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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un 22. 2024

정상-병리, 정신으로의 삶 2

작업 노트 13


24.06.22



0. 정상-신경증-정신병



네이버에서 유일하게 구독하고 있는 매체는 '정신의학신문'이다. 말은 구독이지만, 사실 거의 읽지는 않는 편이다. 대체로 자신이 운영하는 의료기관에 대한 원장 마케팅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고, 어쨌든 정신의학을 전공한 전공의들의 자영업에 있어 고객(환자) 유치는 필요하기에 '필요-수요'의 측면을 타깃팅하는 측면이 부각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떤 글을 읽고 '혹시 나도?'라는 의구심이, 그간 일상을 지내며 불편하게 여겨졌던 자신의 '증상'이 하나하나 연결되어 어떤 병명으로 '병식'될 때 그는 잠재적 고객(환자)이 될 수 있는, 그런 측면에서의 정신질환 소개가 있기도 하다.


 질문을 간단하게 만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정신병의 일상화'라는 측면으로, '사실은 내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말이다. 이 질문이 한 주체에게 떠오르기 위해 필요한 건 무수한 사회적 맥락들이다. 예를 들어 나르시시즘 성격 장애라는 진단명을 받기까지(자각하기까지) 거쳐야 할 일상 경험에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하나둘 듣게 되는 '이기적 면모에 대한 불쾌감'과 더불어 반복적인 자신의 습관이 사실은 '증상'이었다고 느낄 정도로 '남들은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거 병이야', '왜 주체를 못해' 따위의 거부되는 체험이 필요하다. 한 개인 입장에서 특정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접합되어야 할 일상 체험 속 '말'이 누적되어야, 비로소 자영업자(의사) 앞에서 자신의 요구(증상)를 꺼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진단은 그 이후다.


 이것은 충분히 정식화할 수 있는 일련의 의미작용이다. 사실 정신병리 쪽 텍스트에서 여러 증례들을 소개하는 전문의의 글을 보다보면 한번쯤은 궁금해 할 법한 것이기도 한데, 내담자-클라이언트(일본에서는 이 용어를 선호한다)-환자는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증상임직한 것'에 대해 꺼내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라캉의 표현대로 환자는 의사에게서 '지'가 상정된 '아버지-주체'를 전이함으로써 기대한다. 즉, 우리는 '의사'라는 전문직(권위)의 옷을 입은 인간에게 '당신에게 나를 이끌 수 있는 무언가를 기대합니다'라는 태도를 약속이라도 한듯 내보인다.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당신은 일목정연하게, 심지어 '해결'까지도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라는 전제가 없고서 우리는 결코 의사 앞에 앉을 수 없다.


 이것은 어째서 약속되는가? 푸코의 논의를 빌려와 이를 보다 간단하게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일반 시민 입장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유년 때부터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익숙함 때문이다. 바로 이 당연시되는 부위를 인식 가능한 것으로 다룰 때 튀어나오는 개념이 바로 '시니피앙'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한 번도 의식한 적 없이 아무렇지 않게 '자동적으로' 수행하던 어떤 방식에, 이제는 그것이 이러저러한 표현으로 붙들려 식별 가능한 것으로 될 때 우리는 '사태에 붙들린 수동적 존재'에서 벗어나 실천 가능성을 담지한 잠재적 자유로운 존재로, 일종의 '가능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구조주의를 경유한 실존주의와의 유의미한 접점이다. 그러니까 일반 시민 입장에서 '시니피앙'이니 어쩌니 저쩌니 하는 따위가 우리에게 왜 필요해? 혹은 이런 것들에의 의식 분화를 수행하는 게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다고?라고 여겨지더라도, 가만 보면 본인도 어느 순간에는 그런 체험을 요구받고, 또 수행했음을 관찰할 수 있기에 '완전히 다른' 무언가는 아닌 것이다.


