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노트 24
2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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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철학자 O.S. Wauchope는 일본의 정신의학자 안영호를 통해 알게 된 미지의 인물이었다. 안영호의 '팬텀공간론'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워쵸프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고, 운이 좋게도 이베이에서 그의 책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의 유일한 저서 [Deviation into Sense]는 2022년 1월 중순 나의 방에 도착했고, 2년이 훌쩍 지나 이제서야 읽고는 '이제야'라는 반가운 마음이 솟구쳤다. 나는 그의 책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그가 '진짜 철학자'라는 인상을 마구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생몰연도를 제대로 알기 위해 검색하던 오늘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시인 T.S. 엘리엇도 워쵸프를 향해 '희귀한 정신'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워쵸프와 엘리엇의 관계는, 엘리엇이 Faber&Faber 출판사에 있을 당시 조지 오웰의 책들은 출판을 거절하면서도 워쵸프의 책은 출판한 호기심가는 정황이 담겨 있다. 이게 왜 호기심가냐, 했을 때 워쵸프의 책 마지막은 '돼지'가 나오는 우화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워쵸프의 책을 다 읽고서야 상상해보지만, 엘리엇 또한 '진짜 시인'으로서 워쵸프의 말마따나 '패턴'을 알고 있었다면,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은 역시 반쪽짜리 작업물로서 그다지 매력있게 느껴지진 않았을 것 같다.)
워쵸프, 그의 나이 50세가 넘어갔을 때 [Deviation into Sense]는 세상에 나왔다. 여담이지만, 엘리엇은 그를 희귀한 정신이라고 소개하면서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진짜 글 쓰는 법을 안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난 영어를 모국어처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글맛이 얼마나 맛깔나는지 느끼지 못한다. 안영호의 책 후기를 통해 접한 소식으로, 워쵸프는 1957년 케냐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어떻게 해서 일본에 소개되었고, 또 안영호라는 사람이 워쵸프를 읽게 되어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또 독창적인 이론 '팬텀 공간론'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지는 낭만적인 이야기다. 안영호 선생의 시점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가 22살인 시절,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나라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가난했다'고 밝히며 회상은 시작된다. 그는 의대생이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하던 시기였다. 그에게는 철학적 질문이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어떠한 철학서도 그가 가진 질문에 해소감을 주지 못했고, 서점 거리를 배회하던 어느 날 우연히 워쵸프의 책 [사고 방식](이것은 일본에서 번역된 제목이다)을 발견해 끼니를 해결할 돈으로 책을 샀다고 한다. 그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첫 감정은 '해방감'이었다. 그 후 그는 소위 '철학의 병'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청년기를 통과할 수 있었으며, 그의 말에 따르면 '건강한 청년기의 후반'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워쵸프의 책이 일본에 번역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당시 엘리엇을 연구하는 일본의 후카세 선생이 번역에 힘을 써줬기 때문이었다. 즉, 워쵸프는 세상에 나타날 수 있기 위해 먼저 T.S. 엘리엇의 발견이 우연으로 나타났던 것이다(이것이 일본의 엘리엇 연구자에게까지 '연결'되었다). 그렇게 안영호 선생은 후카세 선생과 워쵸프의 책을 매개로 개인적인 친분을 맺게 되고, 이후 안영호 선생과 후카세 선생이 워쵸프를 일본에 초대하고자 계획을 세우곤 실행에 옮기게 된다. 다행히 신문사를 통해 워쵸프의 화답을 받게 된다. 그는 무척이나 반갑고도 고맙게 생각하며, 여건이 안 된다면 자비를 써서라도 반드시 일본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췄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아 안영호 선생과 후카세 선생은 신문사를 통해 그의 소식을 갈구했지만, 안타깝게도 들려온 소식은 그의 '실종'이었다. '화물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는 소식은 있지만, 그 이후로는 알 수 없다...' 당시 영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오려면 운하를 거쳐야 할 텐데 모종의 사건이 수에즈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의 소식이 끊긴 뒤, 약 50년의 시간이 흘러 안영호 선생은 2001년 '인간과학 연구 국제 모임'이라는 학제 기조에서 'O.S. 워쵸프의 차세대에 대한 기여'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 글이 실린 책을 출간하는 당시, 모든 준비가 끝나고 이제 출판을 코앞에 둔 와중에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다. 그 소식은 워쵸프의 먼 친척이며, 자신의 할아버지 형제가 O.S. 워쵸프라고 친족 관계를 설명하는 이였다. 그렇게 그의 소식을 만난 안영호 선생은 이런 '삶의 우연'을 만끽하며 그와의 인연에 잃어버렸던 조각을 맞추게 된다. 안영호 선생은 그후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덧붙이는 말이지만, 이런 '정신의 영향'은 이전에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말한 '책'을 통한 '치열한 무력의 혁명'이기도 하다. 양적인 확률-통계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계보'란, 분명 현실이자 역사다. 잘 팔리고 얼마나 유명하고 따위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를 알아봤고, 읽고 말았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게 된 그런 '자기 자신'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벌어지는 이런 삶의 우연성은 사실 낭만성과 진정성의 초석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돌이킬 수 없음'은 (우울증적 '귀환불능점'같은 의미가 아닌 자기 변용에 대한) 워쵸프의 패턴, '이해의 순간'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처음 철학 공부를 시작하던 2012년, 나는 소위 '철학의 병'에 빠지지 않으려 여러 노력을 하면서도 거침없이 철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며 느끼는 것이지만, 나라는 인간은 애초부터 철학의 병에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 없는 인간이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세상의 권유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몸부림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살았다.
