잘못된 키워드다. 심리학이 유행하니 자극적인 키워드로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편집자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책의 본문은 '정신병리'에 대해서 어떠한 전문적 입장을 서술하고 있지도 않고, 무엇보다 '과잉 히스테리'라는 표현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책 본문에 '히스테리'라는 단어가 단 1번도 나타나지 않는다(이 강박적인 활자 중독자의 집요함). 그래도 '21세기 진짜 '자본'론!, 21세기 최고의 마케팅 교과서!'라는 띠지의 문구는 부분적으로 옳다. 개인이 역량이 되면 마케팅에 있어 훌륭히 써먹을 수 있는 아주 잘 차려진 밥상이 될 것이고, 오늘날 노동과 관련해 밥벌이에의 방황을 겪고 있다면 부분적으로나마 갈증을 해소시켜줄 시원한 음료가 될 것이다. '과잉 히스테리 사회'는 전적으로 틀린 말이다.


 저자인 레크비츠가 밀고가는 개념인 '단독성'을 빌리자면, 해당 책은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충분히 '단독화'에 성공한 책이다. 21세기 사회는 '문화자본주의'와 밀접한 교섭을 맺고 있다. 문화자본주의란 문화라는 이름으로 유통-생산되는 가치 재화로 경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걸로 거칠게 스케치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화자본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가? 레크비츠는 여기서 '단독화'에 성공한 문화 재화들이 생산되고 소비됨으로써 작동하고, 이들의 주요 타깃은 '정서'라는 점을 서술한다. 즉, 정서를 자극하는 데 성공하여 주목을 받고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복잡도와 내재적 밀도를 갖춘 것으로 평가될 때 그 재화는 단독화에 성공한 것이다. 21세기 현대 사회는 이런 단독화에 성공한 것들만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추구되고, 많은 이가 '일반 대중'으로 참여하고 있다. 내가 느끼기론 이 '비교 불가능성'이라는 특약 조건 때문에 21세기 사회 현상들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데 가장 큰 애를 먹는 거 같다. 그래서 기존 산업 근대부터 통용되던 사회논리로 현 사회를 설명하려는 우를 범하기도 하고, 당연히 들어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가치 평가로 결론을 내려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이렇게 1차적으로는 현 사회 현상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부당하게 보지 않고 좀 더 그 자체로 볼 수 있는지를 먼저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잘 체화할 수 있다면, 2차적으로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전략 기획을 세울 수 있다. 당장 떠오르는 단순한 결론만을 먼저 말하자면, 1차적으로 배웠을 때 얻는 혜택은 일상 속 경험들 속에서 마주하는 '실망'을 좀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2차적으로는 별로 권하고 싶진 않으나 거진 모두가 그런 요구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걸어들어가야 함에 심심한 응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해당 리뷰는 개인적인 정리-재서술의 목적 외에 다른 의도는 없으므로, 이왕이면 직접 읽길 권하고 싶다.






1. 가치를 배제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그 무엇도



처음 '도시'에 대한 사회학 저서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자 호기심이 있었다. 그것은 '산업 근대 사회의 논리와 윤리'라고 묶어 표현할 수 있을 표준화, 평준화, 일반화에 대한 것이었다. 20대 때부터 또래와 사회를 관찰하며 느낀 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분, 느낌, 정서, 감정, '나'에 온 관심이 쏠려 있는 듯했다. 예술이라는 수행을 하는 학과를 나와서 그런 분위기에 더 쉽게 노출되었던 건 착오가 아니었다. 창작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점점 기분이 좋은 것, 환기가 되는 것, 자신의 감정, 이미지로서의 자극에 꽤나 많은 것들을 투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는 노동, 일자리, 가족, 삶 전반에 걸쳐 아무런 증상도 없이 재빠르게 전염되고 있는 듯했다. 쉽게 말해 현 대한민국 2030 사람들에게 산업 근대의 노동으로 일평생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가당키나 할까? 생각해 보면, 그들의 발작적인 거부 반응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유년부터 받아온 온갖 영향들이 조각조각 모여 정체성을 일군 상태에서 대뜸 다른 판본으로 갈아끼우라는 건 게임 세계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실현'이니 삶의 질이니 라이프스타일이니 감수성이니 하는 것들로 일상을 채워가는 데 어떠한 방지턱도 느끼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의존성 약물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좋게'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로잡혀 있는 듯 보였달까.


