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작업 21
24.09.30
꿈 #1
어떤 집. 갑자기 나는 앞이빨 2개가 빠진 걸 알게 된다. 거울을 통해 이빨이 빠졌다는 걸 알고는 '돈도 없는데 어떡하지' 하는 근심을 한다. 이후 이불 더미에서 빠졌던 이빨 2개를 되찾기도 한다. 방에는 바퀴벌레가 득실거린다. 이 집은 왠지 도피처(?) 같은 느낌으로 쓰고 있는 거 같은데, 아니마와 같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현관으로 들어오는 기척을 느낀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불청객임을 알고, 도둑인 거 같다는 인상을 눈짓으로 주고받으며 그에게 위협을 가하려고 무기로 삼을 뭔가를 찾는다. 나는 의자(?) 같은 걸 들었던 거 같고 아니마는 방망이 같은 거였다. 이윽고 불청객은 집으로 들어와 우리가 있는 방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자를 휘둘러 가격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나의 고모 중 한 명이었다. 다행히 맞질 않았다. 고모는 나에게 아빠가 일로 오라고 해서 왔다고 말한다.
꿈 # 2
(오늘 새벽에 꾼 꿈인데 기록하지 않아 상세하지 않다) 무슨 씨앗을 심는 상황이었다. 씨앗 색깔인지 뭔지는 모르는데 '파란색' '초록색'이 이윽고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노란색(살짝 살구색?)'이 나타나며 나는 '아 맞다 이게 먼저였나' 싶은 인상을 받는다. 어떤 상황에서 '먼지'가 주요하게 나타났던 거 같기도 하다.
만다라 여정이라 이름 붙인 내면 작업 일지는 융이 말하는 개성화 작업, 자기 실현을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하기 위한 여정의 기록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실현-개성화 작업은 정신의 기능인 온전함을 세상에의 적응으로 이끌어내는 작업을 가리킨다. 이 작업은 모두에게 주어져 있으나 오직 어떤 사람들만이 수행하는 작업이다. 돌려 말하면, '정신'은 인간에게 주어져 있지만 그 정신을 스스로 거듭 변화시키는 일을 어떤 수행으로 여기는 게 필연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내가 처해 있는 정신 국면을 기술하면 이렇다. 나는 현재 나의 열등함이라 부르는 정신 기능의 작용들을 어떻게 새롭게 구조화시킬 수 있을지 모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열등함은 내가 취하고 있는 기준으로는 '사로잡힘의 여부'다. 내가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나의 열등함을 보여주는 지표다. 나는 무의미에 사로잡혀 있고,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으며, 무엇보다 레크비츠의 용어대로라면 '가치박탈', 20대의 내가 '부정성'이라 부른 바로 그 방어 기제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을 다뤄내기 위해서 어떤 접근이 유효한가? 쉽게 말하면 어떤 치료법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다.
융에게서 배운 걸 써먹는다면, 지금 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상반된 것들의 조화다. 이 기예를 과연 내가 체득할 수 있을까? 해야만 한다. 해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성 사용자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런 정신의 구조나 작동 방식 등에 대해 불필요할 정도로 모색을 해야만 했다)알게 된 여러 관점들이 있고, 이들의 언어에 도움을 받아 후대 사람으로서 해낼 수 있는 걸 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학원에 입학하는 식의 제도권 합류에 긍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전술 중 일부다. 한 개인이, 도시 속 시민이, '혼자'가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전술. 사회적 피드백이 전무하고, 그래서 누군가가 알아봐주거나 인정해주지 못하고, 즉각적인 보상이 없고, 그래서 관심을 받거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할 수 있는 적응 전략. 아마 이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도움을 받으며 여기에 도착해 있다.
