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와 돌멩이 Jun 08. 2024

분신 의식

내면 작업 20


24.06.08



꿈 (24.06.08)


산 속이다. 우리는 어떤 일행이었던 거 같다. 앞단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결계(?)를 지나 산 속의 어떤 공간으로 나는 홀로 들어간다. 그곳은 신전이다. 작은 계곡을 지나는 다리가 있었고, 그 다리를 비추는 작은 등불 같은 것들을 봤던 거 같다. 나는 그곳을 둘러보며 어딘가로 향한다. 무언가가 시작될 거라는 직감을 느낀다. 갑자기 여자 무리가 하나둘 나타난다. 그녀들은 나에게 일본 풍의 어떤 제례복(?)을 연상시킨다. 색깔 조합은 흰색과 빨강이다. 무수한 여자들이 다 같은 복장으로, 한 손에 흰색 부채를 들고 있다. 상의가 하얀색이었던 건 분명히 기억난다. 긴 치마가 빨간색이었나? 하는 건 느낌일 뿐이다. 그녀들이 하나둘 나타나 자리를 잡는다. 이곳은 산 속의 신전이고, 그래서 광장 같은 평평한 공간이 아닌 돌 등의 경사 때문에 높낮이가 있다. 왜인지 나는 그녀가 어떤 나선형 원을 따라 배치되고 있다는 이미지를 느낀다. 그러다 여왕(?) 요괴(?) 같은, 확실히 '다른 체급'의 한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는 매우 거대하다. 형체가 거대하다기보다 존재가 거대하다. 그녀가 나타나자 가장 중심에 있던 여자부터, 그녀의 부채 끝자락부터 불이 타오르기 시작해 온 몸이 타오른다. 순차적으로 그 뒤의 여자가, 또 그 뒤의 여자가, 도미노처럼 하나둘 타오른다. 분신되는 그녀들이 모두 활활 타오르고, 나는 거대한 존재의 여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위급함을 느낀다. 그녀는 나를 잡으려고 한다. 나는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려고 황급히 달려나간다. 정말 뒷덜미가 바로 잡힐 듯 말 듯 하는 아슬아슬함을 느끼면서, 그 긴박함 속에서 간신히 결계가 쳐진 듯 다른 공간을 벗어나 어떤 일행에 합류한다. 그리고 꿈에서 깬다.






무의식 작업을 안 하려고 했는데...

이런 꿈을 꾸고 새벽 4시 언저리에 잠깐 깼었다.


 살면서 꿨던 꿈을 모조리 기록하는 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꿈을 의식한 뒤로는 처음 꾸는 좀 어마무시한 꿈 같다. 일단 코드로 보면, 한 여자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여자들이 분신함으로써 인신공양 제의를 지낸다, 숲 속의 신전 등 모두 최초다. 꿈에서 여자와 관계가 안 좋았던 적은 있어도, 그것이 폭력적이거나 생명에 위협을 느끼거나 따위의 성질은 아니었다. 그저 사소한 서운함이니 아쉬움이니 속으로만 생각하는 가치 박탈이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아니마는 달랐다. 정말 처음 느껴보는 거대한 존재였다. 여태 내가 꿈에서 만난 아니마는 모두 인간 수준의 아니마였다. 이번에는 여신이라 불러야 하나 싶을 정도로 존재가 컸다.


 좀 당황스럽다. 이런 아니마는 처음 만나보는 것이고, 왜 꿈에서 여자들이 그런 복장을 입었으며, 흰색 부채는 무엇이며, 부채부터 불이 타오르기 시작해 분신을 했으며, 도미노처럼 무수한 여자들이 그렇게 인신공양을 하는 의식을 지내는지, 거대한 존재의 여자는 나를 왜 잡으려고 했는지. 모든 게 처음이고 낯설고 당황스럽다.


 냉정하게 꿈을 보면, 일단 '내가 느낀' 감정이 그렇다. 나는 겁을 먹고 도망치는 모양새지, 실제 거대한 존재의 아니마가 나를 잡고 무얼 하려고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꿈에서 느낀 감정도, 겁을 먹었다,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 따위의 느낌이 다소 모호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느낀 바를 표현하면, 왠지 벗어나야 할 거 같아서 벗어났어야 했다, 다. 그러니까 도망치는 와중에 등 뒤에서 나를 잡으려고 하는 어떤 느낌이나 이미지들은 그저 내가 벗어나기 때문에 붙들려는 형국이지, 전적으로 균형잡힌 구도는 아니다.


