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와 돌멩이 Jun 28. 2024

화해 1

작업 노트 16


24.06.28



순수한 인격을 다루려는 시도. 이는 '자아'라 불리는 인격의 한 상태를 다루는 걸 의미한다. 나에게 이것이 왜 중요한지, 남들과 달리 이토록 진심인지는 몇몇 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심리-정신분석 틀에 따르면 '나'는 아마도 청소년기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아직 현실에 제대로 개입하지 않고 있으며, 현실에의 방어기제로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일종의 불안정한 상태다. 만약 그들의 연구가 사실이라면 지금 내가 하려는 작업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범죄자의 고해성사와 같이, 나는 스스로를 향해 현실적 처벌을 감당하지 않으려 교묘한 기만과 위선을 펼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인지는, 관찰이라는 의식 모험을 통해 확인한 뒤에 판단해도 늦지 않다.


 오늘 관찰을 통해 지금 내 정신에 있어 '자아의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반복적인 네 가지 증상(일단 증상이라고 부르자)을 붙들었다. 1. 가치박탈이라 부르는 공격성, 2. 추상적 사고로 인한 무효화, 3. 청소년기의 지성화, 4. 감각의 열등함. 1~3번은 서로 연루되어 있고 밀접한 관계망을 구축하고 있다. 4번은 성적 욕망으로 접근할 수도, 에로스(관계성)로 접근할 수도 있는 일종의 신경증이다. 냉정함을 고수하기 위해 증상이라 부른 이 네 가지는 나의 '자아'와 관련된, 그리고 일상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의식상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모종의 정신 양상이다. 이걸 다룬다는 게 뭘 뜻하는지는 사실 확신이 없다. 


 메타 인지나 자기 관찰이 잘 작동될 수 있을지도 일단 불신이다. 그러니까 마치 사물-대상을 관찰하듯 일단 붙들고 고정시킨 뒤 이리저리 다룰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치부를 들춰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다롭다, 나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고 이는 나에게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이유의 구구절절은 좀 치우도록 하자. 그냥 해야 된다고 느끼기 때문에 일단 감행하는 게 맞다. 이 무모함이 필요한 이유는, 어쨌든 자아 뒤에 숨어 합리화를 아무리 해봤자 '안 하는 게 나을 걸?'의 뉘앙스만 풍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고 싶지 않아질 뿐 도움되지 않는다.


 여태 살면서 이런 식의 자기 관찰을 감행했던 건 수 차례다. 나에겐 어쩌면 익숙한 일이지만, 그래도 늘 까다롭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하다. 이건 '자아' 때문이다. 자아는, 항상 안전하고 보장되어야 할 중요한 의식이다. 이것을 '자아'라는 개념으로 가정했을 때, 그러니까 모델링을 했을 때 무언가가 그려지는 건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에게 자아란 없다고 주장해도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다. 현실적 증거에 기반한 착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를 말하든, 말하지 않든 이 역동을 관찰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역동이란,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의 정신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는 건 그저 자신의 감정 반응뿐이다. 일전에 시오랑이 '사유란 고통 속에서 탄생한다'고 적었는데, 니체도 그렇지만 나 또한 동의하는 바, 우리에게 배움이란 모욕감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이 문장이 성립될 때의 '상태'란, 바로 자아와의 관계를 겨냥할 때다. 한 인간의 정신에 있어 고통이나 모욕감 따위의 감정이 어떤 성질로 유발되느냐는 상이하지만, 인격의 고통-모욕감으로 일어날 때 그곳이 바로 자아의 집이다. 그러니까 자아라는 개념을 그리는 데 있어 근거로 삼을 만한 감정 반응은 대개 부정적 감정 반응, 거부, 회피, 외면, 무시, 망각, 부인, 괴로움, 모욕 등으로 그것이 자아의 집을 향한 '문'이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부정적 감정 반응 전반을 모두 자아로 귀결시켜서는 안 된다. 또 '나'를 향한 어떤 공격이나 부당함 등으로 인한 반응으로써의 감정도 불필요하게 자아로 귀결시켜서도 안 된다. 여기에 어떤 원칙이나 조건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아와 부정적 감정 반응을 근거로 삼을 수 있을까? 이 얘기는 보다 특수한 맥락이 보태져야 성립된다. 일단 이 부분을 먼저 정리한 뒤, 나의 증상들을 다뤄볼까 한다.