 소쉬르로부터 시작된 기표-기의의 구분과 더불어 발전되기 시작한 '지시 대상' 혹은 여러 언어-기호학 개념들은 점점 복잡해지고 추상해졌다. 그에 반해 일반 시민의 의식 속에서 통념으로 활동하는 언어 체계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냉담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그런 것은 아니다. 아마 대부분의 이성 사용자들에게 있어 가장 큰 '베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우리 인간 일반의 의식은 '반드시 의식되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프로이트처럼 그것을 뒤집어 사실은 '당신은 증오하고 싶어서 사랑한다 / 사랑하고 싶어서 증오한다' 따위로 소위 '이중 구속'을 걸어버리는 게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잠깐 덧붙이는 말이지만, 프로이트도 그렇고 라캉도 그렇고 한 인간 주체에게 이중 구속을 아무렇지 않게 시전하는 게 '해석 혹은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해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면모는 어떤 면에서 참 안타깝기도, 역겹기도 하다.


 어쨌든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건, 인간 일반의 의식이라고 하는 건 '반드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것을 복잡한 추상 층위에서 이끌어내면 하나의 전문지식으로써 실용성을 갖추겠지만, 그렇다고 구체화되지 않은 '일반 명제'로써의 의미작용이 훼손되는 건 아니다. 이 관계가 중요하다. 우리 인간에게는 일반 명사가 자신의 인지로 인해 고유 명사로 다뤄질 수 있고, 그것이 '객관 혹은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절하되거나 교정되는 게 유일한 정답지는 아닌 것이다. 바로 이 '주관적 인지' 덕분에 특정 언어의 의미망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걸 '거울상'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이 거울상 없이는 결코 자신의 '증상'을 권위 앞에서 꺼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느끼기론 바로 이 부분이 정상-신경증을 잇는 고리다. 그리고 정상-정신병을 잇는 고리다. 아마 일반 시민 입장에서는 파과형 정신분열로 진단받은 어떤 주체의 '지리멸렬'을 일상 속에서 접할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만약 만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동 반응은 '미친 사람이다, 피해야 해'일 것이다. 당연한 반응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고프먼의 논의를 따라간다면, 이런 일련의 자동반사적 정동 반응으로 인해 소수자-타자들에게 각인되는 스티그마가 또 다시 문제로 설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소수자라고 불리우는 LGBT 운동에서 주요하게 작동하는 일상 체험이기도 하다. 자신이 사회 일반, 인간 일반과 다름을 끊임없이 '불평등'한 것으로, 그러한 언어의 의미작용으로만 다뤄질 때 주체는 어떻게 모양날 수밖에 없는가?가 사회문화적 움직임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예시를 통해 다수 대 소수라는 참으로 기이한 구도에 대해 다시금 개폐해야 할 주체로 소환되는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인식하는 순간 모종의 불편감을 느낄 것이다. 이때 발생하는 불편감은, 당연히 인간 정신에 있어 너무나 일반적인 반응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작년 내가 만난 조현병의 망상 장애를 스스럼없이 꺼내는 한 시민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케이크를 사러 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었는데, 한 중년의 여자가 버스에 타면서부터 이 '사건'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무임승차를 했고, 기사는 일단 출발했으나(서울식 버스 운행의 특징 중 하나다. 시민들의 민원이 만들어낸 버스 기사들의 '관습'도 참 기이한 측면이 많다) 무임이기에 기사는 백미러를 보며 승객인 그녀에게 차비를 내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그녀의 호통과 '목소리'는 실로 모든 승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충 내용은 이것이다. '난 국가 정부의 스파이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누가 감시하고 있고 ~~ 부대 ~~ 중사 ~~ 너 코드 000 전화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러시아 국가 원수 신고 01 버튼 위치 한국 법 모르면 죽어 엿까 시발 경찰 6500명 죽었다' 등등. 너무 속사포로 너무나 구체적인 수치들과 함께 내뱉어져서 하나하나 다 기억하진 못한다. 버스 기사는 경찰을 부른 뒤 버스를 멈추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만 계세요, 승객들이 불안해 하잖아요'라고.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싸악 내려가는 것처럼 어떤 편안함을 느끼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불안해 하고' 있었고, 버스 기사는 그걸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우리를 향해 '불안해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일단 이 부분에서 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시니피앙'의 연쇄 작용으로 인해 우리 인간이 어디까지 결속되어 있는지에 대한 면모다.