 그리고 이런 의문은 기본적으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부터가, 과연 가능할까? 아니, 절대 불가능하다고 어떤 상상의 막장을 느꼈다.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던 게 산업 근대 사회의 논리와 윤리였다. 표준화, 평준화, 일반화의 사회논리가 없었다면 현 사회의 온갖 기반은 불가능하다는 걸 하나하나 배워갔다. 그래서 더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긍정이 잘 안 된다. 주변 사람들은 꿈에서라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가치 없게 느껴지는 걸 어떻게 가치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나 있을까.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걸 어떻게 아무런 정서가 느껴지지 않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무관심이 아니고서야. 이런 막막함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1세기 현대 사회가 여러 폐해를 야기하는 거 같고, 인간 정신에게 꽤나 부정적인, 특히 이성 사용자에게 무척 몹쓸 것으로 여겨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가령 기계 문물의 사회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성을 소외시킨다는 둥 윤리적 피폐함을 가리키는 비인간화를 야기한다는 둥 쓴소리를 (심지어 아직까지도)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오죽했으면 교과서에도 그런 이야기가 실렸을까. 붙들고 싶었던 것이다. 국가라는 사회 질서, 집단, 공동체를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해 유효하다고 여겨졌던 이념과 인간 모델을 지탱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가치관'을, 붙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인간이 삼삼오오 모였을 때 이들의 '질서 확립'을 추구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접근 중 하나는 가치관을 통일시키는 것이다. 미리 손을 써서 가치관을 통일시켜 놓으면 '공동의 목표'를 수립하는 데 노이즈가 하나라도 줄어든다. 사람 3명이 모이면 한 명 속이는 건 일도 아니라는 가십 차원의 스펀지식 실험이 우리에게 얼마나 뿌리깊게 작용하는지는 잘 알아보기 힘들다. 또 이런 일련의 관점이 현 사회 현상에서 힘을 잃는 이유 중 하나는, 현상 간 비교 불가능 때문이다. 인간이 거시적인 현상을 파악할 때는 칸트 이래로 유행한 인식론을 모델로 삼는다. 부분과 전체가 끊김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부분을 보고 전체를 말할 수 있다. 이 일반화는 레크비츠가 말하는 인지적 합리화에 해당하는 것으로, 아직까지도 우리네 일반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채택하는 판단 방식이다.


