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와 돌멩이 Jun 21. 2024

정상-병리, 정신으로의 삶 1

작업 노트 12


24.06.21



미뤄둔 라캉을 읽었다. 해제로 참조한 책은 [모든 인간은 망상한다] - 마츠모토 타쿠야. 나는 프로이트-라캉을 어떻게 읽었으며 일상-'나'라는 개인에게 어떻게 회부시켰는지를 정리하고자 글을 남긴다. 원래 여기에는 읽는 이를 배려하는 글을 아예 쓰지 않는 연습장인데, 그래서 오가기 편한 다리는 고사하고 어느 정도의 비약을 허용하는 징검다리조차 불친절한 편이다. 이번 글도 아마 그럴 예정일진데, 라캉식으로 말하면 이곳은 신경증으로서의 시니피앙 연쇄 층위를 상상계에 과정으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타쿠야의 정리에 동의한다면 50-60년대 라캉식 관점으로의 '신경증-시니피앙 은유'다.


 몇 가지 술회를 하자면, 먼저 융과 라캉의 관계는 팔루스 결여를 채우려는 '왕자'와 개인화 과정이라 불리는 '정신의 단독화'를 꾀하는 '유배자'의 관계로 보인다. 여기에 프로이트를 어느 정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이 내용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망상-해석'이기 때문에 관점의 상대화가 발생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일단 프로이트는 나에게 있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내사內射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쉽게 말해 '아버지'가 되고 싶어 환장한 인간으로'만' 읽히기 때문에 가치가 없어 보였다. 그는 성욕에 환장한 인간이고, 세상 모든 정신을 오직 성욕으로만, 그것도 남자의 성욕으로만 설명하고 이론으로 구축하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어 보였다. 이렇게 말하면 그를 너무 평가절하하는, 가치박탈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후대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아마 프로이트-라캉식 관점에 자신의 정신을 의거시킨 자라면 이런 나의 '감정' 반응 속에서 '부친살해 콤플렉스'를 읽어낼지도 모르겠다. 나의 개인사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내가 나의 아비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시절이 있음을 안다면 너무 입맛다시는, 맛있어 보이는 해석이지 않은가.


 프로이트라는 건 이런 것이다. 그가 인류사에 있어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그것은 후대 인간인 내가 보기에 '첫단추'를 꿰는 아주 훌륭한 업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처음이라는 것 자체에 막대한 권위를 부여해야 하는 데 딱히 거리낌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꿈'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론적 층위로 다뤄질 수 있는지를 개척한다는 것. 언어의 의미작용 간 기묘하고 모호하게만 여겨졌던 '층위'를 대상화 방식으로 이전에 없던 '추상화'를 꾀했다는 것. 언어의 논리가 정신과 대응될 때 어떤 효과와 기능이 나타나는지를 관찰-추적할 수 있게 등대를 세웠다는 것. 그러니까 프로이트는 상징계로서 '아버지'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 증거는 프로이트에게 있질 않고(당연히 프로이트 자체에는 결여되어 있기에-예외되어 있기에) 그를 추종하는 인간들의 태도를 통해서 출현한다. 


 실존 인물인 프로이트-융-라캉의 프라이버시에 대해선 그닥 궁금하지 않다. 다만, 그들의 '정서 반응'은 이성이라 불리는 언어 작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근간을 이룬다. 왜냐하면 언어란, 그저 단순히 문법에 의거한 논리와 의미작용으로 '중립'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층위를 담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드러나지 않은 '사적인 것'을 함부로 더듬으려 하는 건 이성 입장에서 저열한 쪽에 속한다. 이런 반응은 이성-언어-논리를 우월하게 여기는 정서 억압자들에게서만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융을 '파문'했다고, 라캉은 [에크리]에서 적고 있다. 라캉은 에크리에서 융을 몇 번 언급하기도 하는데, 대체로 그는 융을 '파문당한-유배당한', 버림받은 아들 혹은 첫 번째 부인으로 여기는 것처럼 기이하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서로 보고 싶은 것만 보아야 했기에, '보고 싶다'는 틀 외에 잔존하는 여러 의미작용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몸부림에 다름아니다. 프로이트가 융에게 그랬고, 라캉도 융에게 그랬다. 일단 나는 융을 아버지로 여기고 싶은 추종자는 아니다.


