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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un 24. 2024

정상-병리, 정신으로의 삶 3

작업 노트 14


24.06.24



2. 세련된 자폐증



'생톰'으로 귀결되는 마지막 라캉까지 읽었을 때, 나에게 남는 마지막 소회는 사실 '시인에 대한 상'이었다. 해제도 그랬지만, 라캉은 결국 '자신의 증상과 잘 지내는', 그러니까 증상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향락을 단독화하는 것을 지향하며 쉼표가 찍혔다. 여기서 향락을 단독화한다는 건, 시니피앙 측면에서 말하면 현실계에 맞물려 있는 라랑그(S1)로 자신의 향락을 누리는 걸 가리킨다. 이 행위는 시니피앙의 의미를 매만지는 게 아닌 '무의미'를 매만진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시인론'에 의하면, 대부분의 시인들은 거진 다 이런다. 그들은 시에게서 어떠한 의미를 갈구하는 데 모종의 알러지 반응을 느낀다. 시를 읽을 때도, 그 언어를 최대한 라랑그S1으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본인들도 시를 쓴다는 창작 행위에 대해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걸 지향한다.


 물론 모든 시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허들이 있었다. 만약 그들의 자폐적인 향락 놀이가 '좋은 시'라면, 그러니까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 같은 창작 행위가 저자의 '증상과 잘 지내는 것'이라면, 나는 왜 그런 걸 굳이 읽어야 하는가?이다.


 어쩌면 내가 시 쓰기의 시니피앙 체계를 전면 수정하기로 결정했던 계기가 이것이지 않을까 한다. 어느새부터 '읽는 것'이 나에겐 너무 피곤한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정신세계가 몹시도 '과잉'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귀수의 [정신의 무거운 실험과 무한히 가벼운 실험정신]이란 시집이 그렇다. 이 예는 꽤나 당돌하고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아마 이 시집을 '희귀품'으로 수집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과연 독자란 있을까? 싶을 정도의 시집이지만, 나에게 시를 읽는다는 건 거진 이런 태도였다. 시인들은 대체로, 읽는 이와 분리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라랑그를 (받아) 적는다. 나는 그걸 읽으며 미지의 정신 세계를 모험하게 된다. 그러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피로감은 결국 이것으로 붙들린다, '이걸 읽어서 뭐하나'.