 문제는 복잡도가 증가하는 만큼, 우리의 관점은 더 단순해지기를 선택했다는 데에 있었다. 이에 대한 이성 사용자들의 비판, 쓴소리, 걱정과 우려 등은 사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성 사용자들이 자주 간과하는 것 중 하나는 아비탈 로넬이 [어리석음]에서 밝히고 있는 바, 어리석음은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하며 사유와는 별개의 사태라는 것이다. 어리석음 앞에 아무리 사유에의 요청을 던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메랑으로 돌아와 당사자를 공격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이성을 사용해 '합리성'으로 다른 사람의 정신을 소위 계몽시키려는 의도와 목적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잘 못 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놀랍게도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레크비츠는 2가지 주요한 사회논리를 구분한다. 하나는 보편의 사회논리, 다른 하나는 특수의 사회논리다. 보편의 사회논리는 우리가 흔하게 교육받은 것처럼 '공장'의 논리다. 대량 생산하듯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가능케 하는 효율과 자원 풍요의 기반 작업, 평준화된 '정상'을 안정적인 것으로 여기기 위해 계산, 계량, 측정을 기준으로 삼는 작업,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사물-주체-자원으로 순환시키기 위해 표준화를 지향하는 작업 등등. 이 사회논리 위에서 태어나 자란 인간들에게 있어 '개인성'이란 21세기 현대 사회의 '개인성'과 무척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레크비츠는 보편의 사회논리가 무엇을 담보로 소위 '보편을 행했는지' 밝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서의 결핍이었다. 즉 그 사회에서 태어난 인간들은 끊임없이 정서를 억제하고 절제해야 했으며, 개인으로 눈에 띄는 일, 특이한 짓, 독특한 모양새 등은 곧 정상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부터 나타난 대항문화로서의 '낭만주의'나 고급문화로서의 '부르주아식 문화'는 이러한 부작용들을 당당하게 누린다는 '특권'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런 해석은 몇몇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나타난 일종의 프레임이지만, 행위의 특징들은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지속되고 있다. 이전에는 비주류로 여겨졌던 대항문화로서의 특수의 사회논리가 21세기부터는 완벽히 부상해 지대한 주류가 되었다. 이들은 진정성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에서 의미와 가치를 느끼며, 자기 자신이라는 고유성에의 강력한 관심과 흥미를 삶의 질이라는 창안된 개념에 연결시키며, 소비를 할 때도 이전에는 기능적인 재화의 소비만을 했다면 이제는 정서를 자극하는 재화만을 소비한다. 특히 이 '정서를 자극하기'는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아주 막강한 지표가 되어 작동되고 있다. 예시로 가장 먼저 급부상한 '포르노그라피'의 경우 대부분의 이성 사용자에게는 사실 열등함을 자극하여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부정적 평가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해 꽤나 과도한 미학적 접근을 하든, 해석학적 접근을 하든 엉뚱한 합리성을 부여하고는 했는데, 구조로 봤을 때 왜 사람들에게 이러한 '자극'들이 주요한 문화 현상으로 부상했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포착할 수 없었다. 이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 우리나라를 포함해 몇몇 국가들의 집단 논리는 근대 산업의 사회논리에 머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정서 자극은 곧 가치화를 의미한다. 레크비츠는 이에 대해 재귀적 문장으로 그냥 퉁 쳐버리는데, '가치가 있다고 특수하게 여겨지는 것이 정서를 자극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치 있고 특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서를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 가치 있고 특수한 이유는 그것이 정서를 강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했다.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는 명백히 오류다. A=B다. 그 이유는 B=A이기 때문이다. 라는 형식은 동어반복일 뿐 어떠한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저자가 말해주지 않는 모종의 인식을 얻어야 하는데, 보편의 사회논리를 가능하게 했던 형식적 합리화(막스 베버)로는 포착할 수 없는 특수의 사회논리, 그러니까 '단독화 논리'에 대해서 우리는 합리화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게 첫 번째다. 바로 이 허들이, 가로막힘이, 접근 불가능이 '강제로' 들이밀어질 때 단독화 논리 위에서 부정적 가치 평가 말고는 도무지 할 수 있는 게 없어진다. 장도리로 못을 박아야 하는데 애꿎은 판자나 잡아떼는 격이다.