나의 첫 철학 책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였다. 그의 박사 논문을 읽으며 충족이유율이라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언어'에 대해 깨우쳤던 '이해의 순간'은 내게 아주 값진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약 2년 동안 그의 책을 씹고 또 씹으며 자라난 나의 인식은 워쵸프가 말하는 '패턴'이었다. 나는 그것을 문양으로 디자인 해 반지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손가락에 끼우고 산다. 즉, 나의 패턴이란 처음 '앎'에 도달했을 때부터 이미 나에게 도착해 있었고, 나라는 인간은 그것을 곧 나 그 자체로서 여기기를 어떠한 이물감도 느끼지 않은 채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나 또한 20대의 청년기를 아주 건강하게 보낼 수 있었다. 다만, 20대 중후반에 이르러서 안타깝게도 나는 병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철학의 병이라기보다 세상에 만연해 있는 '이성-의식의 병'이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면 승부를 해야 한다는 고집으로 지금까지 오고 말았다.
'이제서야'. 그러니까 워쵸프를 이제서야 만난 건 나에게 있어 불행 중 다행이다. 안영호 선생이 그의 책을 읽고 '해방감'을 느낀 걸 나는 이해한다. 즉, 공감한다. 안영호 선생이 말하는 '차세대'는 내가 살아 있는 시대다. 그 기여를, 나는 당당히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여정은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양상으로 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더욱 난해하고도 숨막히는 상태에서 그놈의 '이성-의식'을 어떻게 '나'와 양립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여정으로 볼 수도 있다. 단순 양적 시간으로만 보면, 약 70년 전에 쓰인 [Deviation into Sense]는 분명 선구적인 책이라 말할 수 있다. 아니, 워쵸프의 책을 '이해'했다면, 우리에겐 그런 '정신'이 언제나 늘 지금 여기서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융이 말하는 싱크로니시티, 그러니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어떤 '동시성'이 시대를 공유하며 동시대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워쵸프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철학은 들뢰즈보다 앞섰고, 지금도 소위 '철학'이라 분류되는 숱한 책들 사이에서도 당당히 탁월함의 자리를 맡을 가치가 있다. 마뚜라나-바렐라 선생의 인지는 워쵸프의 아이디어와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는 워쵸프에 대한 어떠한 검색 자료도 발견할 수 없지만, 일본에서는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편인 거 같다. 국내에 번역된 일본 책에 실린 워쵸프의 문구가 인용되는 게시물을 두어 개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은 워쵸프의 책을 읽었다기 보다 그저 삶의 기쁨에 대한 인용에 불과할 뿐이다.