 그녀는 단번에 자신이 체포될 거라는 걸 알고 서둘러 버스에서 내리려고 했다(그러면서도 말로는 엿까, 시발 하면서 일종의 권위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때 아무렇지 않게 서 있던 20대 남자 한둘이 그녀를 몸으로 막았고(그중 한 명은 마치 놀이라도 하는 듯 웃으면서 그랬다, 이것도 참 기이한 순간의 포착이었다. 개인적인 소회지만, 역시 서울 시민들은 참 이상하고 흥미롭다), 한 젊은 여자 승객은 어디다 전화를 걸어 자신이 면접보러 가는 길인데 '불의로 벌어진 사건'에 대해 누군가에게 알리고 있었다. 여하튼 경찰이 도착하고, 그녀는 경찰에게 인도된 뒤 버스는 출발했다. 그렇게 (승객과 버스 입장에서'만')일단락 되었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정상-정신병의 '현실'이다. 그녀는 당연히 파라노이아형 망상장애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우리네 시민 중 한 명이다. 이런 사람이 만약 환자라면, 라캉이 '팔루스' 운운하는 게 얼마나 그럴듯하게 여겨졌을까, 심히 긍정하지 않을 순 없다. 그녀는 '남근 거세'로부터 결여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신체화로 향락하고 있었으며(중년의 그녀는 누가보아도 '중년 남자, 국가 정부에서 고위직에 몸담고 있는' 남자처럼 말했다), 그렇기에 온 세계에서 환청으로써 '(아주아주 중요한)정부 기관'과 끊임없이 무선 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에겐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정상'으로 자칭하는 우리들 입장에서야 그것은 비-현실, 그러니까 '망상'이라고, '정신병'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구도가 바로 우리네 현실이다.


 이 경험은 고작 10분 남짓의 일상 체험이지만, 이 체험 속에는 막대한 사회적 맥락들이 관여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돌출된 일상 체험에 국한된 게 아니다. 평범하게 여겨지는, 아무런 의미작용이 없다고 여겨지는 '보통의 일상' 속에서도 이런 막대한 사회적 맥락들이 지탱되고 있기에, 그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우리는 미끄러지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경증과 더불어 정신병으로 포착되는 사람들의 정신은 바로 이 현실이라는 얼음판이 '다르다'. 그 위에서의 운동은 그들을 '소수'로, 그렇지 않은 '다수'로 구분짓게 만드는 차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 낡은 개념으로 여전히 다수-소수, 혹은 그나마 쓸모 있는 '당사자성'으로 오늘날 소수자에 대한 민주주의식 가치관을 일단 붙들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정신질환 쪽에서는 '일상화'가 이러한 허들을 꽤나 부하받지 않고 왕래하는 느낌이다.


 나는 이런 일련의 허들 낮음이 바로 정신분석의 공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프로이트-라캉의 인류사적 업적은 우리로 하여금 '주관적 해석'에 대한 접근 허용을 매우 유연하게 '자극'했다. 그들 본인들은 당연히 차분히, 이성적으로 당대의 열등한 이성들과 맞서며 비판과 지적으로 대응하고 세련됨을 잘 가꿨지만, 어쨌든 그들은 살아남았고 그들의 '적'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기에 그들의 '반응'은 홀로 남아 맥락없이 부유해 일종의 시니피앙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그들의 헛점이 되기에 후대 사람으로서 그들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얼마나 그들의 정신에 있어 내사되고 있는지를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그런 구도가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짚고 넘아가자.


