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노트 21
24.09.20
밤을 새고 눈을 붙이기 전에 일지를 남긴다.
어제는 자기부전감에 시달렸다. 정신 흐름으로 보면 명절 전에 있었던 불안 체험으로부터 이어진 상태다. 시를 쓰기 위해 불질을 하던 중 불티가 생겼고, 잿더미에 떨어졌다. 나의 불안이 잠든 곳이었다. 어쩌다 그런 흐름으로 이어지는지의 맥락은 충분히 의식되기에 언어화가 불가한 건 아니기도 했다. 원하는 시집, 그 언어의 집을 배경으로 삼는 세계에 대한 추적을 보다 선명하게 한다는 맥락이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 쓴 시를 다시 보게 되었고, 세간에서는 시를 어떻게 읽고 느끼나 잠깐 엿보다가 덜컥 나에게는 사람들이 느낄 만한 '시적인 언술'이 전혀 쓰이지 않다는 게 건드려지고 말았다. 나에게는 사람들의 시적인 것이 전면 부정된 게 아닐까, 싶은 불안이다.
읽히기 위해 쓰는 글에 읽힐 만한 뭔가가 없는 글을 쓴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무슨 허황된 박치기란 말인지. 나조차도 무엇이 시적인 것인지 정체불명인데 말이다. 예전에 한 시인이 내 시를 보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나의 시를 찾는 거 같다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언어를 다듬는 거나 문장을 만드는 것, 사람들로 하여금 읽었을 때 무언가를 느끼도록 하는 것, 드러내지 않고도 드러낼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은 내게 배워야 할 과정에 놓인 게 아닌, 내가 시적인 것으로 느끼는 그것을, 어쩌면 마지막 퍼즐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핵심을 끼워 맞추기만 하면 비로소 시가 될 수 있다는 그런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느껴질 뿐이다.
어제 몰스킨 노트 한 권이 끝났다. 3년이 걸렸다. 21년 10월 중순부터 쓰기 시작해 이제야 끝에 다다랐다. 이로써 나에겐 5권의 노트가 세월을 담고 있다. 마지막 장을 쓰면서 울었다. 이 노트에 글을 남기는 나의 모습에 변함이란 없었다, 어떤 마음으로 노트를 열고 닫으며 펜을 붙들고 끄적였는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들어 보겠다는 작고 희미한 마음으로 간신히 들고 다닌 노트였다. 삶의 부채감으로 놓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서도 위로와 용기를 받을 수 없는 나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는 현실은 이 세상에 노트가 유일했던 것이다. 그 사실이. 그 현실이 슬펐다. 친구나 가족, 애인에게서 받을 수 없는. 안길 수 없는 내가 있다는 게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나만이라도 이 현실을 지켜야 한다고. 내가 등돌리는 순간 이 현실은 거짓이 되고 만다고. 그런 소리없는 비명만이 새어나왔던 거 같다.
정말 지저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그런 마음으로 3년이나 노트를 쓴다는 게 내 상태가 얼마나 지독하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걸까. 무엇하나 나아진 게 없어 보였다. 무엇하나 진전된 게 없어 보였다. 제자리에서 맴돌며 동어반복만을 일삼는 내 모습이 3년이나 찍혀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부정하는 시간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 감도 안 온다. 인정받을 수 없는 욕구의 반동일까? 직접 해내지 못한 데 쌓인 불만의 보상일까? 내면 작업으로 보면 이 메커니즘은 너무 당연해진다. 이 문제는, 내가 여전히 나의 그림자를, 열등함을 얼마나 못 다루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 나를 위해 마지막에는 고생했다는 말을 적고 노트를 덮었다.
