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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un 27. 2024

거리를 두지 못해서

작업 노트 15


24.06.27



어느 정도 예열 기간이 정돈되고 좀 더 속도를 올리기 위해 기어를 바꾸는 기간이다. 정신의 입장에서 보면 슬슬 외부로 열린 의식을 닫고 안에서 밖으로 꺼내는 단계다. 실제로 본격적인 쓰기 상태에 돌입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다.


 현재 읽기 카테고리는 '현대 철학', '기술 철학', '정신병리' 그리고 그 외. 이렇게 4개다. 개인적인 우선순위를 매겨두기는 했으나, 너무 지지부진한 느낌(책이 너무 많아 다 읽을 수는 없으니)이 들어 정리를 좀 했다. 읽기의 행적을 대충 그리면, 지금 이끌리는 방향성은 '다시-현대 철학'이다. 현대 철학이라 함은 나이브한 분류고, 사변적 실재론이나 ANT을 경유한 존재론-인식론 등 현재 활동하는(소위 유행하는) 철학자들의 책이다. 처음 문제 의식을 설정하고, 어떻게 원하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린 지 벌써 9년이다. 마라톤은 지친다. 이제 스퍼트를 해야 할 때다.


 원하는 시를 쓰기 위해 일단 존재론-인식론의 재구축을 원했다. 이를 위해 배움을 얻고자 책을 집기 시작한 게 9년이지만 사실 별다른 '진전'은 없는 느낌이다. 9년이면 노력 여하에 따라 박사 학위 하나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다. 게으른 지적 여정 끝에 나에게 남는 건 잡다한 세계 이해뿐, 전문성이라고는 1도 없다. 오히려 전문성에 대한 알러지 반응만 더 심해졌달까. 그래도 전문성을 갖춘 학자들의 책은 소중하고 존중한다.


 다름을 갈구하기 위해 존재론-인식론의 재구축을 감행했는지, 다르게 봐야만 하기 때문에 감행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당연히 내적 일관성은 후자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물고 늘어질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점을 찍어야 한다. 사실 여기에는 '거리 두기'의 전술이 요구되는데, 솔직히 말해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서 감을 잡지 못하겠다. 거리 두기 전술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채택하고 활용하지만, 아직 내 눈에는 기만과 위선이라는 강력한 가치박탈로부터 정화되지 않는 양상으로 비춰진다. 그러니까, 이건 나의 '독'이지만, 그래서 다루는 것도 내 몫이지만 일종의 족쇄같다.


 수도없이 쓰던 창작의 모드를 상기하자면, 사실 방법론은 이미 익숙하다. 오히려 나는 지금 이 상태를 더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걸 철저히 망각에 빠뜨림으로써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게 변용되는 걸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새부터인가 이 일방통행이 혼선을 일으켜 예전만큼 신뢰가 가지 않게 되었으니, 표면적으로는 더 이상 쓰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분명함, 그것은 어느새 밖에서 들어오는 것들에 압도당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무엇을 '내 것'이라 소유할 수 있는지 상실한 상태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나는 상실된 인간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표면에서 '무의미'로 포착된다. 안에서 느껴지는 것이 없다는 상태는 '앞으로'나 '다음' 따위의 어떠한 지향성을 갖질 못한다. 인간의 선취 능력이라 함은(세간에서는 '목표'나 '계획'이라고 부르지만) 늘 보상이라 불리는 의미나 가치가 '예상'되어야 비로소 작동한다. 그러나 무의미는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채 미완의 완결을 시킨다. 보상이 있는 게 아니라 보상이 없다는 걸 예상함으로써 선취 능력과 수행 능력이라는 상상-현실의 이행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 단순한 구조는 우리네 모든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행이 끊긴 일상에서, 9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무얼 좇아왔을까? 분명히, 내 안에는 어떤 분명한 '상'이 있다. 그것을 찾기 위해 고집을 부렸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의 직관은 언제 도래할지 모를 저 멀리까지 미리 뻗쳐 있어서, 지금까지의 '무의미'를 일종의 과정으로, 실패로 여기게끔 나라는 주체를 운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진작에 포기하고 닫아버렸을 '미지'를, 지금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갓길로 수행한 정신 작업(심리, 정신분석, 융, 정신병리 등을 참조하며 체득한)으로 인해 꽤 많은 것들이 '다룰 수 있는' 것이 함께 있다. 어쨌든 '나'는 나로서의 당사자다. 이 말이 무엇인가. 우리는 자기 자신을 꽤 함부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이 되고 싶은 '이상화된 자신'의 모습을 그려나갈 때 그 주체가 대개는 사물처럼 그려진다. 그래서 심리의 역동이나 감정-정동의 리듬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기계 부속품 중 하나가 되는 걸 끔찍하게 여기지만, 그런 구조로부터 그 방식을 잘 모방해서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보답하기도 하는 귀여운 생명체기도 하다. 정신 작업이라 함은, 어쨌든 당사자로서 나 자신을 존중하는 작업이다. 나는 사물을 사물로 대하는 것, 사물을 어떤 주체로 대하는 것, 주체를 사물로 대하는 것, 주체를 주체로 대하는 것 간 사로잡힘으로부터 최대한 건강해지고 싶을 뿐이다. 다룰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는 것에는 얼마 전 썼던 것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인식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제는 미루지 말자고 느껴지는 건, 가치박탈의 코어라 부를 수 있는 '순수한 인격'이다.