 이건 나의 읽기-슬럼프일지도 모른다. 쉽게 말하면 타인의 향락이 재미가 없다. 근데 또 본인들은 심취해 있다고 (심지어)어필을 한다. 이것은 라캉을 해제하는 타쿠야의 용어를 빌린다 해도, '자폐적인 향락'이 아니라 그저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에 가깝다. 만약 진실로 그런 향락 체계라면, 그러니까 자신의 증상과 잘 지내는 그런 방식의 '창작'이라면, 그들은 퍼포먼스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읽어달라고 전시를 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무슨 '정서'를 갖고 있는지 세심하게 꺼내려고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창작 행위로의 '증상'이란 그런 상상 놀음과는 거리가 멀다고, 나는 15년도에 너무 실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당연히 진정성-낭만성에 대한 이해도도 낮았을 뿐더러, 21세기 인간들이 왜 이렇게들 관심에 목말라 하고 보여지는 데 온갖 '잉여 향락'을 발명해내는지 난처하기 일쑤였기에 그때의 실망은 더욱 정체모를 결여가 되진 않았나, 회고해 본다. 타인을 궁금해 한다는 것, 다른 사람의 '삶'에 상상력과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 그런 일련의 정신 활동에 나는 너무 순수했던 것이다. 고작 그런 거였어? 그렇게 사고파는 상품이 되는 거였어? 그렇게 하는 척만 해도 했다고 느끼는 거였어? 라는 '상처'가 생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나에겐 너무나 막대하고 온 에너지를 다 태워도 모자를 정도로 '큰 사건'인데, 인간들은 혀를 몇 번 놀리거나 손가락을 몇 번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쉽게 처리하는 거 같았다. 그런 상처가 누적되자 당연히 더는 하고 싶지 않아졌다. 애초에 인간들은 관심도 없다, 딱 그정도다, 그저 소비하는 버릇으로만 인간을 대한다 등으로 세상 전부가 탈색되니, 그러니까 세계 몰락 체험이 가동되니 어쩔 수 없이 나도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성 코드로 말하면, 진실된 인간은 현실에 없고 늘 종이 위 글자에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 구도를, 여러 철학을 공부해야지만, 그러니까 여러 개념들을 갖고 와서야지만 설명할 수 있다는 건 너무 난도 높은 정신 체험이 아닌가? 참 인간은 복잡하고 까다롭고 엉망진창같다.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그런 사람들(시인들도 포함해서)은 뭔가 수상해 보였다. 부럽고 피곤했다. 한 인간의 정신에 어째서 이런 의미의 결여가 발생하는지, 그로인해 굴러가기 시작하는 시니피앙 스노우볼은 어째서 이렇게 막대한지, 책에 갇혀 있는 죽은 인간들이 안쓰럽고 자랑스럽고 그랬다. '자신의 증상과 잘 지내는 것'. 간혹가다 그런 이야기를 건너 듣는다. 문창과 아이들 중에 진실로 글을 쓰려고 하는 애들은, 정말로 '쓰지 못하면 죽고 말기 때문에' 써야만 하는 아이들이라고. 실제로 합평 자리를 가면 간혹가다 그런 경도된 정신의 10대 애들을 마주하곤 한다. 또 신인이라고 나타나는 젊은 시인들의 몇몇 글을 보면 늘 '죽음'을 공전하고 있다. 참으로 조심스럽지만, 나는 어느새부터인가 이런 식의 라랑그 흉내내기(?)같은 게 유행하는 건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든다.


 나에게는 아무래도 양보할 수 없는 어떤 진실됨이 (마치 증상의 뿌리처럼)자리잡고 있는 거 같다. 그러니까, 진실로 '자신의 증상과 잘 지내는(혹은 지내야 하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남들에게 '보란 듯이'를 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절대 그런 방식의 향락이 나타나지 않는다. 진짜들은, 남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이 진짜라는 걸 내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세련된 자폐증'이라고 부른다 해도, 내가 보기에 그들은 타협할 수 없는 '세계-현실의 경계'를 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절대 자신의 증상을 월담시키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의 증상으로만 둔다. 그것은 남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일지라도, 남들에게 발견되길 기다리는 그런 성질이 아니다. 그것에 '타의 향락'은 없다. 나는 이것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것이 나의 증상 중 일부다. 살면서 나에게 진실로 감동을 줬던 타인들은 모두 그런 타인들이었다. 그들은 '현실계'에 있었지, 라캉의 말마따나 시니피앙S2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나의 태도는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나의 현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현실'은 철저히 현실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현실을 배우는 일뿐이다. 사람을 배우고, 일반 인간을 배우고, 사회를 배우고 문화를 배워야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나'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것은 괴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긴 해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팔자였다. 여러 논문이 '진실'이라면, 나에겐 정신을 분열시킬 '부모의 이중 구속'이 주어지지 않았고, '사이코패스 유전자'가 없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담당할 최초의 시니피앙에 모호함이 최소화되었다. 그러니까 나의 부모는 일관성 있는 인격의 사람들이었고, 나에게 도착해 있는 최초의 세계는 (유추컨데)안정적이었다. 이것이 나의 팔자다. 그래서 완전히 미치지도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도 없는 어중간한 인간이 되고 만 것이 아닐까.