 60년대 후반 이후의 라캉을 '후기 라캉'이라고 굳이 나눈다면, 그 전까지 라캉은 아버지-팔루스(남근)에 환장한 인간이었다. 프로이트도 그렇고, 왜 그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신화적 모델에 그렇게 흠뻑 취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러니까, 그 상징계를 왜 그렇게 상상계로 전환시키려고 갖은 애를 써야만 했을까? 이들은 자신이 만난 사람(환자)의 사례를 자신들이 구축하고 해석하고 싶은 이론에 어떻게든 끼워맞추려고 노력했다. 무언가를 설명할 때는 그걸 예시로 보여주는 인간이 늘 준비되어 있었다. 한스 도라 슈레버 쥐인간 등은 '아버지 신화'를 위해 바쳐질 정신으로서의 공양에 가까웠다. 그렇게 계속 사용되고, 소비되었다. 덕분에 온갖 인간들이 이들의 '정신'을 프로이트의 해석으로, 라캉의 해석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당대에는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은' 시대였단 의미다. 왜냐하면 그들(신경증 환자, 히스테리 환자, 정신병 환자 등등)은 그보다 더한 비인간적 대우를 받는 소수자였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라캉의 출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석'이란 이름 하에 각종 정신질환, 특히 신경증-정신병을 치료한다는 명목 하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카우치)를 열심히 조절했다. 문제는 어떤 사람에게 '분명해 보이는' 치료 효과가 관찰됐다는 것이고, 그것이 유의미하고 유효하다는 깃발이 펄럭였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프로이트-라캉-이 둘의 온갖 추종자들에게서 풍겨오는 불쾌감은 '이론'을 대하는 그들의 향락에서다. 만약 이 향락이 없다면, 나는 그들에게 별다른 정서 반응-가치 박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융처럼 말이다.


 라캉은 융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데 소위 초딩스러웠다. 그는 융을 알려고 노력하는 건 일절하지 않은 채 오직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바로 그 '순간'에 마치 자신이 상처를 받은 것처럼 반복적으로(증상으로) 융을 언급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결국 융의 정신관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여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팔루스(남근) 중심의 시니피앙 구조론은 주장될 때는 자신만만한 '아버지'처럼 당당하지만 고작 십 몇 년이 흐르자 그게 아니라는 걸 인정했는지 수정하고, 또 수정하기에 이른다. 실질적으로 라캉이 이에 대해 수치심이나 어떤 부끄러움, 양심의 가책 등을 느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그가 구축하려는 '구조론'이 어떤 위상을 지니는지, 그 명석한 두뇌로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에 따른 '이성의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가타리 말마따나 라캉 또한 스키조프레니(정신분열)의 면모가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처럼 끝까지 자신의 오만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눈을 감는 것도 '아버지'로서의 한 면모이니 사실상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로서의 프로이트에 대한 주석'의 태도를 견지하는 라캉으로서 그러한 면모를 따라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식의 서술은 융의 용어를 빌리지면, '로고스'에 흠뻑 취할 수밖에 없는 '남자'들이 어떤 행보를 걸어나가는지를, '에로스' 측면에서 읽어낼 수 없다는 걸 시사한다.


 라캉은 자신이 구조주의와 실존주의를 습득해 시니피앙 구조론을 구상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기호에 매우 섬세한 지적 능력이 있음을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융의 상징화를 읽어내지 못했는지 안했는지, '그 밖'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밖'이란 결국 말년의 라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 현실로서의 '관계성'이다. 이를 융은 그저 간단히, '에로스'라고 불렀다. 융은 이성'만' 사용하는 인간들에게는 아마도 저급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 타깃팅이 융에게 향하지 않더라도, 결국 이성의 여정을 살펴보면 '저급하게 여겨야만 하는 대상들'이 반드시 출현한다. 라캉에게 그것은 '여성'이었고, '여성의 향락'이었고, 말년이 되어도, 그러니까 결국 라캉이라는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인간' 또한 그 대상들이었다. 가타리가 '기계'를 대상 a와 유사한 층위로 다루면서 동시에 '기계'라는 의미작용이 현실에서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징검다리로 넘나들 수 있는 어휘로서의 '기계'로 다뤘을 때, 어쨌든 세계는 1900년대 후반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후대 사람이란 건 이런 것이기도 하다. 당대에서는 아마도 우뚝 솟은 산처럼 보일 지적 여정이, 시간이 흐르자 점차 무색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후대 사람의 지적 능력이 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비추는지의 사회문화적 정신-의미작용이 변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1900년대 초중반에는 팔루스 중심, 아버지 중심, 가부장제라는 남성 중심의 성욕을 갖고서'만' 인간 정신을 이리저리 휘저어도 먹혔다. 그 이유는 실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인간 정신의 본질적 뭔가를 가리키고 있어서가 아니지만, 프로이트나 라캉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팔루스-아버지'의 시니피앙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봐야지 21세기에 프로이트-라캉을 읽는다는 것이 유의미함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내가 융을 읽는 방식은 애초에 이런 것이었다. 융이 원형을 말하고 상징을 말하고 아니마-아니무스, 로고스-에로스를 말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 '어휘'가 가리키는 의미작용 또는 시니피앙을 고정시킬 게 아니라 최대한 당대의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런 어휘가 어떻게 '운동'하고 있는지의 리듬을 익혀서 21세기 일상생활에서 그와 유사한 리듬과 접합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구조론, 위상론, 형식논리 등으로 이론화한 라캉의 공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라캉이란 사람은 정말 대단하게도, 이걸 '형식'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욕심을 부린다면, 라캉에게 일상 언어의 감각이 추상 언어의 감각만큼 발달하지는 못했다는 데 안타까움을 내비출 수 있달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융'의 관점을 따라가고 있었다고 해석을 하면 너무 얼토당토않은 것일까? 일단 나는 그렇게 보인다.