워쵸프가 책을 집필할 당시 영미권에서는 분석 철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한다. 한국에서 유명한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시기다. 워쵸프의 철학으로 비추어 보면 초기 비트겐슈타인(그리고 그를 향한 추종들의 철학 유행)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논고 첫 시작은 쇼펜하우어의 첫 문장,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와 동일하지만 그 끝에 다다른 '불가지론'은 아마 철학의 병에 걸렸기에 마주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다름 아니다. 워쵸프는 당대의 철학 분위기에 불만족스러운 무언가를, 잘못된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라고 안영호 선생은 추측한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책을 읽으며 워쵸프가 말하는 '패턴'을 나름의 이해로 다다르기 위해 여러 탐구를 해왔다. 워쵸프는 그 개념을 칸트의 문구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나에게는 도덕경에서부터 출발해 지금까지 여러 동서고금 막론한 저자들의 각기 다른 용어들에서 그 흔적을 쫓아왔다. 그것들은 대체로 '부분적으로'는 분명하지만 결코 전체가 되지 못하는, 매우 불완전한 것들이었다. 즉, 워쵸프 만큼 '세계'로 패턴을 말하지 못했다. 나는 나름의 어휘로 일단 '재귀성'이라는 걸로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한 세월이 수 년이다. B->A로의 개인적 이해는 그나마 가능하지만, A->B로의 패턴은 역시 까다로웠다. 왜냐하면 남들과 달리 감수성이 발달된 인간이라는 점이 나로 하여금 몹시도 해소하기 어려운 이율배반, 양립불가능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이 방면에서 도움을 준 여러 학자, 저자들의 '표현 방식'은 한때 위안이 되고 용기가 되었지만 나 스스로 변화하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었나 보다. 뭐, 어쨌든 지금까지 읽어온 온갖 책들이 '나의 현실'을 보다 확장시켜준 것은 맞다. 결국, 나의 생명은 옳았다. 이 옳음을 이제서야 '다시' 느낄 수 있게 됐다. 이 시대, 이 시대의 언어, 이 시대의 철학, 온갖 사용자들의 정신, 방식, 표현, 의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 워쵸프는 확실히 철학으로서 훌륭하다. 만약 누군가에게 철학 책을 단 한 권만 추천해줘야 한다면 이제 나는 거침없이 워쵸프를 말할 것 같다. 지금까지는 그런 '한 권'이 없었다. 그저 상황이나 문제 의식에 따라 읽으면 도움이 될, 재미가 있을 법한 책들은 있어도 '오직 단 한 권'이란 없었다. 워쵸프의 책은 그런 책이다. 다만 한국어로는 읽을 수 없고 어디서 빌릴 수도 없다. 아쉬운 일이다.
1. 패턴
워쵸프의 [Deviation into Sense]는 패턴에 대한 책이다. 패턴이란 무엇인가? 워쵸프가 패턴에 대해 1장부터 언급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패턴이란 칸트가 자기self에 대해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통일성 속의 차이이자 차이 속의 통일성(difference in unity and unity in difference)이다. 패턴은 부분이 전체와 같으며,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와 같다.
- [Deviation into Sense], O.S. Wauchope, Faber & Faber, 1948, 15p
이 패턴을 인식이 아닌 '이해'하기 위해선 안영호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복되는 무한 문양이 그나마 쉬운 예시다. 워쵸프는 리듬이나 대칭으로 예시를 들기도 한다. 여기서부터는 언어의 한계를 맞닥뜨리며 '순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재귀성을 둘러싼 이 '이해'를 언어 표현으로 붙드는 데 애를 먹는 이유와 같은 이유다. (한국어)언어란, 안타깝게도 플루서가 말하듯 '선-사슬'의 성질이며 마치 실로 꿰는 것처럼 순차적인, 차례를 갖는 2차원적 구조를 문법으로 채택한다. 나는 20대 때부터 이것이 우리 의식이나 정신의 어떤 부분을 나타내는 데 몹시도 불리하고 불완전하다고 불만을 가져왔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고차원의 언어 체계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과연 모국어처럼 학습되려면 그러한 문화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 순환을 이해하기 위해 일단 첫 문장은 '통일성 속의 차이', '부분이 전체와 같다' 따위로, 논리적으로 말하면 S->P이다. 이것을 먼저 이해한 다음, 그 반대의 방향인 P->S를 이해한 뒤, 각각을 A, B라고 묶은 다음 A->B, B->A를 이해하면 그것이 바로 패턴이다. 말이 그렇지, 이 짧은 문장들을 하나하나 이해하고 또 그들의 전체를 이해하는 건 반드시 특정 조건이 필요한데, 그 조건이란 바로 '나'다. 워쵸프의 패턴이란 곧 워쵸프의 철학이고, 이 철학은 '나로부터의 표현'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의 쇼펜하우어나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다 -> 우리는 사실의 그림을, 세계의 그림을 그린다'는 비트겐슈타인이나 크게 모순을 일으키는 공리는 아니지만, 나는 워쵸프의 공리가 보다 설득력 있으면서도 '진짜'처럼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정신의 '이성과 의식'에 중독되거나 휘말리지 않는 균형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부터의 표현, 이것은 부분이 전체, 전체가 부분이라는 패턴 그 자체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건 곧 나로서 이해했다는 것이며 그것에 어떠한 목적이나 설명도 불필요하다. 