 나도 나의 오랜 친구들처럼 잉여 향락에 온 정신을 내맡긴 채 살아가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간혹 한다. 어제 동창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나의 친구 중 하나는 일반 인간들의 결혼식을 '애들 소꿉장난 같다'고 가치박탈을 존나 하는데, 나는 그 친구에게 늘 세상에의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나는 현실을 배우는 데 성공했고, 하고 있기 때문에 소외나 분리를 맛보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라보며 '나의 현실'과 실제 현실 간 매개를 수행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안에 웅크려 있는 '진짜를 갈구하는 순수한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나는 나의 고유성으로 이것에의 '매듭'을 성사시킬 수 있을까, 발명할 수 있을까.


 창작에 있어서 나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나는 더이상 시인들을 향해, 창작 행위를 향해 진실됨을 요구하지 않는다. 창작 행위의 '현실'은 바로 사람과 현실을 '잇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격으로서의 현실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는 '닻'이라면, 실제 현실은 이동하는 거주지인 배-돛이다. 현실에 참여하기 위해 나는 닻을 거둬야 한다. 근데 나의 반복되는 증상은, 생톰은 자꾸만 닻을 내리려 한다. 현실은 나아가고, 나는 가라앉는다. 팽팽해진 닻줄, 아무리 튼튼한 쇠사슬이라 해도 언젠가는 끊어져야, 그러니까 결국 내가 끊어져야 순리에 맞지 않을까?


 이것이 내 삶이다. 팔자라 부르는 삶이다. 이 시니피앙들의 근본적 변혁을 꾀하려고 시도하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다. 다시 태어나는 게 이렇게나 어렵다. 닻을 올리면, 세상에 예술 행위가 풍부해지고 다양해져서 사람들의 정신 다양성이 늘어나길 희망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는다. 닻을 내리면, 온갖 행위와 인식 속 기만과 위선이 앞다투어 나타나 도깨비로부터 도망치듯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바깥은 내 정신을 홀리는 무수한 것들이 판을 치니, 내가 숨어 사는 게 맞지 않을까? 그래서 방에만 담겨 있고, 내 방은 뾰족해지는 것이다.


 나도 증상과 잘 지내기 위한 창작 행위로 온몸을 던지는 걸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런 선배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풍부한 마음을 제공해주던가. 그런 '책'이 있기에, 나같은 인간들이 살아 숨쉴 수 있다는 것, 모두가 아닌 단 한 명을 살릴 수 있다는 그 숭고함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사람들에게 난해하고 '그딴 책 어려워서 왜 읽는지 모르겠다'는 책이 누군가에겐 구명줄이고 보금자리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고민하고 괴로워해도 결국 이건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 구도는, 아무리 곱씹어도 무언가 잘못됐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에게 잘못인 것이다.


 향락이라는 건, 라캉의 말마따나 우리 인간의 진리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델링은, 청사진은, 어쩐 일인지 사람을 더 괴롭고 힘들게 만들 것만 같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여겨져도, 다른 여지가 없는 것처럼 딱 들어 맞는 듯 보여도, 의심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훌륭한 이성 사용자들의 '언어'가 진실로 받아들여져야 할 때는, 나에게 있어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때다. 그것은 현실로 우리가 괜찮아지는가다. 상상 속에서, 상징 속에서만 위안과 용기를 얻거나 어떤 표상을 갖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현실로 괜찮아진다는 건 개인이 아니다. 그러니까, 자폐로만 국한될 수 없는 조건이다.


 기후 위기 담론(?)은 인류에게 도착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일반 사람들에게는 우스개소리다. 간혹가다 사람들의 일반 지성을 확인하기 위해 콘텐츠나 댓글, 채팅창을 확인하는데, '지구의 위기'나 저출산과 같은 '한국의 위기'가 나오면 여전히 인간들은 '섭종'이니, '다 같이 죽자'느니 '헬조선'이니 따위의 말만 ㅋㅋㅋ와 읊조릴 뿐이다. 이런 일련의 반응은 아마 인류 문명 이래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을 거 같다. 그러니까 어느 시대든 이런 인간들이 대다수고 일반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이에 비해 소수의 인간들은 진실로 어떻게 이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맨다. 능력이 없음에 애도를 한다. 자신의 일상을 실천으로 모양내려고 한다. 이런 이들을 바라보며 비웃거나 조롱하거나 '하루 빨리 이 모든 걸 극복할 기술이 발명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역사를 읽다보면 담기지 않는 이런 '현실'이 충분히 그려진다. 세상을 이루는 대다수 일반 인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소수를 방치하고, 어떤 소수는 진실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끌어모아 혁명을 꾀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여기를 바꾸려고 한다. 다수라는 오늘날의 대중은, 내가 여전히 배워야 할 '현실'이다.