어떤 사람은 왜 더 무기력한가? 이 문제를 자신의 정신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언어로 돌려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21세기는 아직 개개인의 정신 모델, 인지 모델에 대한 커스텀이 이뤄지지 않았고, (당연히 인류사에 있어서 그런 적은 단연코 없었다. 오히려 근미래에 도착할 수도 있는 정신 패러다임의 전환이 징후로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성과 성찰성이 자극되어 모두가 '나'를 느끼며 정체성, '나답게', '나다운' 등의 진정성 코드로 일상을 살아가는 문화에서 사람들은 남들과 다른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재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유행하는 심리학, 정신분석, 뇌과학, 정신병리의 용어들을 보급받으며 자신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거나 진단하거나 타인의 단편적인 면모만을 두고 특정 상태를 가리키는 단계에 도달해 있다. 키워드로 따라가면 편집증, 조현병, ADHD, MBTI, HSP, '자기 돌봄', 영성, 명상, 힐링, 위로, (어떤) 자기 사랑, 개인주의, 도파민, 전두엽 등이다. 전문적인 공부를 한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그러한 정보(여기서의 정보란 메시지다)를 제공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어떠한 저항도 없이 흡수한다. 이런 지엽적인 삽화들이 한데 모여 어떤 '유행'이나 '트렌드'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오류라고 단정할 수 없다. 21세기 문화사회는 디지털 장치 때문이 됐든, 신자유주의 때문이 됐든, 기호-감시 자본주의 때문이 됐든 구조적 발생을 특정짓기가 무색하리만치 어떤 역동이 변화무쌍한데, 그나마 우리가 인식으로 가져갈 수 있는 건 바로 사람들의 '관심'이 어떻게 모이고 흩어지는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행이나 트렌드라는 문화 용어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기도 하다.
현 사회에서 우리가 자신의 상태를 다루는 방식은 곧잘 사회문화에서 보급받는 용어로 대체하여 의식되기 쉽고, 다루는 방식 자체도 모방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건 매우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여겨져 딱히 언어로 풀어낼 정도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진정성을 자신도 모르게 추구하는(좀 더 엄밀히 말하면 어쩔 수 없이 '자극'받는)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영향 관계는 역설을 마주하는 데 무척 취약한 환경을 조성해낸다. 이제는 많은 비평가들이 다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는 '진정성 역설'이란, 진정어린 자기 자신, 유일하고도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되기' 위해 모방하고 따라하고 때로는 표절과도 같은 베끼기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만들고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논리적 역설만을 가리킨다면 사실 '그저 그런 것'이라고 거리를 둘 수 있는 기호-언어의 문제겠지만, 인격이 이 역설을 느낄 때 갖는 정동 반응은 몹시 괴로운 것으로, 흔히 말하듯 '가치의 위기'로 이끌린다는 게 역설이 지닌 중차대함이다. 즉 진정성 코드로 정체화가 자극된 인간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할' 온갖 재화-사물-이미지 등에 이끌리며 그것들을 섭취함으로써 스스로를 모양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산업 구조의 주체화 전략이란 바로 '(평균적인)소비자'이며 이 소비자라는 정체성은 진정성 입장에서 몹시도 경멸스러운 것이기에(왜냐하면 소비자에게 개성이란 어떠한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은폐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은폐된 사실이 들춰질 때가 바로 심리로 일컬어지는 어떤 정신 상태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 느낌 등을 한 상태로 포착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용어와 방식들은 다시금 그들이 개성 있는 존재가 아닌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으나 하필이면 나 자신인' 환자로 나타난다. 이 환자를 정상성으로 소급시키기 위해 해당 단어를 생략한 뒤 증상만을 나열하는 건 그리 피해를 입는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 '나는 왜 이런가'라는 자기 존재의 의문으로 당도할 때 증상으로는 자신의 주체성을 내보일 수 없다는 난처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문화 현상을 보다 개별적인 상황으로 번역해 보면, 자신의 무기력함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난처한 와중에 새로운 활동을 시도해 보고, 안 하던 경험을 시도해 보고, 사실 거의 지배적이다시피 한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일단' 주먹 불끈 쥐고 강제로라도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옵션들에서 진자 운동을 하게 된다. 여기에 실존적 무기력증을 겪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보다 심각한 갈등에 처하고 만다. 이 글은 이 '어떤 사람'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정신들이 왜 무기력에 더 취약한지를, 몇몇 학자들의 관점을 소개하는 데 있다. 나의 목표인 '상반된 것들의 조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먼저 몇 가지 전정을 할 필요가 있다. 정신 모델-인지 모델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가정'의 영역이다. 이것을 실제로 다루는 건 불가피하게 함정에 빠지게 만드는 데, 왜 이 함정에 빠지고 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선 O. S. Wauchope의 패턴 이론이 도움이 된다. 사실 몇몇 철학자들을 통해서도 이 인식에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모델로 접근하는 건 플루서의 의견을 따라 21세기에 권장하는 태도라고 확신한다. Wauchope의 패턴에 대해선 국내에서 리서치할 수 없으므로, 일본어로 소개된 내용을 번역기 돌려서 보는 게 그나마 현실적은 접근이다. 