논리는 여기서 난처함을 표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순환 논법이기 때문이다. A=A다, 내가 이해한 건 곧 내가 이해했기 때문이다, 라는 말과 같다. 아마 인과론에 사고가 지배당한 사람들은 이 문턱 앞에서 과감히 등을 돌릴 것이다. 이 가로막힌 문이 무얼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무얼 보여주고 있는지 아마 그런 '의식'으로는 결단코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것이 논리 바깥의 사건이기 때문에 철학이나 이성 언어로는 그다지 매력 있게 여겨지진 않을 것이다. 즉, 굳이 말할 것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만약 일상 용어로 놀이나 재미, 즐거움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그게 왜 좋아?' '좋으니까' '그게 왜 재밌어?' '재밌으니까' '왜 사랑해?' '사랑하니까'와 같은 상황이다. 이런 질문들은 대체로 그것이 왜 '다른 것이 아닌 그것인지'를 묻는 차이-이성 의식에 기반한 '왜'로, 사물이나 물질, 객관적인 언어를 요구하는 질문이다. 철학이 늘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마치 본질이나 '보편', '절대적 객관성'을 지향하는 것으로만 여기는 건, 바로 이런 의식-패턴 성질의 구분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쵸프가 서문에서 '초월주의'에 대한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처럼, 추상적이고도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향한 언어는 자연스럽게 철학에의 흥미나 재미, 관심이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논리적 언어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 '왜?'를 던진다. 이것에 타당성을 느끼려면 우리는 마치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야기되었다는, 인과적인 관계로 인해 그러한 결과가 도출된 것이라는 데에 어떤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왜?'라는 질문을 마구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라는 질문이 곧 인과를 나타내야만 해소되는 건 아니다. 부모가 아이의 '왜?'라는 질문에 아무리 논리적으로 대답한다 한들, 아이들의 무한한 '왜?'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의 관심을 돌리거나 때로는 아이가 지칠 때까지 본인도 지치지 않거나 '분노'를 표출해 아이에게 티나지 않게 부정적인 걸 학습시키는 게 최선일 것이다 -> 이것이 안타깝게도 이성이 지배적인 시대라는 증거다. 돌아가 말해 워쵸프의 패턴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바로 그 상태가 우리 개인들에게 '이해'라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으며, 이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인식이자 현실이다. 또 이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대로 한다면, 공허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순한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 좋은 예시는 아니지만, 오늘날 도시에서는 손쉽게 반복 무늬 패턴을 찾을 수 있다. 하나의 단위로 나타낼 수 있는 문양은 부분이다. 이 부분들이 모여 전체가 된다. S->P. 조금 거리를 둬 한 눈에 다 담는다면 전체가 곧 부분과 같다는 걸 볼 수 있다, P->S. 그 다음이 아마 패턴을 '이해'하는 데 겪을 수 있는 일반적인 허들일진데, 이 두 가지 방향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다. 이것은 통일성 속의 차이, 차이 속의 통일성 / 전체는 부분, 부분이 전체 / 자와 타, 타와 자 / 삶은 죽음, 죽음이 삶 / 질적인 것이 양적인 것, 양적인 것이 질적인 것 / 등등으로 패턴은 '현실(체험)'로 확장된다. 워쵸프는 책 전반에 걸쳐 꾸준히 '질적/양적'인 구분을 갖고와 이 패턴의 과정을 표현하는 데 활용한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두 가지 방향'이 '하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바로 이 '질적인 것'을 느낄 수 있는 주관적 인식, 그러니까 '나로부터의'가 필요하다. 삶은, 현실은, 인식은 이런 '패턴'들로 나타나며 또 패턴과 패턴이 패턴 그 자체라고, 워쵸프는 1장부터 천천히 설명해 나간다.
2. 융과 워쵸프 - 자기 자신Self
작년에 흠뻑 빠져 읽었던 융은, 이번에 워쵸프를 읽으며 이 둘이 얼마나 '같은가'를 반가움과 기쁨으로 느낄 수 있게 돕는 색인이자 여운이었다. 워쵸프는 시종일관 '나'에 대한 용어로 Self를 채택하는데, 나는 이 용어가 가리키는 걸 한국어로 '자기 자신'으로 번역하는 게 그나마 결이 맞다고 느낀다. 이것을 만약 자아ego로 다루거나 '자의식'으로 한정한다면 그것은 이성-의식에 사로잡힌 재물이 되고 말 것이다.