 이론 구체화에 목매는 이성 사용자들은 아무래도 그들의 추종자 때문에 더욱더 로고스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로고스 중심의 에로스로 자신의 열등함을 어느 정도 순환시키고 있기 때문에 '당면'의 문제로 다가오진 않는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아버지의 이름'이 결여된 채로 시니피앙의 연쇄를 부지런히 발달시킬 때 그 연쇄 작용이 현실계와 상징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투사-전이되는 '타의 향락'으로 출현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체험이 그들을 더욱 '로고스'에 머물도록-향락하도록 안전 장치가 되어주는 것이다. 나는 이 차이가 어째서 그렇게 머리가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역시 개인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통념을 빌려 표현하면 '자기 관찰'이 가능한가의 여부로 그 차이가 상대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뚜라나-바렐라 선생들의 '인지-자기생성구조'이기도 하다. 데리다마저도 초기 라캉만을 붙들고 비판을 하는 걸 보면, 사실 이런 면모는 에로스의 힘을 빌려 소위 '인간미'라고 퉁쳐서 봐줘야 하는 부분-결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무엇이든 사람은 자신에게 '받아들여진' 것을 향해 좋게 보고자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향해서는 고정시키는 구조가 있다. 좋게 본다는 건 분화를 의미한다. 차이가 포착되고, 섬세화되고, 미분화된다. 반면 고정시킨다는 건 차이가 배제되고, 소외되고, 적분화된다. 이것이 우리네 '정상'이라 불리는 '병리'다. 병리라 부르는 이유는 통념과의 어긋남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자신에게(신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 언어적인 것, 정신-심리적인 것을 통틀어 자아와의 관계 총체에게) 대항하고 저항해야 하는 모든 걸 '병'이라는 시니피앙으로 처리한다. 그것이 현실로서 작동하는 소위 의료-치료계에서 포착되고 대처될 때 우리네 삶에서는 상징으로서도 충분히 작동할 수 있는 닻을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딱 여기까지다. 아직 우리 사회는 '병리' 그 자체를 '병리'로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이상한 것, 배제해야 하는 것, 억압해야 하는 것, 재빨리 없애야 하는 것, '좋게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이건 이론의 문제도 아니고 운동의 문제도 아니다. 사회 통념은 저항이나 혁명의 문제로'만' 변혁되는 게 아니라는 여지를 아는 게 필요하다.


 어쨌든 라캉 또한 정신분석에 있어 '끝이 있는 분석' 혹은 '끝이 없는 분석' 간 어떤 지향점을 가지는지는 아쉽게도 '정상'의 층위는 아니다. 융의 포지션이라 함은 '정신-무의식'을 가능한 '인류'로 확장함으로써 보다 일반에 가까운 접근, 호환을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면, 프로이트-라캉의 포지션은 소위 예술가라 불리는 인간을 갖고와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라캉은 제임스 조이스를 갖고와, 그것도 꽤나 의존적이라 부를 정도로 반복적으로(중독적으로), 모종의 '끝'을 확인했는데 타쿠야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현실에 적응하는(발명하는) 데 성공한 자폐증자다.