1. 어른이 된다는 것



먼저 성숙-발달이라 부르는 어떤 과정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추적한 심리의 발달 과정 혹은 인격의 성숙함에 있어 현실 사회와 교호할 수 있는 몇 가지 타당성이 있고, 이를 토대로 '어른의 상'을 겨냥하고자 한다. 일단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왜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기본적으로 '어른'은 특정 사회-문화의 여러 문법 하에 추구되는 어떤 시기다. 나라마다 법적 근거로서의 '성인' 기준은 차이가 있지만, 태어난 지 몇 년이 되고 나면 성인으로 인정해주는 법적 승인으로서의 어른이 있다. 또 태어나 자라며 주변 환경을 통해 '어른'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가리키고, 지시되는지의 의미화가 보태진다. 이런 것들은 통념으로써의 어른, 그러니까 몇 가지 자격과 조건을 외부 현실로부터 승인받아 획득하는 일반적인 어른이다.


 반면 정신, 특히 '인격'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다뤄지는 상징 체계로 구축된 어른의 상이 있다. 이때의 어른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중받는 모종의 위신에 가까운데, 일반적으로는 정신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도 특정 사회-문화의 여러 문법에 따라 수정되고 변형되기에 가치로 존속되기 위해선 꽤 복잡한 가치 체계가 지탱되어야 한다. 한 10여 년 전 강상중 교수의 에세이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어른이 없는 사회'는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비판이다. 몇몇 논자들은 지금 사회에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말을 꺼내는데, 이때의 어른이란 성숙한 인격을 가리킨다.


 하지만 '성숙하다'는 것이 무얼 가리키는지는 제대로 밝혀낼 수 없다. 우리가 어떤 면모를 두고서 미숙하다 혹은 성숙하다를 운운할 때 대개는 이기심과 이타심의 균형을 내비출 때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이 구축되기 위해 아주아주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어떤 면모는 '나쁘고', 어떤 면모는 '좋고'를 다양한 어휘로 누적시킨, 그래서 특정 사회-문화적 윤리관으로 소급된 걸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굳이 '성숙하다는 게 뭘까?'를 파고들기 시작하면 너무 방대한 의미망이 드러나 이걸 정식화하는 게 소용이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렇기에 대개는 이런 표현들을 굳이 따져묻지 않고 그냥 '느낌'으로 통념에 따라 이리저리 써먹고 말고 하는 게 효율적이다.


 이 당연한 얘기를 구구절절 써놓은 이유는, 이것이 '외부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자아와 부정적 감정 반응을 연결짓기 위해 필요한 건 외부 현실과 내면 관찰 간 균형을 도모하기 위해 요구되는 모종의 '저항'이 성숙함으로 표현될 때다. 이때의 성숙함이란 별다른 의미가 있다기보다 현실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면모를 지향하기 위한 지시 대상에 가깝다. 중요한 건, 외부 현실과 내면 관찰 간 균형을 도모하고자 하는 바로 그 '저항'이다. 이 저항이 왜 형성되고, 또 추구되는지는 마찬가지 정식화할 수 없다.


 돌아와 말하자면 성숙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한 '발달'이라고 하는 것은 거칠게 말해 한 인격으로 하여금 '최대한' 현실에 적응해 존립하기 위한 과정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이를 위한 '성인식'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오늘날 성인식이란 건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성적 욕망의 자율화 정도? 과거의 성인식은 책임이나 신뢰, 자립과 같은 정신의 고유성과 독립성을 중점으로 의례화되었지만, 오늘날 성인식은 성적 욕망으로 다뤄지거나 아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성년의 날이 있기는 하지만 법정 기념일의 의의와는 달리 그 누가 '성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일깨우겠는가. 난 살면서 또래 애들에게서 듣도보지도 못했다.