융은 여러 책에서 자주 써먹는 비유로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되는 것이지 개인 없이 사회가 나타나는 건 아니다'를 말한다. 워쵸프 또한 완벽히 동일하게 같은 말을 한다. 이것은 무얼 가리킬까? 사회 속 개인이라는 걸 떠올린다면 아마 그 개인을 이성 언어=논리적 언어=양적인 인식으로 다루게 되는 인상을 받기 쉬울 것이다. 특히 제도나 행정 앞에 나타난 '개인'이 어떤 대우나 답답함을 느끼는지, 영화 [나, 다니엘, 브레이크]를 보더라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카프카도 도움이 된다. 우리는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된다는, 요소가 합쳐져 집합이 된다는 '추상'을 인식하려 할 때 아무래도 '개인' 같은 '나'를 슬그머니 생략하게 된다. 그러나 융의 '정신'은 이러한 '자기 자신', 그가 개성화 작업이라 부르는 '자기 실현'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사회 또한 이 원칙을 절대 위배해서는 안 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가 원형이나 상징, 연금술, 신화의 언어를 갖고와 이러한 정신을 다루고 있기에 아무래도 현대인들에게는 '신비' 따위로 인상을 남기기 쉽다. 그것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같으며, 당장의 돈벌이나 노동, 소위 먹고 사는 문제와는 철저히 무관한 것처럼, 혹은 당장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한참이나 우선순위가 밀려나는 걸로 느껴지기 쉽다.
이는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이다. 인간은 일단 '생명체'다. 생명체는 모름지기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해야 하며, 워쵸프의 말마따나 '살아있는 존재는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살아있는 존재는 오직 두 가지 행동 패턴을 갖는다. '살아있는 행동', '죽음 회피 행동'. 여기서 융과 워쵸프가 같이 읽혔을 때 그 힘은 놀랍도록 완벽하다. 나는 융이 초창기 저서에서 외향과 내향을 구분짓는 [성격유형론]을 거쳐 '분석심리학'이라 불리는 정신의 내면 작업의 일환으로 꿈을 분석할 때 어떤 태도를 갖는지를 떠올린다. (외향은 살아있는 행동의 성향을 갖기 쉽고, 내향은 죽음 회피 행동의 성향을 갖기 쉽다)그는 꿈을 늘 현실로서 다루는 데 주의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꿈에서 나타나는 남자의 '아니마'나 여자의 '아니무스', 그리고 나아가서 '상반된 것들의 조화'는 정확히 워쵸프의 '패턴'이다. 다시 말해 워쵸프는 융의 '개성화 작업'을 철학으로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마 워쵸프 선생이 살아 있다면 이런 표현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죽음 회피 행동으로서도 '개성화 작업'에 다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한 쪽으로만 한다는 의미가 아닌, '이해'의 패턴으로). 그의 책 말미에 기술된 '우화'는 패턴을 자아내는 두 요정이 나타난다. 로즈본이라는 요정은 살아있는 행동의 화신이고, 엘렌쿠스라는 요정은 죽음 회피 행동의 화신이다. 전자는 삶의 기쁨과 환희, 생동감, 활력, 있는 그대로의 만끽, 현존, 기무라 빈의 용어대로라면 Intra-Festum적 상태, 히사오 선생의 용어를 빌리자면 여운과 예감의 메타 나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이성, 논리, 전체, 양적인 것들-숫자, 추상, 거리두기, 징후, 기투해야만 하는 실존 상태, 기무라 빈의 용어대로라면 Ante-Festum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패턴이란, 이 둘의 조화다. 즉, 융의 용어대로라면 '상반된 것들의 조화'다.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당연히 전자가 숨막히고 왜소화되어 있다. 아마 그래서일까? 레크비츠의 [단독성들의 사회]에서 말하듯, 오늘날의 개인들이 왜 그렇게 '진정성 있는 "나"'에 강박으로 비춰질 만큼 집착하는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워쵸프를 선구적인 정신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읽은 어떤 사회학 책도 개인-사회 간 인식 틀을 현실로서 제공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몇몇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정체성 이슈', '진정성 역설'은 패턴의 반쪽 면에 불과하다. 즉 개인의 질적인 면을 자주 논리적으로 다루어 그것 자체를 착각하는 오류에 노출된다. 더욱이 자본주의는 이러한 요소까지도,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바로 그런 무목적성조차 양적으로 환원하는 데 탁월하다. 주목 경제, 좋아요와 알람으로 전달되는 누군가의 '관심' 속에서 사람들이 아무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그건 논리적으로는 결코 안착될 수 없다, 내가 수 년간 시달린 것처럼 가치 박탈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해답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란 고유한 것, 비교 불가능한 것, 밀도와 복잡도가 높은 바로 그것이다(단독화의 가능태다). 그것이 양적으로 환원되는 게 과연 부정적인 것일까?에 대해서는 죽음 회피 행동이 관여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라진 '개인', 어떠한 조건도 없이 성사되지 않는 '-되기'의 현장인 일상 속에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함은 곧 공감할 수 없음이고, 그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가치 투쟁의 무대 위로 내세워지게 된다. 즉 죽음 회피 행동이 작동된다. 남들의 강렬한 '개인의 드러남'은 위협이 되고 만다. 이것은 보링거의 '추상 충동'처럼, 워쵸프의 패턴에서 B가 A보다 우세한 것으로 인해 자신의 에너지를 더욱 증가시켜야만 하는 조건으로 나타난다. 워쵸프가 살아 있을 때는 아쉽게도 디지털, 매스 미디어가 세상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 막대하고도 지겨울 정도로 증식하는 인간들의 '개인성-이미지'를 일상에서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이 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분명 이 역설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로서의 표현'이 어떠한 조건 하에서 얼마나 막대한 '죽음 회피 행동'을 야기하는지 말이다.