 이 갈등 구도는 본래 예술계에서 아주 비일비재했던 현상이다. 예술에 몸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이 구도에 대해서 나름 본연의 균형을 맞추느라 꽤나 수고롭다. 레크비츠도 이 상태 계보를 잘 포착해, 21세기 현대 사회의 문화 지평은 18세기 낭만주의자나 예술가들의 상태들이 답습되고 있음을 연결짓는다. 거칠게 말하면 이제는 모두가 '예술가'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게 긍정적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찍이 진정성을 답습한 예술가에게 있어 몹시 치욕스럽고 모욕적인 현상으로 다가왔다. 세속화, 속물화가 진행되는 이 대중 현상을 어떻게 욕하지 않고 좋게 볼 수 있을까? 저급함, 키치함, 피상적인, 저열한 등등은 어느 시대건 예술가들의 열등함이었다. 그들이 그런 가치 판단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논리 구조는 소위 '부르주아식 문화'다.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전문적인 차등화를 꾀해 어떤 인식적 우월감을 독보적인 것으로 향유하려는 이 태도는 당연히 열등한 것과 저급한 것에 부정적 가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꽤나 집요하고 강력한 전염성을 띄는 것이라 오늘날에도 그런 인간들이 전문가 타이틀을 붙들고 살아가는 걸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잠깐 삼천포로 빠지자면, 그렇다고 이런 최신 현상을 목전에 두고 '위기' 운운하며 자성의 목소리를 촉구하듯 어떤 실험적 변화를 모색하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전문가와 일반인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는 걸 바라봐야 하는 '리뷰 문화'나 소위 무겁고 진지한 종이 책의 소멸 등은 이전에 그것을 추구하고 마침내 권위까지 얻은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의 강요를 느끼게 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과거를 향수 삼으며 낭만을 호출하기도 하고, 이런 변화에 우리도 적응해야지 하는 따위로 애써 '일반 대중'을 흉내내는 '실험'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일종의 불안정성은 사실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한정적인 처지가 아니다. 무엇이 변하고 있고, 무엇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선별할 것인가는 우리로 하여금 막대한 혼란과 난처함을 유발하는데, 노동 산업 전반, 돈을 버는 여러 방법, 양육 방식, 미래 관리 등등에서도 이미 벌어지고 있다. 단순히 보기에는 전혀 상관없어 보여서 연결되지 않는 이런 각종 현상들의 '공통 분모'는 바로 다른 두 논리의 중첩에 있다. 쉽게 말해 사회는 어떤 분야, 영역이든 '문화화'가 진행되고 있고, 개인은 어떤 순간에는 '보편화' 논리를, 어떤 순간에는 '문화화' 논리를 적용시켜야 하는지 분별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시대적 컨디션이 다른 것도 한몫한다. 이에 대해서는 일단 레크비츠의 해석에 의존한다면, 보편을 행하던 시대에 그것이 유의미했던 이유는 바로 당시의 환경이 인간으로 하여금 '결핍'과 '무질서'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희소한 자원, 희소한 능력, 희소한 음식 등 모두가 다같이 나눌 수 없는 결핍의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일단 균등 분배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다 같이 나누는 평준화, 다 같이 누리는 표준화, 다 같이 속하는 일반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로 그것들이 '긍정'될 수 있었던, 유의미하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그것들이 성공적으로 사회에 적용되어 실제로 작동하고 나니 넘쳐나기 시작한 물질, 사물, 사람 등등이 이제는 결핍 따위는 감각조차 할 수 없게 풍요로워졌다. 바로 이 '풍요' 위에서, 이제 문화화라는 특수의 사회논리가 이제는 '의미 부여', '동기 부여' 따위의 개인 삶으로 그 무게추가 이동한다. 따라서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는 공감도 안되고 상상도 잘 안되지만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은폐되어 보이지 않는 보편화가, 분명 유효하게 작동되고 있지만 주류는 아닌 것이다.


 또 이것은 과잉 밀집된 도시화 속에서 더욱 혼란을 야기하는 조건이 되곤 하는데, 계급에 대한 여러 전문적 해석들은 잠깐 생략하고서, 어쨌든 한 사회 내에서도 이러한 풍요 속에서 태어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이 공존하고 있다는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21세기 현대 사회는 계급을 명시화하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그러한 꼬리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래서 '혁명의 불가능', '정치적 무능' 등등으로 걸러서 포착되기도 하지만, 보편의 사회논리와 특수의 사회논리가 중첩된 공간 안에서, 그것도 단독화가 돋보이는 주류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특권 차이'는 더욱 은폐될 수밖에 없다. 이들을 중재할 수 있는 언어가 자리잡을 시간적 여유 따위 허용하지 않은 게, 바로 지금 시대라는 건 덤이다. 빨라도 너무 빨리 사회가 급변하고 있다는 하소연은 옳은 관점이지만, 도대체 그 '속도'가 무얼 의미하는지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 사물들처럼 순간적으로만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었다.