 너무 강렬한 이미지들이라서 사실 뭘 알아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오늘 하루는 균형을 잡기 위해 에너지를 써야 한다라는 맹목적인 직관에 따를 뿐이다. 뭔가가 갑자기 일어났다.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미미한 존재인 나로서는 뭘 알아볼 수가 없다. 의식은 의식의 일을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거대한 존재의 아니마는 처음이다.


 그녀가 무수한 여자들을 제물로 삼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작은 나는 관찰한다. 꿈에서 이런 일련의 과정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근대 정신의 눈으로 보면 인신 공양은 매우 잔인하고 비합리적인 행위로, 철저히 금기시되고 윤리적으로 부정적 감정 패치가 이미 끝난 시대다. 그러니까 흔하디 흔한 오늘날의 일반 인간에게 있어 이런 이미지는 몹시 불쾌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어쨌든 무의식이 보여준 건 그런 층위가 아니다. 분신할 무수한 여자들은 존재라기보다는 어떤 사물 같았다. 그녀들의 개성은 느껴지지 않았고, 또 개성을 드러내는 행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타났고, 꼬리 물듯 자리를 잡았고, 타올랐다. 마치 이미 벌어질 일을 위해 어떠한 어긋남도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는 예정조화처럼 거대한 존재를 위해졌다.


 숲 속의 신전은 너무 낯설다. 거대한 존재의 아니마가 무슨 공양을 받는? 느낌은 받질 않았다. 하나의 의식인 건 분명하지만, 그 목적을 모르겠다. 나선형의 곡선이 중심부부터 하나둘 불이 피어오른다는 것. 그 중심에서 거대한 존재의 아니마를 보고, 나는 거기서부터 도망쳐 나왔다는 것. 정말 아는 게 없어서 보이는 게 없다. 융이 왜 신화학을 공부했는지, 꿈을 분석하려면 신화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던 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납득된다. 도대체 서울 태생의 도시에서만, 그것도 작은 방 안에서 책에 둘러싸인 채 거진 평생을 보내는 인간에게 이런 꿈의 소재는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일단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자세를 잡기 위해 이렇게 글을 쓴다. 정리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냥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미지다. 일단. 숲. 산 속의 숲은 나에게 아주 고요한, 정서의 깊은 층위까지 가닿을 수 있는 공간이다. 어떤 숭고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또는 무의식과의 '직접 통로'다. 다만 조건이 붙어야 한다. 반드시 나 혼자만 있어야 하고, 다른 인간 따위는 1도 개입해서는 안 되며 만약 인기척이 조금이라도 드는 순간 이 층위는 산산조각 깨지고 만다. 그런 공간에서 무의식과 일종의 호흡을 할 수 있었던 경험이 몇 번 있다. 가장 최신의 체험을 소환하자면, 22년 3월 관악산에 갔을 때가 그나마 유사하다.


 그때의 기록을 글로 남겨뒀었는데, 꽤나 생생하고 강렬했던 체험이었다. 일단 정신사의 흐름으로 보면 이렇다. 나는 19년도에 매우매우 감당하기 힘든 연애를 비로소 끊어내고, 한 친구의 적극적인 마음에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꽤나 유의미한 여자 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철저히 가치 박탈을 하던, 융의 용어로 말하면 내가 몹시 부정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나의 열등함이 투사되는 유형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돈'도 그렇고, '외향' 활동도 그랬다. 하지만 그 친구와 좋은 관계로 발달시킬 수 있었던 건, 그 친구가 가진 역량과 그릇 덕분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 친구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월등한 사람의 인상을 줬다.

 