 일단, 프로이트와 라캉이 다룬 '신경증-정신병'은 나같은 일개 시민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그런 층위의 내용이 아니다. 그러니까, 실제 환자로 나타났던 여러 인물들의 '주체성-한 개인의 삶'을 상상하지 않은 채 고작 '오이디푸스' 또는 '성욕' 운운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준칙으로 여겨져야 할 것은, 그 누가 되었든 한 개인이 고통을 호소하는 정신에 있어서는 그것 자체를 함부로 다뤄선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프로이트-라캉을 가치박탈 하는 포인트는 그들이 당대 최선을 다했던 그 포지션에 있질 않고, 그들 스스로가 어느 순간부터 너무 무모하게, 오만하게 '일반화'를 꾀하는 바로 그 향락에 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주제를 넘고 마치 인간 일반의 정신이 다 이렇게 모양난다는 둥 은근슬쩍 의미작용을 끼워넣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은유 전환은 라캉이 구분짓는 신경증 환자의 '특기'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향락이 가능하다는 게 바로 시니피앙의 장점이다. 내가 느끼기론 바로 이 장점 덕분에 우리가 정신-신경증-정신병을 오갈 수 있다. 여기서 벌어지는 건 자신의 증상을 '피해 이익'으로 상대화해 부상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고통받는 '증언자로서의 당사자'들의 실질적인 '피해'가 절하되는 현상도 포함이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 열심히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의학 전문의들이 양성되고 활동하는 게 21세기이기도 하다. 다만 주지해야 할 것은 '시니피앙'이라고 하는 것의 오남용을 야기시키는 바로 그러한 특징으로 인해 우리네 사회에서 벌어지는 통념의 경계가 돌출된다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그것이 '오남용'이라 부를 수 있는, 정답에 가까운 시니피앙 사용법이란 것이 있는가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천'을 하나의 높은 윤리적 가치로 수긍하는 이성 사용자들이 '정치적 행위'로 변용하여 이러한 현상에 비판 의식을 덧댈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만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우리 이웃과 우리 시민 간 언어 소통에 있어 끊임없이 '그렇게 말하는 건 잘못된 거야',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해도 공감 능력을 길러야지' 따위의 가장 기초적인 '불편감'을 발휘하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상상하는 게 보통의 최선이기도 하다. 반대로 보면 시니피앙은 역시 언제나 그랬듯 '당대'의 무언가를 향한 끊임없는 조율 해상도다. 그것이 섹슈얼을 둘러싼 코드가 됐든, 노동을 둘러싼 자본 코드가 됐든, 가치관을 둘러싼 삶의 윤리 코드가 됐든 말이다.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 각각의 정신들이 일단 붙들고 있는 시니피앙이 자신의 주변 환경(세계)와 얼마나 적합하게 교호될 수 있는지고, 고민하는 이성 사용자들은 바로 이러한 '현장감'을 배제시키지 않는 게 요구된다.


 그런 측면에서 정상-신경증-정신병은 사실 '우리 인간은 모두 망상한다' 또는 '우리 인간은 사실 모두 (잠재적)정신병자다'라는 명제를 통해 유통되는, 모종의 '시니피앙 연대'를 지향한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각자 개인 입장에서는 소외나 고립, 분리를 중심으로 체험되는 '세계'일지언정, 일반이라 불리는 사회 전체를 향한 시니피앙'만큼은' 유대가 가능한 방향으로 설정해두어야 개인 간 좌표가 말그대로 무중력 상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20세기부터 범람하기 시작한 각종 위기론, 종말론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붙드는 중력(의미망-이론-진리-이념 등등)이 소실되고 있다는 코드를 공유하는데, 어쨌든 21세기 도시 네이티브-디지털 네이티브들은 자신들의 환경에 맞춰 업데이트된 중력을 확인하고 그것을 모닥불삼아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서술이 나이브한 일반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1. 세계 몰락 체험


이제 내 이야기를 정리할 차례다. 정신병리 쪽 텍스트를 접하다보면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정신 사태' 중 하나가 바로 '세계 몰락 체험'이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퇴행'이라고 불렀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 모두(대상 모두)가 의미와 중요성(사실성)을 상실하고 만다.

 - 고백에 따르면, '조립된 인간들', '조종당하는 인간들', '소품 같은 인간들', '인형-기계-장치 같은' 등으로 형용된다.

 - 이것은 일종의 세계 붕괴이며, 그 체험에 속한 주체는 '무의미'에 노출되고 만다.