불티가 떨어진 잿더미는 나의 열등함이 숨쉬는 곳이다. 그곳은 나의 선취 능력이 앞질러 가서는 '이곳에 뭔가가 있을지도 몰라!'라며 손 흔들며 막 들떠 있는데 내가 몸을 이끌고 가지 않아 부패되고 말아버린 충동의 무덤이다. 내가 직관 능력을 얼마나 발달시키지 않았으면, 내 능력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퍼지고 만다. 그걸 수복한답시고 명절 전에 결국 다시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전에 수집했던 일본 정신병리 텍스트들을 다시 정리하고 (멍청하고 바보같은 어리석음으로)검색했다. 불안에 휩싸여 자기부전감에 시달리는 자아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 지난 과거의 나로 숨어들게 된다. 그때의 정서로 현실을 애무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내겐 한국어로는 결코 읽을 수 없던 어떤 미지의 언어였다. 그것이 내게 새로움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내가 찾던 그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지는 않을까, 그런 안일하고도 비겁한 마음이 잘 스며들 수 있는 그때의 정서로.
결국 겉으로 보면 이렇다. 나는 또 시를 쓰기 위해 책을 읽으려고, 도망치려고 한다. 처음에 이것은 도망이 아닌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인식을 위한 공부였다. 하지만 쓰고 싶다는 마음과 써야 한다는 마음 간 힘 조절을 못하는 와중에 오갈 데 없는 마음이 읽기로 번지면 열등함의 비상구가 된다. 시 쓰기가 읽기로 투사된다. 동일시가 되고 만다. 이것은 병행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를 구해줄 수가 없는데. 근데 또 무식하게 박치기를 하다 보니 이제 읽을 수 있다는, (노동이 조금 요구되기는 하지만)현실이 그려져 일단 실천하고 말았다. 드디어, 목전에 뒀다. 15년도부터 마음의 짐처럼 남아 언젠가는 읽을 수 있기를 희망한 책은 일본 정신의학자 3명의 책이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한국어로 닿을 수 있는 정보만을 틈나는 대로 찾고 기록해뒀을 뿐이다. 기무라 빈, 야스나가 히로시, 나카이 히사오. 집에 있는 기무라 빈의 책 3권과 히로시의 책 1권, 그리고 일본 중고 책으로 주문해 둔 (결국 내 방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긴 하지만) 나머지 4권. 여기에 한두 권 더해 약 10권 남짓이 약 9년을 기다린 책들이다.
원서를 번역해 읽는 거다 보니 출간 책을 읽는 거에 비해 비용 부담이 약 2~3배다. 목 마른 놈이 우물 찾으러 땅 파는 거니 뭐. 근데 막상 읽고 나면 되게 허무할 수도 있겠단 예감도 든다. 보물을 찾기 위해 수십 년 탐험을 했지만 막상 누가 털어 가 빈 상자만 남은 걸 찾는 장면이다. 빌헬름 보링거의 책도 좀 살피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책을 찾아 읽으려는 마음에서 내가 가장 무력하게 느끼는 건, 누군가의 어휘를 만나기 전까지 스스로는 그 어휘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무능력이다. 이게 20대 때는 열정과 패기로 안 느낄 수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무능력하게 고착된 거 같다. 쉽게 말하면 내 인식, 내 생각, 내 언어가 거의 없어진 느낌이다. 이것도 어떤 끈으로 비유할 수 있을 텐데, 19년도부터 놓치고 말았다.