 중요한 건 22년도 1월에 그 친구와 이별을 하게 됐을 때'까지'의 내 정신 상태다. 어쨌든 서로 좋고 건강한 관계를 이어가다 합리적으로 이별을 합의했다. 근데 막상 헤어지고 나니 이제 스멀스멀 올라오던 게, 바로 나의 열등함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이 이렇게 열등해질 수 있구나를 그때 많이 느꼈다. 융을 읽고나서 생긴 이해도로 구도를 설명하면 이렇다. 나는 너무 과도하게, 그 친구에게 막대한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붓고 말았다. 그것이 나의 발달이 아닌, 상대의 발달에 초점이 가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나의 열등함이 투영된 '이미지'에로의 투여였기 때문에 관계가 끊어지자 곧바로 불리한 구도가 전면에 드러난다. 즉, 내가 나의 열등함 발달에 에너지를 쏟는 것은 순환 자체의 구도가 '비현실적으로' 단 번에 끊어지는 걸 조율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에게 있고, 이 구도로 내 입장에서 순환이 일어나려면 상대방 또한 나에게 그에 걸맞는 에너지를 보내줘야 한다. 내가 그 친구와 건강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건, 그 친구가 나에게 그런 좋은 에너지를 너무나 잘 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 상황이 변했고, 당연히 이 구도는 지속가능하지 않았기에 합의에 이르렀던 것인데 문제는 나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이 정신 컨디션으로, 충동적으로 산에 올랐던 게 22년 3월 관악산이다. 거기서 내가 나를 '소진'하려고 했던 충동은, 그리고 연주암이라는 절에서 불상 앞에 켜진 촛불을 보고 어떤 구원을 느꼈던 것은, 이번 꿈 속의 소재들과 연결되기에 충분하다. 나를 소진시키려는 충동, 자기 자신을 태워 내는 빛. 이것은 분신 공양과 다르지 않다. 현실적으로 나는 그날 난데없이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정신은 고양되어 있어서 혹사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오른쪽 무릎이 나가 6개월 동안 통증을 느꼈었다.


 내가 나의 정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정리해 보면 이렇다. 자기 자신을 소진시키려는, 소모시키려는 충동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점성술에서도 확인되는 코드이기도 한데, 토성 기질의 인간들이 자주 내보이는 유형이기도 하다. 예전 고대 중국 고전에서는 이런 유형의 인간들을 '수행자'로 부르기도 했다. 사실 좀 더 너그럽게 세상을 둘러보면 간혹 이런 정신나가 보이는 인간 유형들이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뭔가를 갈고 닦겠다며 산 속에 들어간다든지, 뭔가 혼자서 고립되는 걸 자처하며 혼자만의 뭔가를 구축하겠다고 방 문을 걸어 잠근다든지, 무술이나 개인의 역량 강화와 연결되는 행위 전반에 이런 수행자의 면모는 꽤나 많다. 수도승, 수녀원, 사제 등등도 그런 유형의 인간들에게 매우 편안하고 위안이 되는 장소인 셈이다.


 그 날 나에게 어떤 상징으로서 깊게 침투했던 건 '자기 자신을 태워 내는 빛'이었다. 이것은 오늘 꾼 꿈에서 나타난 분신 공양의 좀 더 무의식 입장에 가까운 접근이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결코 보이지 않는 건 무엇인가? 뭔가가 타오르는 것, '분신'을 보면 한 개인의 자유나 선택권 따위의 어떠한 삶에의 주체성이 모조리 '한순간에' 타버린다는 공포로 인해 보이지 않는 건 무엇인가? 그것을 나는 느끼고 알지만, 언어로 무어라 붙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희생? 헌신? 제물? 모두 아니다. 그런 소위 (근대)인간중심적 개념이 아니다. 꿈 속에서 타오르는 존재로 나타난 무수한 여자들은 모두 내가 느끼기로 그런 정신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 외의 행동을 일절 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가 아닌 정신인 것이다.


 의복의 모양과 부채는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르겠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그나마 인접한 코드는 아마 최초의 '퇴행된 아니마 이미지'가 아닐까? 만약 이게 맞다면, 거대한 존재의 아니마를 위해 열등한 아니마의 이미지를 모두 태워 의식을 치르는 모양새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건 나의 유년 시절과 연루된 이미지 연상이므로, 신화적 냄새를 대놓고 풍겨오는 꿈에 얼마나 개연성 높은 접근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머뭇거리게 된다.


 일본 풍 제례 의복을 입은 여자들이 의식을 치르는 숲 속의 신전. 불과 하루 전 난생 처음으로 첫 만다라를 보자마자,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폐허가 된 하얀색 신전을 보자마자 이렇게 강렬한 숲 속의 신전으로 이번엔 '꿈'이 보여주는 흐름은, 일개 인간으로서 너무 당황스럽다. 아니 갑자기 도대체 무슨 일이야? 하는 마음이 들 뿐이다. 외부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무언가를 자극하는 힌트는 또 없다. 그러니까 갑자기 어떤 '여신'을 강하게 인식하는 체험을 했다든지, 신전? 같은 뭔가에 강한 상징을 인식하는 체험을 했다든지 따위가 없다. 돈에의 열등감을 발달시키려고 스트레스 존나 받고, 시 작업 하겠다고 철학 책이니 사회학 책이니 구상이니 에너지 쓰고 있는데 대뜸 신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는 있는데 개인으로서는 도무지 깜깜할 뿐이다.