 이것을 간단히 '세계 몰락 체험'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과거 실존주의라 불린 '실존 체험'들의 코드들과 맞물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면모는 정신병 측면에서, 급성기에 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포착된다고 전문의들은 말하는데 내가 느끼기론 이 체험은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무의미의 차원'이다. 반대로 한 인간 정신에 있어 이런 체험은 왜 나타나는가? 혹은 '당하고 마는가?'라고 의문을 품어 본다면, 그것은 라캉의 공로를 따라 그것이 사실 몇 개의 '-계'로 나뉜 시니피앙 간 의미작용의 오류라고 식별해 볼 수 있다. 만약 라캉의 현실계-상상계-상징계라는 감각 없이, 혹은 이것들이 오직 '의식'이라는 분별되지 않은 자각 차원에서만 알아차리려고 하면 솔직히 노답이다. 그러니까 당사자는 도대체 왜 자신이 무의미의 늪에 빠지고 말았는지, 어째서 사람들이 어느 순간 어떠한 존재 의의도 없는 것처럼 구멍이 나고 말았는지 혼란과 당혹스러움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몇몇 작가들의 글을 통해서도 이런 면모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인간실격이나 데미안 같이 '개인의 인격'을 둘러싼 이야기를 서술한 온갖 작가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이 세계 몰락 체험의 코드를 갖고서 갖가지 정동을 묘사한다. 때로는 발달 측면에서 한 인간의 청소년기에 자주 발견할 수 있는 면모로, 좀 더 안전하게 포착할 수 있다. 이것을 안전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에도 깔려 있지만, 그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잠깐'의, '질풍노도'같은 일종의 방황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것이 잠깐일 수 있기 위해서 전제되는 건, 그 주체가 어쨌든 적절한 사회화로 다시 회부될 것을 기대하게 하는 인간 정신의 적응력이 내재되어 있음이다. 과거 인류 공동체에서도 늘 있는 이러한 '기대 전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무언가 심각한 결함이라는 듯 문제 설정을 하지 않아도 내비두면 알아서 무언가로 안정화시킬 거라는 식으로 일종의 '비의식 처리'를 해왔다. 하지만 '심리학'이라는 이름 하에 들춰지기 시작한 인간 정신의 연대기, 그 역동은 오늘날 (비)의식 처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의 영향관계는 아무래도 '신경증-정신병'을 분석-해석하는 데서 파생된 모종의 경각심이다. 그러니까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다요?라고 묻는 게 우리네 옆집 아저씨고 아줌마고 이웃인데,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 어릴 때 부모가... 그런 사건이... 그런 상처가... 따위로 의미망이 연결되고 나면 이후에는 그런 코드가 식별되는 사건이 현실로 나타날 때마다 도래하지 않은 어떤 미래의 면모(신경증이 발현된 면모 혹은 정신병이 발현된 면모)가 선취되어 그것을 다루는 의식이 수정되는 것이다. 정신의학이나 정신분석의 '현장'에서는 분명 엄밀하고 신중한, 그래서 통념으로 유통된 방식에 일갈을 가할 정도의 엄격함을 유지하겠지만 소위 '정상'의 현장에서는 이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들이 소급-누적되어 결국 통념으로 포착되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니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시니피앙의 특기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유연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몰락 체험은 정신병의 급성기에'만' 체험되는 정신의 특징적인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고통에 상대화를 금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더 아프고 괴롭다 너는 덜 괴로운 것이다 따위의 고통 후려치기가 권장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네 정신에서 '자각'되는 온갖 체험이나 상태는 주관이라는 이름 하에 반드시 '진실'로 여겨져야만 한다. 그러니까, 신경증-정신병이라 감별될 수 있는 여러 면모 속에서 사실 '감별 주체'는 외부 인간, 보통은 권위를 입은 인간이라는 그 '현장'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라캉은 후기에 이르러 디스쿠르라는 것으로 이 관계망을 포착하는 데로 나아갔지만, 융은 그런 엄격한 논리 전개를 포기하는 대신 시니피앙 그 자체의 효과를 냅두는 태도로 '에로스'라고만 불렀다. 전자도 당연히 유용하고 대단한 것이고, 후자도 좋은 접근이다. 중요한 건 어쨌든 정리정돈을 해 우리 인간 일반에게 어떻게 도착하는지다. 내가 보기에 세계 몰락 체험은 더 이상 특징적인 체험이 아니라 우리네 인간 일반의 체험으로 도착해 있다. 그 반향으로 순간주의적인 '의미 포착(향락)'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방증하는 게 아닐까.