 이런 조건 위에서, 풍요 속에서 태어난 세대가 문화 자본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으며 자기 자신 또한 진정성과 자기 의미, '나'라는 집착, 정서 자극에의 끝없는 갈증으로 일상을 살아갈 때 어느 순간 '가치 평가'를 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멀쩡히 살아낼 수 없다는 걸 스멀스멀 느끼게 된다. 지루함과 따분함, 심심함을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세대라는 건 단순히 도파민에 절여져 뇌가 망가진 인간이라고, 표현만 다른 A=B / B=A 논리를 펼친다고 무언가 해소되는 게 아니라 별 도움되지 않는 몸부림으로 유도할 뿐이다. 도시를 벗어나 교외지로 나가 평온하고 조용하고 낭만적인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거란 환상이든, 일상 속 자극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관리해 자기 책임의 관할로 두어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환상이든 이러한 대안이라는 가면들은 우리가 어떤 실제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가릴 뿐이다. 그 표정이란, 우리가 왜 이렇게 '정서 자극'에 목말라 하게 되는지, 왜 이렇게 '가치 평가'에 사로잡혀야만 하는지 당장 울어 제끼지도 못하고 시발 지구 종말해 버렸으면 하는 소심한 분노만 꺼내는 마땅히 지을 줄 모르는 금지된 표정이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는 무엇이든 일단 해 보며 살고 있다.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며 과연 이 선택과 행위, 실천이 우리네 삶을 이전보다는 더 낫게 도와주는 것인지 겪어내고 있다. 이성 사용자가 건네는 일련의 인식과 해석이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될 때는, 어떤 안위나 위로, 용기를 줄 때보다 분명한 혼란, 분명한 망설임, 분명한 난처함을 느끼게 할 때다. 그러니까 뒤죽박죽 섞여 진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보다는, 이게 이래서 이렇구나라고 좀 더 분명함을 느끼게 해줄 때가 도움이 됐다는 증거다. [단독성들의 사회]는 그런 방면에서 포지셔닝이 잘 되어 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부정적인 가치 평가에 사로잡힐까? 왜 이렇게 실망을 느끼게 될까? 시기와 질투, 분노와 혐오, 경멸과 환희, 꼴사나움과 부러움 따위의 순간적인 정서 자극으로부터 자율적이지 못할까? 이에 대해 어떤 '본질적인 이유'를 설파하는 책은 아니다. 이런 현상들이 이러한 사회논리로 인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도로 서술하는 책에 가깝다. 하지만 이정도만 해도 현상들끼리 뒤섞이는 것만은 방지할 수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한민국의 각종 정치 지형도, 남녀 갈등, 저출산이든 국민연금이든 사회 현상으로 여겨지는 '문제', 자살률 등등 아마도 레크비츠가 말하는 '신중간계급' 입장에서는 이러한 글로벌한, 코스모폴리탄적 '관심과 지식'을 하나의 역량과 능력으로 갖추길 미덕으로 삼는 게, 우리나라도 여전히 주요하게 작동하고 있다. 심지어 일개 시민들, 개인들에게 이러한 관심과 노오력을 가지라고 아무렇지 않게 권하는 모습은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어떤가? 과연, 저 바깥의 무수한 사회 현상들 하나하나에 내 삶의 자원을 투자할 만큼, 그러한 풍요와 여유의 특권이 가능한가? 사회 속 목소리들은 개인 개인에게 얼마나 막대한 요구를 하는지 잘 몰라 한다.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들에 대해서도 몰라 한다. 윤리적 요구이든, 정체성 인정이든, 지구 문제이든, 사회 문제이든, 정치 문제이든, 한 개인에게 그러한 관심과 지식 습득을 요구할 수 있는 게 으레 당연하다는 건 근대 교육 정신의 모델일 뿐, '자연적인' 당연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인식 분화가 잘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 환경에 대한 거시적인 인식에 대한 분화가 잘 이뤄져야 한다는 요구는 일종의 딜레마다. 이 요구가 만약 과도하게 건네지면, 반드시 거시적 인식에 대해 극단적 입장을 취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문제 해결에 보다 효율적이고, 편리하고, 무엇보다 심리적 소모가 덜하기 때문이다. 이걸 이용할 수 있는 게 소위 '포퓰리즘'이기도 하다. 당연히 특권을 누림으로써 지식 경제에서든 문화 경제에서든 일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자들 입장에서 그들은 같은 사회 속 구성원이지만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진다. 부정적 가치 평가에 대한 욕구를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중국인에의 부정적 가치 평가, 이슬람에 대한 가치 평가, 정신질환자, 범죄자, 사회적 소외자, 국가 차원에서 관심과 연민을 자극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살자' 등은 단순히 우리와 가치관이 다른, 삶이 다른, 그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그나마 '돌팔매질' 당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인식을 갖는 게 최선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개인 개인에게 어떤 발달을 요구할 수 있을까, 막상 고민해 보면 이는 결코 합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라는 보는 방법에의 차이가 먼저 시간적 여유를 두고 점차 공유되어야 하는 게 보다 덜 폭력적인 순서이지 않을까. 