내가 느끼기로 융의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신의 여정'은 사적인 지평 위에서 매우 탁월하고도 훌륭한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서 깨어나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몹시 훼손되기 쉬운 태도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것들을 결코 가치있게 여기지 않으며, '개인이 사회를 만든다'는 문법으로 보면, 개인들은 그런 걸 매우 하찮고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에 집중해야 한다면, 결국 바깥에서 만나는 무수한 '타인'이라는 '개인'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폭력적인지, 막대한 위협과 영향을 미치는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나에게 있어 이때 탁월한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워쵸프다. 워쵸프는 결국 융과 같은 말을 한다. 들뢰즈와도 같은 말을 하고(들뢰즈를 윤리 책으로 읽는다면), 오늘날 유행하는 소위 '현대 철학'의 핵심적인 메시지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중요한 것.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땅히 '살아있기 위해' 고려해야 할 온갖 염려들로부터 어떤 태도를 갖는 게 그나마 '좋은' 것인가?에 대한 철학의 대답은 으레 '-되기'를 향하는데, 그 대상이 '타인'이 되든 '동물'이 되든 '다른 종'이 되든 '지구'가 되든 '비인간'이 되든 '남-여'가 되든 '이민자-피난민-이방인-범죄자-정신병자-성소수자 등'이 되든 희망을 낚기 위한 미끼는 '공감-이해'가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나는 워쵸프가 제일 깔끔하다고 느껴진다. 그는 그 -되기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막연하지 않다. 아마 무수한 학자들이 빠뜨리는 바로 그 지점, '고통-괴로움-부정적인 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지점을, 워쵸프는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절대 단순히 '타인'을 향한 배려나 환대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슬로건은 역시 도덕적 구걸로 귀결된다. 아마 현존하는 온갖 캠페인-슬로건-문화 운동-혁명들이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개인들'에게서 풍겨오는 폭력성 또한 절대 도덕 우선순위로 비교될 수 없다고 여기는 입장인데, 그것이 보다 더한 고통이나 착취, 예속이나 폭력으로 인해 정당화될 수도, 외면될 수도, 한발짝 물러날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폭력은 폭력이다. 공격은 공격이고, 부정성은 부정성이다. 이것을 정치라는 이름으로 다루는 건 '개인'에게 있어 몹시 난해한 상태를 자아낸다. 인지부조화는 기본이다. 이 문제를 풀겠다고 어떤 '정치적 가능성'을 운운하는 학자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노고가 실질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지닐려면,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매우 끔찍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세상에 얼마나 많은 희생자와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증명해야 하는가-혹은 그러기 위해 타인의 평화와 위안과 안전을 훼손시키고 못 쓰게 만들어야 하는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라는 인간이 철학의 병에 걸릴 수 없는 태생적 이유는 이런 데서 비롯된다. 바로 이 '감수성'. 완벽주의라는 이름으로 빗대면, 나는 진실로 모든 인간이 '좋은' 게 아니라면 어떠한 '나쁨'도 추구되어선 안 된다는 주의다.(당연히 세상은 로크의 불평등으로 진행된다. 여기서는 '행동화'라는, 히사오 선생이 말하는 '넘어서기'라는 바로 그러한 '개입-참여'가 정치라는 이름으로, 현실-사회의 변혁이라는 이름으로 추동된다. 여기서부터 굴러가는 비합리-합리의 투쟁은 한 개인을 소진시키는 데 무척 탁월하다, 그 개인이 얼마나 지적으로 뛰어나든 아니든 상관없다. 아마 이런 측면에서도 워쵸프의 '도약-덜 전문화된' 태도는 유효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물음은 곧 '나'라는 개인이 어떻게 현실에 살면서, '살아있으면서'도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는가로 도착한다. 왜냐하면 밖에는 무수한 '나'들이 엄청난 '생명'을 뿜어내고 있는데, 그것들을 하나하나 '공감'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 막대한 에너지를 결국은 '양적'으로 환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외면이나 방임이 답인가? 그게 차선이다. 이 상황에서 잠시 쉼표를 찍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며, 진실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는 없는 것인가? 묻는 인간이 분명 세상에는 있고 나 또한 그런 인간 중 하나다. 그래서 워쵸프는 이걸 어떻게 도와주는가? 바로 앞서 말한 '외면과 방임'이 발생하는 전환, 패턴의 전환을 '이해'하는 데 있다.