함정에 빠지는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우리는 타인의 '정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나타난 타자의 표면에 그 이면을 덧씌우는 게 바로 그 이유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아마 철학적 사유에 어느 정도 테크닉이 습득된 이성 사용자라면, 이 패턴을 갖고서도 '실존의 무기력증'이 어떠한 구조로 인해 유발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유용한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인식이 확장될 여지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런 정신 모델의 가정이 다시금 일반화되어 '어떤 사람'이라는 불특정 다수가 과연 얼마 만큼의 '사람들'을 적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다. 이 또한 Wauchope의 패턴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피드백을 갖고서 풀어내는 게 좀 더 21세기스럽다. 어떤 대상을 인지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인지함으로써 그 인지 방식을 역전시켜 대상과 관측자의 위치를 바꿔 인지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자주 일반화의 오류를 꾀하기도 하는데, 이런 현상 자체는 정신 입장에선 자연스러운 것이긴 하나 모종의 유사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파악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그릴 때 발생하는 오류인데, 엄밀히 말하면 오류라기보다는 피드백 과정의 한 상태로 말할 수 있다. 다리가 네 개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라고 물어온다면 우리는 각기 다른 포유류를 대답으로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체 상'에 대한 정보가 고작 '다리가 네 개'라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결코 그 정답을 맞추기 어려울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문제가 어떤 확률 게임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리가 네 개다,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타날 수 있는 대답들을 하나하나 모아 본다면 우리는 확률로 몇 %의 '코끼리'와 '말', '강아지' '고양이' 등으로 취합할 수 있을 것이고, 아주 적은 확률의 대답도, 아예 나타나지 않으나 분명히 대답이 될 수 있는 것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정신 모델의 가정과 '어떤 사람'과의 관계는 이런 것이다.
이 이야기를 굳이 이렇게 지루하게 풀어낸 이유는, 정신 모델이라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저러한 정신 모델이 있다는 정보를 접한다면, 그것이 어떤 사람인가와 연결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확률로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확률적 사고 방식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번역해 말한다면 우리는 그런 '어떤 사람'을 자신의 가능태로 여길 수밖에 없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던' 인식이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 확장의 무게, 책임, 의미를 피상적으로 가볍게 여겨선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모델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빌헬름 보링거는 미학의 주요한 충동에 2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공감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 충동이다. 이 충동을 구분짓는 데 필요한 문제 의식, 당대 인간들의 '미학적 관습' 등 맥락과 배경에 대해선 일단 생략한다. 그것들을 알고 나면 왜 이 충동 간 구분이 주요한지를 보다 풍부하게 느낄 순 있지만 차라리 책을 읽는 게 낫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보링거가 리글 등 연구를 통해 추출한 '추상 충동'을 느끼는 정신 양상이다. 이 정신은, 외부 세계와의 기본적인 관계가 '불안'이다. 실제하는 대상들은 어떤 사람에게 몹시도 위협적이다. '영향에 대한 불안'이 끊임없이 샘솟는다. 그가 무엇도 하지 않은 채 세계가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구도지워진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엇일까? 그는 외부 대상, 살아있는 대상의 힘을 억제할 수밖에 없다. 추상은 그렇게 몸짓이 된다. 공감 충동은 그 반대다. 외부 세계와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불안'이 아니라 '신뢰'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세계를 향해 자신감에 찬 태도로 임할 수 있다. 대상의 생동감 있는 실제로 자신의 감정을 투사할 수 있다.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 상관물'로 만들 수 있다. 그는 외부 세계에서 활기와 생명력과 생동감을 만끽할 수 있으며, 보링거의 말마따나 '객관화된 자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충동 중 한 쪽을 더 강하게 느낀다면, 그 사람은 어떤 정신을 갖게 될까? 나카이 히사오는 '미분회로 인지'라는 가정을 제시하는데, 이 인지는 마치 미분회로의 작동과 유사하게 세상과의 관계를 맺는다. 미분회로 인지란, 징후에 예민하고, 초동(초기 움직임)에 순간적으로 반응할 수 있을 만큼 민감하며, 선취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이 인지에 특화되어 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 반응, 말의 뉘앙스, 표현의 차이, 날씨나 기온, 일상의 작은 변화,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히사오 선생은 이 모델을 설명할 때 계통발생적으로도 오래된 인지 모델이라고도 덧붙이는데, 그것은 바로 양서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후각과도 같은' 반응 체계다.