야스나가 히로시, 그러니까 안영호의 패턴과 팬텀 공간론의 아이디어로 적용해 보면 지금 내 정신이 어디에 끼여 숨 막히고 있는지 기술이 가능하긴 하다. 여기에 융 덕분에 확장된 의식, 그러니까 메타 인지를 접목하면 무엇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또 깜깜한 건 아니다. 사실 그동안 방황이랍시고 지지부진하게 죽은 세월을 보낼 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것들을 하나하나 다듬으면 그래도 첫 마침표는 찍을 수 있을 텐데. 그동안 체험한 게 완전한 무는 아닌데. 나의 부전감은 그걸 가리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느낄 따름이다. 그러니까 내가 목도하고 있는 건, 내가 직접 만든 것에 한해서다. 여기에 나의 집착, 강박, 불안 온갖 것들이 다 달라붙어 있다. 재생산을 안 한 지 얼마나 오래 됐던가. 그 시간에 비례해 쌓인 마음이, 그림자가 되어 시간에 반비례해 열등해진 정신이 얼마나 오래 됐던가. 퇴행은 어떤 것이 됐든 늘 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가 되고 만다. 차라리 새거인 상태에서 시작하는 초보자라면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할 수 있을 텐데. 하지 못한 세월이라는, 유예된 무언가가 현재 타임라인과 어긋나고 말아 초보자의 현존이 아닌 실존의 지평에서 이 작업을 해야 하니 과거와 현재가 양쪽에서 당기는, 어긋난 미래에서 숨 쉬는 꼴이다. 이런 도식을 일상에서 알아보기 위해 등대를 밝혀준 게 앞서 말한 저 3명이다. 그곳에 도달하고 나면, 나는 좀 더 멀리 항해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존경심이 샘솟는, 어쩌면 위대한 선배들이 안타깝게도 근래에 차례로 삶을 마감하셨다. 기무라 빈 어르신은 21년도에, 안영호 어르신은 11년도에, 나카이 히사오 어르신은 22년도에 가셨다. 특히 가장 근래에 죽은 2명이 내겐 아직 살아 있었으나 내가 미루던 새에 가 버린 사람들이다.
일본에 있는 한 사람과 DM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블로그에 안영호의 팬텀공간론을 다뤄주어 내게 도움이 많이 됐는데, 한국에서 나같은 친구가 있다는 게 기쁘다고 화답해주었다. 나의 공부는 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이해는 야스퍼스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하는 어휘다. 사고를 지향하는 사람. 이성 사용자. 머리를 쓴다는 게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다.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 '이해'라는 건, 상처받기 쉬운 현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책 속에서 간혹 상처를 받곤 하는데, 그것이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는 사건을 마주할 때 주로 벌어진다. 그런 사람들은 개념을, 형이상학을, 이론을 부정적인 무언가로 서술하곤 한다. 머리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정신 활동 중 '이성'은 마치 현실이 따라잡지 못하거나 강제로 현실을 재단한다는 누명을 자주 입는다. 나의 공부 이력을 통해 내가 취하는 태도는, 열등하지 않은 이성과는 무관한 내용이라는 것뿐이다.
이성에 대한 이성 비판은 이성 사용자에게 있어 하나의 윤리이기도 하지만, 융을 통해 말한다면 그건 그저 한 정신 활동을 균형잡지 못하는 사람에게 불가피하게 목발이 필요하다는 걸 가리킨다.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니 누군가 도와줘야 한다는 의미다. 자립하지 못하는 이성은 반드시 생명을 해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이해한다는 건 내게 중차대한 삶의 의미였다. 사회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책이 있었다. 내게 구멍처럼 나 있는 건 바로 인간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책이었다. 그중에서도 병리를 향하고 있는 책, 그것들이 내겐 일본에 있었다. 한 일본인과 화답을 주고받은 일이 내겐 책과의 만남 같다고 느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언어도 같은 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공통 분모도 협소한데, 심지어 세대도 다른 저 3명에게 나는 무얼 느끼고 있나? 이 느낌을 느낄 수 없었다면 나는 애초에 읽기를 시작하지 않았을 거 같다. 그러니 잊지 못하고 9년이나 기다리다 충동에 불을 지피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사랑 중 하나다.
고생했다고 적은 마지막 문장에, 나는 당부 하나를 적어뒀다.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고. 이제는 나의 현실로 가져올 때인 거 같다. 사랑은 의지할 수 있다고. 의심이 의지가 되는 길은 걸을 수 없는 길이다. 하지만, 융을 읽든 읽지 않든 그 정신의 이로를 아는 사람에겐 그것이 마냥 불가능한 길은 아니란 걸 알아볼 수 있을 거다. 의심은 의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역전될 때 나타난다. 물구나무 서기다. 거꾸로 되돌려 넘는 자립이다. 나는 한 번도 뜯은 적 없는 새거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