워쵸프는 결코 죽음 회피 행동으로 분류되는 철학이나 논리, 이성을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나로부터의 출발'이 유일한 공리라는 점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그를 유아론자나 유물론자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슬픈 일'이거나 '유감스러운' 일이지, 그런 인식조차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불가한 건 아니다. 즉 우리 개인은 분명 '개인'(들)이다. 이 절대라고 부를 수 있는 원칙을 어기는 순간, 아마 무얼 하든 방황하고 혼란스럽고 무의미, 공허의 우주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융의 꿈 분석-개성화 작업은 바로 이 '개인'을 재생시키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무얼 맞닥뜨리고 있는가. 무엇이 주어져 있는가. 바로 여기에 숨겨져 있는 '살아있음'의 비밀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 '우연성'이라는 것이다. 이 우연성을 다루는 철학자들이 있다. 나는 그중 존경심을 갖는 이로 리처드 로티를 간직하고 있는데, 어쨌든 우리 삶에 있어 이런 우연성을 향한 '감수성'이 발달되는 건 권장할 만한 일이다.
나는 시를 쓰는 일에 있어 워쵸프의 패턴이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고백하고 싶다. 그동안 내가 왜 그런 방황을 해야만 했는지. 내가 수십 번 말했던 '정신이 망가졌던' 이유를, 워쵸프는 이해할 수 있게 보여줬다. 세상에는 확실히 인간 정신에 대해 탐구하는 무척이나 희귀한 정신들이 살아 숨쉰다. 나는 그들을 쫓고, 그들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안영호 선생은 워쵸프의 처방 하나를 소개하는데, 내가 읽기로 워쵸프는 그런 처방을 내린 적이 없었다. 다만, 그저 어떠한 것을 말하기 위해 언급한 문장이었으나 안영호 선생은 그것을 '처방'으로 포착하는 날카로운 시선이었던 것이다. 즉, 우리가 '나'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맞닥뜨리는 온갖 현실의 복잡다단한 일들 앞에서, 자기 자신으로 부하를 느낄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안영호 선생의 말은 이렇다.
인간의 작은 자아는 이 두 가지, 즉 개인의 '주체성'과 '사회의 한 단위성'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든 양립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생명체라면 누구나 이러한 시도에 완벽하게 성공할 수는 없다고 워쵸프는 말한다.
문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이 구분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만, 억누를 수 없는 분노,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형식적 순응이나 시니컬한 태도, 때때로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이해할 수 없는 폭력 등은 이 두 가지의 혼동, 나아가 역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워쵸프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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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쵸프는 간단한 처방을 하나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패턴을 다시 기억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부수적인 B면에 대해서는 이것을 정의나 진리로 여겨 떠받들지 말고, 단순히 "유감스러운 불가피성"(regrettable inevitability)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는 일본인이라 이 영어 표현의 느낌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실제로 환자와의 대화에서 이 말을 사용하여 설명하면 대부분 웃으며 동시에 안도한 표정으로 받아들인다.