 나는 이제 순수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함을 느낀다. 좀 더 다듬으면, 순수하고자 하는 내밀한 자아와 이제 화해를 중재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나에게 남은 마지막 속옷이다. 이 속옷은 그래도 나의 가장 중요한 부위는 보호해준다. 바깥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그렇지 않을 경우 가장 치명적이기 때문에 철저히 방어해야만 하는 그런 기능이다. 사실 모두에겐 이런 속옷이 다 있다. 누군가에겐 거창하고 비대하고, 누군가에겐 비천하고 초라하다. 이건 사실 '인격'으로서 철저히 존중되고 '잘 지내져야 할' 마지막 영혼 채널이지만, 이성 사용자들의 비판 앞에서는 무력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순수함 때문에 세상에 잔인함과 폭력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공격받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정체성 이슈'로 결부시킨다.


 어떤 공동체, 집단, 사람들이 누군가를 향해 불법 행위를 한다는 둥 어쨌든 근대 법에 위배되는 '잔인함-폭력'을 휘둘렀을 때 이를 묵인하지 않기 위한 저항-대항 전술로써 이성 언어의 비판은 때로 위험하다. 적에 대한 반격으로써 '언어'는 사실 쉽게 고유성을 잃게 되며, 그로인해 일반화되곤 한다. 나 또한 이부분에 대해서 매우 강도 높은 피로도를 느끼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문제를 순수한 인격을 다룸으로써 해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니까, 언어 사태의 문제와 그로 인해 정신 안에서 자극되는 이미지-정동의 문제는 별개지만 미숙한 나는 여즉 그걸 분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거리 두기'를 잘 못하기 때문이다. 그걸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극단적이다. 거리를 두지 않을 바에야 가치 박탈을 하고, 거리를 둘 수 있는 건 철저히 몰라야 하는데 또 나의 강박이 이걸 최소화시키려 한다. 그러니까 무지에의 경각심과 당사자로서의 방어기제가 동시에 작동하니, 이놈의 '글로벌' 시대에서는 너무 취약한 정신인 것이다. 사실 세상에 출현하는 무지막지한 '차이'들 앞에서 눈가리고 아웅할 수 있는 인격들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다는 게 참 대단하고 부럽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세련됨을 퍼포먼스하며 '논쟁과 비판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따위로 제스쳐를 취하면 얼마나 나이스한 인간으로 둔갑될까. 간혹가다 이성 사용자들을 보면, 훈련받은 이성 사용자들이 이런 식의 '반응'에 환대를 보이는데, 내 눈에는 유튜버들의 구독 좋아요 알림설정 같은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어쨌든 '주목 경제'의 코드를 수행하고 있으며, 자신의 논지에 급발진하든 반대하든 비판하든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대한 환대를 하는 것이지 실질적인 무언가로 대응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제스쳐라는 것, 그 거리 두기가 된다는 게 참 신기하다.