 몰락은 시니피앙 자체로도 그렇지만, 어쨌든 감당하기 힘든 체험이다. 그걸 왜 버티고 있어야 하는가? 나같은 변태들이나 그런 걸 감당하려고 하지, 인간 일반에게 권장될 만한 건 절대절대 아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런 '불쾌한 고통'보다는 '즐거운 쾌락'으로 이동한다. 이걸 쾌락원리라고 세속화된 버전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이것을 하나의 원리라고 부를 때의 유의미함은, 반대로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왜 이러저러한 것들을 통해 쾌락을 누리려고 하는가?라는 이면으로는 무엇에서 쾌락과 반대되는 '고통'을 느끼는지, 은폐된 그것이 어디인지를 더듬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 분명한 건 쾌락이 있는 곳은 아닌 것이다. 


 보통의 세계 몰락 체험은 인생의 격변기에 도래한다. 난데없이 어떤 '병'을 앓게 되었을 때, 사건-사고가 벌어졌을 때, 이별-사별을 했을 때 등등 우리네 정신사 측면에서 무언가 강렬한 의미망이 한순간 뿌리 뽑히는 바로 그 전환기에 나타난다. 이걸 하나의 코드로 보면, 우리네 정신은 분명 무언가를 고정시키고 신뢰할 수 있는 '시니피앙 의미망'을 붙들고 있는데, 이것이 와해되거나 도미노처럼 톡 치니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할 때 '세계가 몰락한다'는 것으로 투사-내사가 이중 발현된다는 것이다. 아주 가볍고 사소한 측면에서 보면 푹 빠져 보던 드라마가 끝이 났을 때, 게임에서 죽었을 때, 팬질하던 연예인이 은퇴-연애-결혼을 선언했을 때, 직장에서 짤렸을 때, 친하다고 여겼던 친구가 날 함부로 대할 때 등등이다. 아주 막대한 격변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사소하고 가벼운 일련의 체험도 국소적인 '세계 몰락 체험'이다. 단지 그것이 막대할 만큼의 '중심'에 다다르는 기반을 형성하고 있지는 않기에 얼마든지 복구가 가능하고, 대체가 가능하고, 매개가 가능하다. 


 보다 극단적인 케이스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갈 때까지 가고 말아버린 조현병의 정신이다. 한번 상상해보라. 자신이 생각하던 세계란 것이 하나둘 의미가 없어진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되고 말아버리는지 그 원인이나 이유조차 알 수 없다. 이것은 '당혹감'조차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주체는 이 사태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신이 겪고 있는 이런 '고통'은 절대 없는 게 아니다. 그래서 정신은 그에 맞춰 적응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구멍을 수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덧댄다. 이 무언가는 보통 특정 코드들을 빌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개개인마다 고유한 시니피앙 체계 속에서 발현된다. 그렇게, 세계는 재조정된다. 라캉이 정신병은 무매개된 무의식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측면에서였다. 조현병의 면모를 보면 무의식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질적인 정신 상태가 대뜸 한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있다. 그 반대 급부로써 일반 인간들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세계 몰락 체험이라는 코드는, 자상을 입은 신체가 새로운 살을 돋아내듯, 정신의 균열을 메우기 위한 자발적 회복이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회복인지는 사회적이지 않다는 게 기본 통념이다. 그러니까 정신병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보내거나, 그들이 다시 퇴원을 할 때 무얼 주요하게 여겨야 하는가를 보면, 그들이 과연 사회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을까? 노동을 할 수 있을까? 자기 삶을 책임질 수 있을까? 밥벌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등등의 사회화 능력이다. 이 문법이 작동하게 만드는 코드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알아서 자생할 수 있는' 코드다. 하지만 갈 때까지 가고 말아버린 정신의 수복 방향성은 '사회화'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자생 그 자체'를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회복이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의미에서의 회복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물어볼 수도 있어야 한다. '사회'라고 하는 건 어떤 '정신 상태'를 요구하는가?라고 말이다.