미분회로가 실질로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면 이 모델에 대한 가정이 좀 더 확장된다. 입력값과 출력값 사이에 콘덴서(충전기)가 저항을 거치고 들어오는지, 거친 뒤 저항을 받는지에 따라 미분-적분 회로가 구성된다. 우리의 인지로 번역하면 이렇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온갖 자극-변화들을 먼저 '저항'으로 줄인 다음, 인지로 받아들이면 그것들의 영향은 그렇게 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오면 인지는 그에 강력한 출력을 나타낸 다음, 저항할 수밖에 없다. 히사오 선생은 미분회로 인지들이 '노이즈(소음)에 취약하다'고 덧붙이는데, 아마 스스로를 민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정-모델들은 단순히 '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를 제공해주지만, 만약 이 관점들이 조합된다면 어떤 정신으로 더 확장할 수 있는지 아직 여지가 있다. 앞서 보링거의 추상 충동을, 융은 '내향의 메커니즘'이라고 풀어낸다. 내향이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정신인데, 외부 세계와의 관계의 초점이 늘 '자기 자신'에 고정된 성향이다. 이 내향성은 추상 충동과 잘 어울린다. 몇몇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고대 인류'가 원시적인 상태에 있을 때 '실제'를 얼마나 공포스럽게 느꼈을까를 이끌어내는데, 내가 느끼기로 이런 의견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내용이 '증언'처럼 나타나고 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에 이것은 보다 원초적인 감정, 아직까지도 이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 유전되고 있구나로 말하는 게 최선인 거 같다. 예를 들어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의 방법] 속 묘사된 언어 이전의 '공포', 보링거의 '공간에 대한 영적 공포', 실존주의 계보 속에서 간혹 발견할 수 있는 '심연에 자리한 공포', 사르트르의 '구토(를 자아내는 모종의 힘)', 플루서의 '소름끼침gruseln(공포)', 마크 피셔가 포착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을 자아내는 "외부"' 등등.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공포를 느낄 수 있거나 알 수 있는, 그릴 수 있는, 무엇이 됐든 그 단어가 무얼 나타내는지 더듬거릴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추상 충동'에 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추상 충동에 익숙한 자들, 미분회로 인지에 특화된 사람들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무수히 범람하는 '인간들'(나의 작은 아빠가 편지에 썼던 '비열한 인간 새끼들')의 막대한 영향들(말, 목소리, 눈짓, 키보드로 두들긴 온갖 글자, 클릭과 터치로 만든 좋아요라는 화소 신호 등등)에 엄청난 취약함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안그래도 엄청나게 증식하고 말아버린 '사물들'의 도시에서, 엄청나게 도배되고 말아버린 기술색Tech-Color의 향연인 상품의 세계에서, 신호들이 난무하는 인공 설계의 세계에서, 그냥 저냥 살아낼 수가 없다 도저히. 도시가 구축된 이래로 어떤 이유로 인해 '익명성'이 강화되고 만연해지기 시작했을까, 도시 사회학 책들을 살피다 보면 이러한 '외부 세상의 영향력'이 인간 정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감 충동과 추상 충동은 양자택일의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충동이 정신 기능으로 '가능'하다는 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사실이다. 다만 어떤 인간에게는 왜 어떤 충동이 더 특화되어 있는가, 더 자주 쓰는 기능인가, 아니 그러한 충동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말할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다. 다만 중요한 건 이러한 가정을 통해서 무언가를 유추할 수 있다면, 우리 인류의 머나먼 조상들이 그랬듯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취하는 전략 중 하나인 '거리 두기'를, 위협적인 실제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일종의 정당방위를 너무 안좋게만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마 살면서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공감 충동은 추상 충동을 몹시 열등한 것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하기 쉽다. 추상 충동은 공감 충동을 마찬가지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하기 쉽다. 이것은 레크비츠의 [단독성들의 사회]에서 '가치 설정-가치 박탈 간 투쟁'으로 기술된다. 20세기 몇몇 비평가들이 운운하는 '가치의 위기'는, 사실 편협한 관측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냐에 대해 난처한 건 지금도 유효하다. 미분회로 인지에 특화된 사람들은 자신을 피로하게 만드는 온갖 대상들을 향해 부정적으로, 가치를 박탈하는 것으로 대응하는 게 기제로 구성되기 쉽다. 이것은 정신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타당하고도 현명한 태도다. 당연히 어떤 인간들은 그런 반응을 몹시 열등한(사실 그런 낙인을 찍는 사람들 태반이 이성적으로 열등하지만, 그래서일까, 그런 투사의 일환으로 '머리가 나쁜', '지적으로 열등한', 등으로 조롱하는 걸로 써먹는다) 반응으로 취급한다. 반면 공감 충동을 발현하는 사람들의 온갖 '가치 설정'들은, 자신들에게 강렬한 정서 체험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쉽게 동일시하며 그 대상을 숭배하거나 우상시하거나 그 대상을 둘러싼 온갖 반응들을 우월감의 재료로 삼기 쉽다. 추상의 입장으로 보면 아주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 그 지평에서, 공감은 향유를 한다. 이 구조는 내용을 달리하며 세상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주요한 인지 방식으로 자리잡기도 하기 때문에,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라는 식으로도 표현되기도 한다.