 [단독성들의 사회]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21세기 현대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그려내는 책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 소속되어 '나의 일'처럼 느끼고 살아가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인식 차원에서 그렇구나에 머무를 수가 없이 윤리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화란 무겁고 골치아픈 개념이라기보다 단지 21세기 현대 사회 속 젊은 사람들이 추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진정성'의 다른 이름이다. 진정성은 레크비츠가 말하듯 '다면성'과 '정합성'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비로소 개인에게 그러한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속성이다. 이것은 구조적으로 생산되고 만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루소로부터 파생되어 전지구적으로 전염하고 만 '진정성'이, 그 낭만과 환상과는 다르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전시되고, 연출되고, 의도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다. 진정성 역설은 구조로 인해 형성된다. 그것은 개인의 의미 추구와 사회적 인정 사이에서 겪을 수도 있고, '진정성'이라는 개념 안에서 겪을 수도 있다. 여기에 빠져 양립 불가능을 다루지 못한 채 결국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어떤 갈급함을 느끼는 주체는 또 다시 딜레마로부터 도망쳐 비겁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삐둘어진 주장에 맹목적으로 휩쓸리는 건 경계해야 한다. 


 진정성은 구조적으로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딜레마와 동거할 수밖에 없음을 마주하게 된다. 딜레마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양립 불가능을 느끼며 어떻게 이 불가능을 극복할 것인가?는 철학과 윤리학이 스며들기 좋은 간극이지만, 이성이 끼어들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지형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성을 보다 '잘 활용하기'가 당면한 과업으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지금 그런 과도기를 겪고 있다. 반대로 세상이 정말 멸종 위기에 직면해, 기후 위기가 점차 피부에 도착해 더 이상 '풍요' 따위는 작동하지 않는 기반 구조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정성'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 이후의 세상,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는 감히 추측하기 힘들 것이다. 단순히 결핍이 주요한 목적으로 자리한 초기 근대의 풍경이 도래할 것이라는 환상으로는 부족하다. 결핍-풍요-자책감의 흐름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인류는 '책임'을 의식해야만 하는 시대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이러한 풍토 위에서 어떠한 적응을 해나갈지 미지수인 건 맞다. 개인적으로는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부분적으로 선견지명을 펼치고 있다고 여겨지기는 하는데, 어쨌든 당면한 현실 문제부터 난처한 게 지금 당장이니.


 현 사회에서 살아가기는 곧 가치를 배제하지 않고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모색이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정서를 문화 재화로 삼는 예술계에서는 더 강력한 정서 자극, 더 진정성 있는 '나', 독창적이라는 아기새의 지저귐처럼 '나의, 나만의, 나는' 의미 부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문화 산업계에서는 이러한 트렌드가 보다 일상 차원으로, 보다 다방면의 소비 재화에서 적용되어 있다. 음식, 여행, 인테리어, 수집, 헬스, 명상, 패션, 프로필 등 온갖 '보여주기 전략'에 있어 레크비츠가 포착한 '단독화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건 찾기 힘든 수준이다. 개인적으로는 15년도부터 이에 대한 피로도를 느껴왔으나, 이 피로도가 부정적 가치 박탈로 인해 생긴 것인지, 보다 본능적으로 그 '다음'을 모색하는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현 사회는 레크비츠 말마따나 '가치 투쟁의 현장'이다. 사람들은 가치 설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가치 박탈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다. 그걸 해내야만 살아남는 문화 재화들은, 특히 예술가는 더욱 거기에 목을 매달게 된다. 일반 대중은 그래서 도대체 어떤 '소비자'인가는 현재 '불확실'로 포착된다. 나를 좀 봐달라는 단독화 추구자의 '개인'과, 나를 좀 자극해달라는 정서 소비자의 '개인-집단'의 관계망이, 문화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21세기 현대 사회를 주류로 이끌고 있다. 이 지형도에서 우리는 어떻게 적응할까? 어떤 특권을 누림으로써 적응할까? 누리지 못함으로써 적응에 실패할까?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가치를 설정하기'에 반드시 포섭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일단 유보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긍정적 가치 평가, 부정적 가치 평가 이전에 일단 인식으로 조금 시간적 여유를 버는 것. 이성 사용자로서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하지만 나도 아직 잘 안 된다. 하루에도 여러 번 가치박탈을 발작적으로, 자동적으로 하고 마는 나 스스로를 관찰하며 '에휴 시발...'거린다. 연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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