 여기서 푸코의 논의를 덧대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정신 상태라는 표현보다 '우리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기 위한 정신 상태'라는 것으로다. 세계 몰락 체험 그 자체는, 그것이 가벼운 수준에서부터 막대한 수준까지의 스펙트럼 연속성이 있는 것이라고 가정할 때, 한 개인의 정신 사태이지 '같이 살기 위해 요구되는 상태'와는 별개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내가 겪었듯 버스에 무임승차한 중년의 여자도, 같은 사회에 살아가는 시민으로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겨져야 한다. 비록 그녀가 망상 장애라 불리는, '같지만 다른 현실'로 살아가기에 아무래도 사회 질서와 충돌-갈등을 숨쉬듯 겪을 수밖에 없음은 불가피하다. 일단 무임승차부터가 그렇고, 경찰에 붙들려 취조를 받을 때도 그렇다. 경찰들은 그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메뉴얼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사회화된 인간들에 비해 사회 제도를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며 이리저리 '운송'될 수밖에 없는 일상으로 모양날 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구조 접속'을 꾀할 것이기에, 더욱더 강화되거나 보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가 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인간 주체의 코드는 '법, 경찰, 치안, 질서, 죄와 벌'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코드는 해석 입장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의 시니피앙을 연상하는 데 너무 찰떡같을 수밖에 없다. 다만 라캉처럼 시니피앙의 구조만 볼 게 아니라 사회 현실의 구조 또한 그릴 수 있으면 좋다. 그러니까 왜 그런 코드들이 서로 맞물릴 수밖에 없는가?라는 유발되는 지점, affordance를 인식할 수 있으면 좋다. 


 한 주체에게 벌어지는 세계 몰락 체험은 이처럼 그가 속한 사회문화적 코드들과 어떠한 상호작용을 맺는지에 따라서도 변화할 여지가 있다. 나는 현재 수 년에 걸쳐 세계 몰락 체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놈의 무의미. 그놈의 만들어진 것들. 그놈의 가치박탈. 진짜 지긋지긋하다. 시발 것들. 엿까. 근데 내 정신의 기반, 시니피앙의 뿌리, 증상의 뿌리를 이루는 신뢰가 충만한 디딤돌은... 아무래도 분열될 마음이 없다. 나는 이걸 나이브한 표현으로 '인류애 혹은 중재'라고 부를 뿐이다. 그러니까 이게 무너지는 순간, 나도 한순간 골로 간다. 사회로부터 이제 굿바이다. 반면, 이러저러한 지형도를 그려낼 수 있는 나의 이성-직관의 힘으로 말미암아 나는 어떻게 이것을 다시 수복하고, 재건하고, 혹은 큰 그림을 위해 '세계 몰락 체험' 그 자체를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지도 식별 가능하다. 당연한 현실이지만, 이건 절대 간단하고 단순한, 존나 쉬운 성질의 것이 아니다. 너무 막막하고 노답이다.


 그래서 세계 몰락 체험은 인간에게 권장할 수 없는 체험이다. 그것은 한 인간을 쉽사리 범죄자로 전락시킬 수 있고, 마약 중독자로 만들 수도 있고, 테러리스트로, 자폐증자로, 조현병으로,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온갖 소수자로 모양낼 수 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수자들의 특권적 '타자성'을 포착해 다시금 균형을 재조정할 수도 있고, 포착되지 않는 은폐된 소수자들을 호명할 수도 있다. 그중에서 예술가들은 최대한 사회 호환적인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이 세계 몰락 체험을 보존하는 소수자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도 변한 사회문화적 맥락과의 구조접속에 따른 현상 중 하나다. 소위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일련의 기법들, 시조들이 이런 코드를 공유하고 있는 건 '현대'라 불리는 현상 중 하나다. 후기 라캉에 이르러 '향락'으로 좀 더 논의의 중심이 이동한 건 내가 보기에 매우 뛰어난 통찰이다. 어쨌든 우리 시대에 속한 우리는 무엇을 좀 더 중점적으로 다뤄야 하는가?라는 선택 분별의 순간에 있어 결국 초점이 이동되어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역시 향락이라 불리는 주체의 '단독성'이다.