 내가 아직도, 책을 이렇게나 붙들고 살면서 아직도 이 거리 두기를 배우지 못한 건 참 안타까운 사건이다. 이게 정신 성향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건지, 모종의 이유 때문에 배움이 더딘 것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그 문제를 좀 파헤치고자 순수한 인격을 둘러싼 작업을 해볼 예정이다. 중요한 건 오늘날의 문화-사회에서 인간들이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은밀한 초대장을 막무가내로 발송하는 데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 감각 자체를 희미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무언가를 노출시킨다는 데에 어떠한 책임 의식도 느끼지 않지만, 어쨌든 그런 출현 자체에는 당연히 정신 소모가 요구된다. 연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의 노출과 이미지의 노출 간 우리네 정신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에 따른 임계치는 분명 다른 거 같다. 사람마다 민감도는 당연히 다르겠지만, 일단 나는 분명히 느끼는데, 스크린이 없던 시대에 언어를 통해 접할 때의 '거리 두기'로는 충분히 커버칠 수 있는 나의 한계가 오늘날 시대에는 그렇게 먹혀들지 않는 거 같다. 확인하지 않은 건 확인해야 한다는 이 개같은 강박만 없었어도... 예전에 같이 살던 하미가 생각난다. 밖에 나가면 꼭 그렇게 구석구석을 냄새 맡고 확인해야 나아가던 녀석. 내가 널 닮은 건지.


 어쨌든 이건 한 인지의 특징으로 포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특징을 고유성으로 말미암아 어떻게든 적응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 나에게 있어 순수한 인격을 향한 작업은 이런 잡다한 세계-인간 이해의 도움으로 가능해진다. 거리 두기의 종착지는 결국 관계다. 나로서 세계-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다. 이것이 나의 존재론-인식론의 재구축이다. 당연히 끝도 없고, 중단될 수 없는 문제인데 우회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딴짓도 하고 힘을 좀 뺄 줄도 알아야 한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오면, 일단 미뤄둔 [단독성들의 사회] 정리를 마저 하고 난 뒤, 지체없이 미뤄둔 철학 책들을 읽을 예정이다. 사실 나에게 필요한 건 아이디어나 완전히 독창적인 관점이 아니라 나의 직관에 잘 맞는 언어-옷이다. 9년 동안 내가 했어야 한 일은 옷을 만드는 일이지만, 몸을 관찰하는 데 쓴 거 같다. 뭐, 상관은 없다. 이런 게 다양성이라 불리는 인간들의 이로니까.


 오늘은 창조 노동에 대해 정리를 하려고 몇 권 살폈는데, 역시 당사자로서 느끼는 '창조'와 사회 일반이 얘기하는 '창조'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이 간극이 확인되고 나면 나의 순수한 인격이 자극되어 후자를 존나 까내리려고 들썩거리는데, 오늘은 좀 잠재우고 있다. 언어의 분화 문제를 심리 문제로 헷갈리지 말자는 걸 아무리 배워도 여전히 배울 게 많다는 걸로 전환시킬 뿐이다. 언어를 소중히 다루는, 그런 사랑을 품고 말아버린 인간으로서는 일단 어쩔 수 없는 문제같다. 사랑하는 인간이 괴로워야 맞다.


 올 여름이 지나기까지의 목표는 현대 철학과 기술 철학 텍스트를, 미뤄뒀던 걸 모두 읽는 것이다. 그래봤자 10권 남짓이라 너무 무리한 목표는 아니다.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 결국 나는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흐릿하게 보이는 걸 제대로 보지 않고서는 찝찝한 이 강박. 강박이 아니라 불안이지만. 가장 먼저 읽을 책은 [복잡계 개론], 그 다음은 [재매개]다. 읽으면 또 책 욕심이 날 법도 하지만 이후에는 제인 베넷과 그레이엄 하먼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이 커리큘럼이 잘 수행될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오래 미뤄서 무거워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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