유감스러운 불가피성. 아마 이를 한국어로 일상 표현답게 다듬으면, '에라이', '어쩔 수 없지 뭐', '에휴 그냥 하자' 따위가 될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매우 사소하고도, 그래서 어떠한 힘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자기 자신'을 다치지 않게 감싸는 피복같은 표현이다. 나는 살면서 이런 유감스러운 불가피성을 어떻게든 공감으로 대하려다 망가지기도 했다. 또는 저런 순간 앞에 '죽음 회피 행동'이 강화되어 그러한 현상-사태-사건을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다룰려고 하면 피곤한 사회학자, 운동, 아나키스트, 히피, 고전주의 등으로 빠지기 쉬울 것이다. 나의 경우엔 히사오 선생의 용어대로라면, 마음의 솜털이 마모되고 말았다. 나는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꽤나 단단한 구조 기반이 그래도 지탱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기무라 선생의 용어대로라면 '자기의 자기성', 에릭슨의 '자기 동일성', 블랑켄부르크의 '자명성' 등등 '나'를 지탱하는 '나라는 패턴'이 나에게는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에 단순히 가벼운 이인증 체험이나 조현병, 우울증 추체험으로 어쩌면 대가를 치렀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싸게 먹혔다. 뭐 그렇다고 영원한 건 아닐 거다. 이번에 워쵸프를 읽으며 다시금 재생과 회복에 들어섰지만, 역시 인간의 정신이 '언제' 망가지는가는 결코 예측할 수 없다. 그 긴장 관계를, 워쵸프는 다루지 않는다. 마치 포장된 보도 블럭과 아스팔트 저 밑에서 지하수의 침전으로 서서히 형성되는 '싱크 홀'처럼, 우리 인간은 안전하다고 여기는 바로 그 기반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소위 '정상인'들은 감각하지 않고 모른다(워쵸프 말마따나 죽음 회피 행동 덕분이다). 이는 역시 정신의학자들의 '눈'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번에 워쵸프를 꼼꼼히 읽은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기도 했다. 그의 '패턴'은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도 간단히 소개되고 있고, 검색을 통해 몇몇 블로거들의 '개인적 견해'로 접할 수 있지만 확실히 책을 읽어 보니 이 깊이는 간단한 내용 갖고는 가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이 '패턴'을 체화하기 위해, 현실 확장하기 위해 곱씹고 또 곱씹을 것이다. 시 작업에 있어서도 너무나 중요한 '이해'다.
[Deviation into Sense]는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이 '철학'이고, 2장은 생물학, 3장은 심리학, 4장은 사회학, 5장은 물리학(과학), 6장은 시간-공간-숫자, 7장은 Sense, 8장은 미학, 9장은 우화다. 책 절반은 여태 살면서 체득한 '이해-패턴'이 있기에 수월했지만 나머지 절반 정도는 좀 더 곱씹어야 한다. 즉, 현실-세계로 확장하기 위해선 아직 부족하다. 내 삶에 있어서는 인간관계나 내면 작업, 예술에 대한, 심리에 대한 부분은 이미 패턴 체화가 거진 완료되었다. 다만 이것은 이제 시작이며, 내가 시로 다루고자 하는 '현실' 입장에선 반쪽짜리도 아직 끝나지 않은 느낌이다, 하지만 패턴은 질/양이다 -> 난 지금 '시적인 것'이 점점 앞에 있음을 느낀다.
워쵸프가 한국에서도 두루 읽히고,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정신'에 대한 이해를 갖고 일상에서도 서서히 번져졌으면 좋겠다. 동시대라면 동시대일까, 굳이 워쵸프를 읽지 않더라도 그러한 '정신'이 세상에 창발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역시 이건 살아있는 행동이기도 하다. 베풀고 싶은 마음. 사랑. 이유? 좋으니까다. 내 의식의 문제는 소위 인간들이 자주 표현하는 '좋음'이 얼마나 인공적이고 만들어진 것인지, 인위적이고도 (내 입장에서) 짜치는 것인지 포착하는 데서 발생하는데, 이 문제는 좀 더 다듬어야 한다. 워쵸프는 앞서 말한대로 디지털-매스 미디어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패턴 갖고서 이 '증식하고 말아버린 진정성 개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안내해주지는 않는다. 아마 이건 워쵸프가 책을 낸 1948년이라는 전후 시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에 걸맞게 번역해야 하는 건 사용자로서의 행동인 셈이다. 이전까지는 이 일이 오직 죽음 회피 행동으로만 보이고 느껴졌다면, 이제는 조금씩 살아있음으로 싹트길 바라고 있다. 그 상을 보여준 워쵸프에게, 이 자리를 빌어 존경심을 담아 감사함을 전한다. 당신의 영혼을 상상하며. 또 안영호 선생을, 그가 발표한 '차세대의 기여', 나는 차세대의 한 개인으로서 그 기여를 잘 받았음을 남겨둔다.