 사실 20세기 후반부터 몇몇 학자들이 왜 젊은 세대를 향해 '보육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세대'라고 부르며 근심걱정을 거두지 못했는지, 이 급변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아마 당시 애새끼 같은 젊은 애들이 지금은 중년일진데, 냉소적으로 보면 그저 기존의 '어른'이 소실되는 데에 대한 실망을 젊은 세대에게 투사한 모양이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어른이 없다'는 몇몇의 탄식도 사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실에 적응해 존립하기 위한 과정으로써 '어른'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면, 이처럼 급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문화 속에서 고정된 '어른'은 차라리 폐기하고, 폐기하는 김에 미성숙-성숙이라는 문법도 폐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여전히 통념에서 버젓이 살아 숨쉬는 어휘들을 나 혼자 부정한다고 부정될 리는 없기에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느끼기로 '어른이 된다는 건' 그걸 필요로 하는 인격에 한해서 지향되는 어떤 균형 상태다. 따라서 이 상태는 여러 정신적 맥락을 요구하는데, 이는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상태와 외부 현실 간 불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인정해야 할 저항이 그 중 하나다. 그러니까 21세기에 걸맞게 '어른의 의미'를 사회적-문화적으로 결부시키기보다 '심리적'으로 결부시키는 측면이다. 나는 이것이 일반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건 그저, 내 또래 세대가 자신의 '심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환경에서 나 또한 그런 영향을 받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현실의 측면에서, 주변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위한 '어른'일 뿐이다. 이 맥락을 따라 다시금 재구성한 '미성숙-성숙'은 그저 머무를 수 있는-저항해야 하는 따위의 움직씨로 다뤄질 필요가 있다. 사회-문화가 달라졌다면, 그에 맞는 문법으로 대응하는 게 보다 갈등을 줄일 수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유연함 혹은 유동성의 측면에서 몇 가지 개념 용법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미성숙하다는 건 자신의 상태(정체성)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에 가깝고, 성숙하다는 건 자신의 상태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에 가깝다.


 이에 대한 역동은 역시 외부 현실-타인과의 접촉을 통해서다. 자율성은 몇몇 연구를 통해 이미 밝혀졌듯이, 유아부터 제공되어 있다. 인간은 살아가며 복잡해지고 때로는 단순해진다. 즉 이것의 역동이 나에겐 '발달'인 거 같다. 인간이라는 과정을 선형적으로만 보는 건 나로서 무리다. 당장 나만 봐도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억지로 해석하려 하면 나만 괴로울 뿐이다. 


 여하간 자아와 부정적 감정 반응의 연결이 유효할 때는, 한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저항해야 하는 무언가로 느끼는 그 맥락과 함께다. 그럴 때에야 '자아'란 것이 매만져질 수 있고, 또 유효하게 타깃팅될 수 있는 거 같다. 그 외의 것은 굳이 자아 운운할 필요는 없는 거 같다. 그러니까, 어디서 정신분석 류 해석을 배워갖고 일상 속에서 사람들의 면모를 두고 자아-심리의 메커니즘을 들춰내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다. 만약 그런 버릇이 있다면, 그만두려고 노력하는 게 낫다. 아마 동일한 문법으로 자기 자신에게 그것이 내사-투사의 결합 중 하나라는 걸 알아볼 수는 있을 텐데, 이것도 어쨌든 신경증이라 불리는, 그러니까 일상에 있어 불필요하게 정신적 소모가 요구되는 반복적인 양상이라 스스로 괴로울 때나 본격적으로 수정하는 게 낫다.


 






작가의 이전글 거리를 두지 못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