융은 공감 충동은 외향의 메커니즘, 추상 충동은 내향의 메커니즘으로 풀며 이 둘 중 하나에만 과도하게 몰입하는 게 한 사람을 어떻게 모양내는지를 묘사한다. 이 둘은 각기 다른 투사의 방식 중 하나이며, 당연히 투사들은 심리학에서 꽤나 부정적으로 다뤄지는 측면도 있지만, 앞서 말한 패턴으로 경유해 번역하면, 그것은 한 개인에게 있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어떤 위협이 되기도 한다. 미분회로 인지에 특화된 유형들은 특히나 이런 위협에 몹시도 예민하기 때문에, 당사자는 자신이 투사를 하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기제로서 써먹는 투사를 특정 개인은 위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구도가 형성된다.
이때 앞서 '어떤 사람'이라고 부른, 하필이면 Wauchope의 패턴에서 설명되듯, 자기 자신과 자아 도식 간 '인지'에 과도한 지평이 열려버린, '실존'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이 문제를 더욱 가열찬 것들로 느낄 수밖에 없다. 거칠게 말해 문제는 이중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실제라 부르는 현실에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실존이라 부르는 주체 지평에서 나타난다. 여기에 안영호의 팬텀공간론이 덧대지면, 실존 지평이 어떤 성격을 지는지를 묘사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실존 지평은 기본적으로 '유령'적 성격을 갖는다. 그것이 나타나기 위해선 반드시 현실을 필요로 하지만, 일단 나타나고 난 뒤로는 현실이 없어도 괜찮다. 따라서 이 실존 지평에 발을 들인 개인은 현실에서의 무의미함, 그러니까 추상으로 그 영향을 줄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위협을 느끼기에 취한 전략이 사실 현실의 무의미함을 더욱 증식시키는 효과를 나타낸다는 걸, 이제는 실존 지평에서도 자기 자신을 향해 그런 메커니즘이 작동되는 걸 겪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앞서 말한 현대의 '가치의 위기'가 사회문화적 표상으로 나타나고 있을 때 한 개인의 정신에서는 어떤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가능성으로 그릴 수 있게 돕는 가정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왜 더 무기력한가?라고 했을 때 내가 알 수 있는 건 이런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현대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정신 유형을 갖고 있고 이에 따라 더 무기력해질 공산이 크다. 그들은 자신이 왜 그런 정신 상태에 놓여 있는지, 어떻게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스스로 구해내는 데 남들보다 더 난도 높은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이 비교 가능한 것인가, 하는 정신 그 자체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안타깝게도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룰 수조차 없다. 심리 상담의 요법에 따라 스스로를 보듬고 다듬고 안아주는 건, 버스에 탔을 때 '문이 열리기 전까지 일어나지 마시오'와 같은 무차별적 요구처럼 모두에게 겨냥될 수 없다. 물론 어떤 상담가도 그런 식으로 사람의 심리를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를 배우고 새기겠지만, 그렇다고 현대 심리 요법이 개개인의 정신을 충분히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진척되었나 하는 건 시기상조가 맞다. 나라는 개인은 불가피하게 스스로의 치유, 구원을 향해 수행하는 노선을 채택했지만, 그래서 융을 지팡이삼아 나의 정신을 보다 온전하게 이끌기 위해 상반된 것들의 조화를 꾀해야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정신을 다루거나 매만질 수 없다. 그런 이들은 내가 불가피하게 혼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도움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의 여건이 이러하니, 지금 당장 그런 게 가능하다고 손쉽게 말할 수는 없다. 바깥의 사람들은 당신의 개인성을 존중해줄 확률보다 당신에게 투사할 확률이 훨씬 높다. 당연히 정신 입장에선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지'보다 '비열한 인간 새끼들을 피하며 살아야지'로 세팅하는 게 타당하고 자연스럽고 유리하다. 전쟁통에서 그 누가 믿음과 신뢰와 미래와 희망을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불신과 의심이 만연한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어떤 사람에게 현실은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기도 하다. 정신이 대단한 이유는, 그 와중에도 균형을 잡기 위해 온갖 기제를 발달시켜 적응을 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21세기 사회문화에서 만나는 온갖 '인간'이란, 보이지 않는 정신의 적응으로써 풍겨오는 징후들이기도 하다. 이런 접근은 미분회로 인지에 특화된 사람들에게나 사실이긴 하지만.