 그러니까 현실로 우리가 괜찮아진다는 건, 이 무수한 사람들과 같이 괜찮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괴로운 건 매스 미디어의 사회에서 사는 네이티브로서 불가피하게 가져야만 하는 시니피앙S2들의 막대한 정신들이다. 나의 세계가 좁았다면, 불과 부모 세대의 농촌 공동체였다면, 나의 현실과 실제 현실 간 괴리를 좁히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괜찮아진다는 건, 그들의 삶과 '나아감'을 같이 동반한다는 것으로, 내가 아무리 먼저 가든 선취하든 이상한 데로 가든 끊임없는 조율, 그러니까 관계를 상시 맺어가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삶의 가치관 최우선순위인데, 아무리 삶을 곱씹어 봐도 이 '함께'의 한계가 수십 명이다. 그것도 나의 사적 삶을 공유하는 단계별로다. 하지만 21세기 사회라고 하는 건... 너무나 많은 '목소리'를 표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나는 우리 인간 정신이 이렇게 무수한 '목소리', 그러니까 쉽게 말해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두고 발달되었는가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다. 그럴 수 없는데도, 그래야만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사회같다.


 결국 이렇게 생각을 밟아가다 보면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결국이 결국일까. 강도 높은 부하로 인해 결국 모양나고 말아야만 할까. 아무래도 그렇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게나 가능한 '미래'가, 이미 태어나고 만 나에게 도래할 수는 없다, 그래선 안 된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나의 향락에 있어서도 강력히 요구되어야만 한다. 나의 퇴행.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건, 아무리 받아들이려 해도 끊임없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걸 품고 있는 현실과의 '끝이 없음'이다.


 언젠가는 나도 '세련된 자폐증'으로서의 향락으로 잠시나마 '끝이 있음'을 누릴 수 있지는 않을까? 잠시 현실을 닫고. 그래, 이정도면 많이 열었어, 이제는 좀 닫아도 돼라며. 과연 그런 게 조절 가능한 건가 싶다. 나는 너무 의식의 기능을 과하게 여길 때가 있다. 그래서 훌륭한 이성 사용자들은 어쩔 수 없이 닫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와버린 이상, 닫을 수 없게 넘쳐난 이상,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현실의 진실된 의미 중 하나는 '돌이킬 수 없음'이다. 그것이 라캉의 현실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향락을 하는 것이라고.


 만약 대타자를 발명해야만 한다면, 나의 대타자는 어떤 대타자여야 할까. 확실히 느끼건데, 아직은 불분명한 상태인 거 같다. 융을 경유한 꿈 관찰로만 봐도 그렇다. 어딜 가든 존나 힘들고 고되다. 어찌저찌 가긴 한다. 근데, 바로 그게 무의식의 '말'이다. 그러니까 목적지, 도착 후 만남 같은 뭔가가 아니다. 그 고됨 자체가 '말'이다. 나의 꿈을 통해 반복되는 '증상'은 여전히 괴로움이다. 그것은 나를 위축시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수동적이게 만든다. 그래서 과호흡으로 꿈에서 깨어난다.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깬다. 이 반복적인 꿈 때문에, 언젠가 나는 과호흡과 연결되어 심장마비로 돌연사하지는 않을까, 그런 예상을 하기도 한다. 정말로 나는 숨이 막혀 곧 죽을 것 같은 바로 직전에 꿈에서 깨고 만다. 숨이 안쉬어질 정도로 울분이 솟구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의 에로스로 보면 도대체 어떤 절망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안타깝고 슬프고 그렇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그렇다. 내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뭘 어떻게 해줘야 하나 막막하다. 억압된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 한 번 게워내듯 터져나오는 거라면, 나는 융의 말마따나 열등한 감정을 순환시키는 데 보다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근데 그것이 대상 a라면, 나는 생톰을 알아낼 수 없기 때문에 매듭을 발명해야만 한다.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의식의 관할은 아니다. 의식의 일은... 그저 이런 게 최선인 거 같다.