 그러니까 융은 균형의 발달로서 '중재자'를 지향한 반면, 라캉의 마침표는 '자폐증자'에게 찍혔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욕망을 구체화함으로써 현실 간 고리를 형성해 향락을 누리는 자폐증자는 가타리의 '횡단성'을 유의미함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일반 인간인 내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소수자'다. 그리고 창작자로서의 내가 보기에 그들은 안타깝게도 그렇게 추구할 만한 '인간의 삶'이 아니다. 자기 향락에 성공한다는 건,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이데거를 경유한 '현존', 기무라 빈의 축제festum에 참여하고 있는 자다. 그 '상태'는 아무래도 소외나 분리-분열 따위는 우스울 정도로 충만한 상태다. 그것이 쾌락인지 고통인지는 밝힐 수 없다. 왜냐하면 '충족'의 문법 밖에서 벌어진, 과거 샤먼의 '무아지경'과도 같은 것으로, 일반 인간들은 예상하고 추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190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에서 태동되어 문화가 된 '히피'들의 마약성 환각 놀이(영적 체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라캉의 용어대로라면 그들의 '향락'은 매우 세속화된, 그럼에도 '융'과 접합된 참으로 기괴한 '자폐증자의 발명'이다. 그러니까 '이론'대로라면 그들 또한 '모든 인간은 망상하고', '인간에게 성관계란 없다'고 말하기 위해 모범 사례로 추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사회-문화를 향한 관찰과 인지를 배제하지 않는 '현실'에서는, 그런 사례는 결코 모범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자생력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기계 장치의 자폐증적 향락 체계는 놀랍게도 이 세계를 지탱하는 강력한 '보편'이기도 하다. 그들의 재귀적 시니피앙의 무한한 반복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특히 선진국이라는 낡은 표현으로 묶이는 국가의 대도시 시민들은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 풍요라 함은, 범박하게 '무의식의 자기동일시'라는 것으로 겨냥되기도 했듯이 기계 장치의 자폐증적 향락 체계를 모방-학습하는 시니피앙의 상징계를 구축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우리 인간의 소비, 삶의 모델, 일상의 관습, 가치관 등등에 왜 자꾸 '개인주의'라는 식으로 고작 파편 하나로만 표현되는 '자폐적 면모'가 구축되는지를, 그저 유사한 파편을 갖고서 인과적으로 꿴다고 해서 다뤄지는 게 아니란 것이다. 순간주의, 소비를 하는 것에서 벌어지는 인간 정신의 '상태'. 증상으로서의 반복, 자신의 '버릇이나 습관'을 교정하고 관리하려고 갖은 애를 쓰는 인간 정신의 '상태'. 이미지, '보여지는 온갖 면모(특히 포르노-섹슈얼)'들을 갖고서 사로잡힘과 강박-정서 반응을 느끼고마는 인간 정신의 '상태'. 이런 면모들 속에는 자폐적 면모가 관여되고 있으나 어째서 우리 인간이 이렇게 모양나고 말았는지를, 그것이 구조가 되었든 생성변화가 되었든 간에, 일단은 향락 위에서라는 게 현실이다. 향락, 주이상스는 라캉이 보기에 끊임없이 수정될 수밖에 없는 '가정'이지만, 내가 융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향락 또한 그것이 어떻게 운동하는지의 리듬을 본다면 그것이 '팔루스'가 됐든 '아버지'가 됐든 뭐가 채워지든 에크리튀르는 바뀔 수 있어도 새겨질 수 있는 에크리튀르의 PlaceHolder는 여전히 우리네 정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고정된 것인지, 또는 변화하는 것인지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당면한 사회문화적 코드로만 회귀시킬 따름이다. 


 어쨌든 술회는 이정도로 마치고, 이번에 라캉을 읽으며 라캉에게서 배운 것, 배울 점을 토대로 정신으로서의 삶에 어떤 '일반'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예정이다. 내가 느끼기에 주구장창 푸념으로 늘어놓았던 실존, 소외, 고독 등은 확실히 어떤 정신 일반 작동의 '효과' 중 하나다. 라캉의 공로라고 한다면, 시니피앙을 다루게 함으로써 이러한 향락의 틀로부터 '거리 두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본래 정신 그 자체가 그렇다는 불필요한 생각은 가질 필요도 없이, 어떠한 언어의 의미작용에 열심히 '분화'를 꾀하다 보면, 그러니까 받아들이려고 애를 쓰면 반드시 그에 따른 효과가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인지의 비밀이자 신비다. 이것 그 자체는 아마 블랙박스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이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해서 '상징'을 식별할 수 있게 됐나요?라고 묻는 것과 같은데, 그것은 마치 창조주에게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어요?라고 묻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아마도 인류 역사에 비하면 참으로 '짧은' 시간 안에 인간은 이 비밀을 밝힐 것만 같다. 나는 이를 어렴풋이 느끼는데, 발생-효과라 부를 수 있는 어떤 만남과 접촉을 통한 구조 변형으로 인해 모양나는 '분화'의 모델링은 현재 챗 GPT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사용자인 우리 인간과의 상호성 속에서 확인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이러한 자폐적 정신을 받아들인다면, 인지의 비밀은 사실 밖에서 열리는 문, '당기시오'였다는 걸 아는 순간 열릴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들썩거리는 정신 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