 향락이 왜 중요한가? 그것을 이모저모 따져 정리하기란 너무 빡세다. 각 분야의 학자들이 내놓는 것들을 통합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찬 일이다. 일반 시민 입장에서는 그저 낭만성-진정성 키워드를 갖고서 러닝머신을 타듯 움직이는 게 그나마 보급된 버전의 시니피앙이다. 나의 도전은 일단 세계를 지탱하는 외부의 '의미망'을 하나하나 구멍냄으로써 이것이 재통합될 수 있는, 가타리 용어대로 '횡단'할 수 있는 새로운 시니피앙 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라는 아주 무모한 도전이다. 이 짓거리를 왜 하는가? 5-60년대 라캉식으로 부르면 나의 '팔루스 결여', '남근 거세'가 그 원인으로 포착될 수도 있겠다. 다만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둘러싼 향락을 도모하는 건 아니라는 게, 자각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나에게 있어 무의미란 '끝이 없는 분석'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발 도무지 끝이 없다. 세상의 모든 의미화가 그저 만들어진 것의 산물이라고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고 때론 전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 혹은 의도된, 설계된, 자폐적으로 유도된 오픈 월드라는 인식이 증식하고 만다. 그랬을 때 세상은 믿을 만한 것이라기보다 사용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시니피앙의 뿌리가 될 수 없고, 오직 결여된 시니피앙을 메우기 위한 향락 차원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이것은 도무지 중단될 수 없는, 무수히 반복되는 '증상'이다. 즉, 나에게는 생톰이라 불리는 그러한 뿌리 탐색이 어떻게 가능한가가 '탈출구'로 나타나는 것이다. 현장에서 신경증-정신병으로 진단된 인간 정신에 있어서도 가열찬 '끝이 있고 없고'가, 일개 시민의 정신에서도 그정도의 심급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나에게 있어 당연히 '그렇다'이다.


 이것은 당사자의 정동을 내려치거나 올려치는 따위의 (베버의 용어를 빌리자면)인지적 합리화는 철저히 거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한 개인의 정신은 언제나 반드시 '세계의 진실'로써의 심급을 부여받아야 한다.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그래서 무수한 비판을 적용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쇼펜하우어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를 명제로 채택하는 것이다. 표상이라는 용어에 분화를 꾀해야 한다는 이성 사용자들의 노력은 나에게 관심 밖이다. 내가 주요하게 보는 건 바로 그 코드, 어째서 세계가 '나의 표상'과 대응되는 것으로 여겨지는가 하는 바로 그 코드다. 그것은 우리네 정신을 문자 그대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정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의 한 조각이다. '과학적'이라 불리는 객관적 호명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보통의 정신병에서 자주 관찰되는 지점은 이러한 '자명성의 상실'이 문제시되는데, 그래서 일반 사람들과 도무지 어울리지 못하는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마치 하나의 네트워크처럼, 객관성이라는 허브가 형성되고 유지될 때 그것은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경유하지 않는 루트를 활용하는 정신에게 허브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나의 문제는 이 세계 몰락 체험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결국 시니피앙 체계를 재구성해야만 한다. 라캉식 분석으로 출현하는 제임스 조이스식 향락으로 나아가는 건 나의 고유성과 맞질 않는다.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루트는, 결국 누군가에의 향락이다. 라캉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와의 의미작용, 쉽게 말해 '읽힌다는 사건'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일단, 읽을 수 있게 꺼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게, 다시 라캉식으로 말하면, 결국 팔루스 부재로 인해 소외나 분리 메커니즘으로 도피(채택)하고 말아버렸다는 방증이다.


 라캉의 배울점이라고 하는 건 바로 이 향락을 다시보기 위한 도구 제공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분명 쾌락 원리라고 범박하게 부를 수 있을 법한, 욕망 코드가 있다. 이것의 분화가 때로는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삶의 순간이 오는데, 나에게 있어서는 지금인 거 같다. 퇴행한 나에게 있어 가장 먼저 붙들린 융이라는 지팡이 다음으로, 이제는 라캉이라는 거울 도구를 만났다. 융은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고, 라캉은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둘이 서로 호환되지 않았다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서로 다른 용법이니 그럴 수밖에. 이제 향락의 틀에서 정리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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