 다만 아주 희미해서 아직은 직관이 보다 강한 믿음을 주는 건 아니지만, 현실의 내가 조금이라도 '우쭐'해질 때 아니마가 경고를 날리는 느낌이다. 이 부분에 모종의 패턴이 느껴지긴 한다. 그러니까 나는 나 자신을 태워 빛을 내야 하는 인간인데, 어딜 감히? 하는 느낌이랄까. 외부를 향한 존재 위시는 나와 애초에 맞질 않는다. 그런 '방심'은 나에게 독이다, 이런 걸 자꾸 의식하게 만든다. 나에게 이건 억압이 아니라 잘못된 순환이다. 정신 민감도가 어느 정도 길러진 나로서는, 이런 냄새를 결코 놓치지 않으려 한다.


 나선형 원, 여신을 상정케 할 거대한 존재의 아니마는 융의 도움을 빌려 보다 안정적인 언어로 옮겨낼 수는 있겠으나, 지금 이 상황에서 다시 융을 들춰보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건, 겁을 먹고 도망칠 게 아니란 것. 5월에 아니마와 하얀 설국에 입장하기 전에 내가 맨발이라는 이유로 다시 되돌아갈 때 어떤 어마무시한 급류의 탁한 강을 위태롭게 건너야 하는 꿈을 꿨었다. 그 꿈의 물이, 내가 '정신의 준비'를 의식하고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려고 하자 어제 환상 이미지로 '불쾌하지만 얌전한' 고인 녹색 물로 나타났고, 그곳에서 나는 세신을 했다. 만약 이런 패턴이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성에 유의미한 뭔가를 의미한다면, 오늘 꿈에서 나타난 거대한 존재의 아니마는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반드시 내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으로 (나에게 안전하게 느껴질 층위로) 변환되어 나타나줄 것이다. 내가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분신 자체에 엄청난 발작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이런 일련의 무의식 이미지로부터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리면 거대한 존재의 아니마는 이제 더욱 더 선명한 '요괴'로 진화할 것만 같다. 아니마는 이제 나에게 자신의 다음 모습을 보여줬다. 내가 과연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일개 미미한 개인 따위가 과연 받아들이고 자시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의식의 줄다리기로는 답도 없다.


 그 반대가 정답이라는 걸 나의 직관은 알려준다.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나를 내어줘야 한다. 나를 먹을 수 있게 바쳐야 한다. 아마 고대 의식에서 '제물 의식'이 가능했던 건 이런 정신 코드가 실제화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걸, 굳이 연구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정신이 근대 정신에 들어서서 어떤 상호작용으로 말미암아 어떤 특징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는 이성으로 알고 있다. 균형을 맞추는 것. 그것이 바로 내 몫이다. 나를 내려놓고, 내어주고, 먹을 수 있게 바친다는 건 '상징'이지 '현실'이 아니다. 21세기 현대는 상징을 목졸라 죽이듯 철저히 제거하려고 하지만, 좀 더 차갑게 보면 안 그랬던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원래 다수의 인간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던 게 상징이다. 이 구도 때문에 덩달아 집단 의식에 휘말려 상징을 목졸라 죽이면, 이제 소위 일을 그르치는 것이 된다.


 정신은 정신의 일을 하고, 현실에는 현실에 맞춰 의식의 일을 해야 한다. 이런 게 지금 나의 최선이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느껴진다. 이 태도 말고 다른 게 가능한지, 그런 가능태가 나라는 고유성의 다중 세계에 호환 가능한지 그려지는 게 없다. 꿈은 무의식의 턴이고, 지금 이렇게 글로 정리하는 건 나의 턴이다. 지금 놓는 나의 수가 악수일지 다음 수순으로 이어지는 수가 될지는 모르겠다. 이기겠다고 놓는 수가 아니란 건 확신한다. 이건 대결이 아닌 대화니까.


 좀 더 분명해지는 초점이 느껴진다. 이렇게 정리를 하지 않으면, 타오르는 불을 보고 그 중심을 찾질 못한다. 어디에 초점을 두고 태워내야 하는지가 조율되는 기분이다. 일상의 무수한 환경의 가능 자리. Affordance(이거 진짜 한국어로 뭐라고 해야 하지..)라는 자장 공간 속에서 이 초점을 상시 조율해야 하는 게 나의 수행이다. 거대한 존재의 아니마. 숲 속의 신전. 하얀 의복의 타오르는 여자들. 너무나 강렬한 이 이미지가 정신에 또렷이 박혔다, 그런 날로 이 기록을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 만다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