 




이번에 가볍게 라캉을 읽으며 잠시나마 관찰을 한 한 주였다. 에크리를 통째로 읽으며 라캉의 정신 세계를 섬세하게, 성실히 들여다본 건 아니기 때문에 그를 너무 거칠게 여기게 됐다. 죽은 사람들의 장점이라고 하면 이런 거기도 하다. 그들의 욕망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인격을 함부로 대한다 하더라도 당사자에게 당도할 수 없다. 작가들이 죽으면 그들의 사생활을 하나하나 쥐잡듯 뒤져 세상 인간들에게 공개하는 변태적인 행위가 비일비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수치스럽고 좆같았을까? 하는 것들을 이제는 허락을 받거나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물로 대한다. 인간은 그래도, 부분적으론 이게 맞다. 인간을 사물로 대할 수 있는 권할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인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철저히 금지된다면, 우리는 사실 '타인'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렇다.


 융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정신 관련된 책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더 들여다보고 더 관찰하고 싶어지는 충동이 일렁인다. 그러니까 부지런해지고 싶다. 관심없이 살고 싶지 않아진다. 비의식으로만 일상을 보내고 싶지 않아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또 한동안은... 정신보단 현실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혹은 발명하려고 닫을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가벼운 라캉 읽기를 통해 나에게 남은 마지막 문구는 뭘까. '증상과 잘 지내기'. 이것은 나에게 이렇게 변용되기도 한다. '현실과 잘 지내기'. 21세기 젊은 인간들에게는 이제야 '자기답게, 진정성, 나와 같이' 따위로 도착했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다. 한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건 이제 전부가 아니라 필수인 거 같다. 오히려 요청되는 건, 그러니까 기본 주문은 '자기 자신과 잘 지내기'지만 추가 주문은 '세상과 잘 지내기'인 거 같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말마따나, 아니, 좀 더 냉소적으로 말하면, 그러지 않으면 뒤질껄?이다. 그래서 일반 지성이 그렇게나 죽음을 쉽게 읊조리는 거 같다. 죽는 걸 무슨 자판기 음료 뽑듯이 말한다. 뒤집어 보면, 얼마나 죽음에의 상징-상상이 결여된 채로 신체화된 향락이 되고 만 걸까 싶다. 이건 가치박탈을 할 게 아닌 거 같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삶'이지 '거세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가치박탈과 열심히 싸워 간신히 에로스를 발달시킬 때,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 나는 나의 부정과 맞서는 게 지름길일 텐데, 너무 방황만 했던 거 같다. 또 다시, 현실과 잘 지내기를 위태롭게 시도하러 간다. 이제는, 떨어질 거 보다 반드시 지나가고 말겠다는 용기를 키우면 어떨까 싶다. 맨날 최악을 상상해 두려움을 무마시키는 건 별로 좋은 순환이 아닌 거 같다. 이럴 때 일반 지성에 내맡겨 발달시키는 게 추후에는 나름 균형을 잡아주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소위 희망만 붙드는 것. 나에겐 오히려 결여된 불가능이라 이렇게 나이브한 표현이 덜 소모되는 것일지도. 개념으로 푸는 건 소모가 너무 크다. 기형도의 속삭임을 적어 둔다. '힘을 아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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