여튼 여러 학자의 관점들을 횡단하며 도움이 될 만한 걸 추리면 몇 가지가 있다. 무기력, 그것도 실존적 무기력증까지 확장된 것은 일단 벗어나는 게 맞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본인의 괴로움이 아마 그 성취를 무색무취로 만들 것이기에 그렇다. 이때 필요한 건 바로 '저항'이다. 앞서 말했듯 저항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게 도움이 된다. 추상 충동에 특화된 정신, 미분회로 인지에 특화된 정신들은 하나같이 이미 자신에게 들어와버린 자극들을 처리하는 데 온갖 신경 에너지를 소모한 나머지 소위 '기 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다. 이들은 '저항'을 하나의 환경으로 만들어 놓는 설계가 필요하다. 이걸 자기 계발이나 ADHD들을 위한 전략 등으로 마주해도 상관없다. 스스로의 정신에 대한 이해도가 중요하다.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자극들에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저항,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면 고립과 고독이고, 개인의 일상으로 보면 일종의 디톡스다. 이건 이미 유행하는 방법들이다.
뻔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이 방법 안에서 '저항'이 무얼 의미하는지 언어화를 하는 게 유의미하다. 그게 앞선 학자들에게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이다. 그러면 무엇보다 자신에게 가장 취약한, 상반된 '정신'을 배치시킬 여력이 생긴다. 추상 충동에겐 공감 충동이, 미분회로 인지에겐 적분회로 인지가 바로 그렇다. 이러한 구조적 이해가 없이 막연하게 '이렇게 하는 게 좋다'는 식의 유튜브식, 에세이식 대안들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이해도를 높이는 게 우선이다. 그 이해도가 어떠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식의 시도 자체가 정신과의 관계를 가리키기 때문에, 언어화의 강도와 무관하게 분명 도움이 된다. 나 또한 추상에 상반된 공감을 균형있게 가져가는 게 숙제다. 잘 못하겠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투사가 나에겐 몹시도 괴롭기 때문이다. 이 고통이 나의 상상력을 왜소화시킨다.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다. 추상 충동, 미분회로 인지에 특화된 정신은 융이 말하듯 하나의 정신 성향이다. 그것을 억지로 거스를 수는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진작에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했다. 이해도를 높여서 그에 걸맞는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공감은, 나에게 가하는 위협적인 투사들의 힘을 무마시키면서 그 의도를 관계적인 것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아마 이것은 Sedgwick의 책 [Touching Feeling]에 수록된 편집증적 읽기와 치유적 읽기의 수행 태도와도 연결된다. 그는 내가 연결시키는 것처럼 해당 내용을 풀어내는 건 아니지만, 맥락은 유사하다.
아마도 지금 당장은, 내게 주어진 게 이것뿐이라서 달리 할 말이 이것밖에 없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힘들고 지치고 괴롭지만 소모되더라도 더 체력을 기를 수밖에 없다는 것. 위협에 맞서지 말고, 그걸 받아낼 정신 에너지를 더 써야 한다는 것. 마치 힘들고 지친 청춘에게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는 거 같아 심히 좆같고 짜치지만, 스스로의 정신을 들여다 보면 달리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다. 남한테는 그럴 수 없다. 나한테, 스스로한테만 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자발적 소진.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면 참 반갑고도 기쁠 것 같다. 다른 대안이, 실용적이고도 현실적이고도 정신-사실적인 기회를 발견하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메시지 하나가 더 생길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나에게는 하나뿐이다. 여태 읽은 책, 학자들에게서 뒤적거리며 발견한 게 없다. 언젠가는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만은 절대 놓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